〈 20화 〉20. 네가 없는 거리 (2)
“어떻게 사긴 샀네요….”
“그러게.”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온 우리는 그렇게 말을 하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구매한 것은 등받이가 있는 의자 두 개와 작은 테이블 하나, 그리고 싱글 치수의 침대 하나. 주인장은 내일쯤 트럭 한 대를 불러 배송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저기.”
“왜?”
“…점심은, 어디서.”
고개를 푹 숙이고 여름이는 배를 움켜쥔 채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서로의 말소리도 크게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환경이건만, 그 아이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만큼은 내 귀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음.”
“…왜 웃는 건데요.”
“안 웃었는데?”
“웃고 있잖아요….”
“…그, 혹시 냉면 좋아해?”
“말, 돌리지 마시라고요….”
가구 사는데 한 눈이 팔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음을 까먹고 있었다.
모처럼 이곳에 왔으니, 오랜만에 거기나 가볼까.
“미안, 미안해.”
“….”
"미안하다니까… 사과의 의미라고 하기에도 뭐 하긴 한데, 근처에맛있는 냉면집을 하나 알고 있거든. 거기나 가보지 않을래?”
“…알겠어요.”
다시 대로변으로 나와 가구점들을 지나고, 신호등을 건너 작은 도로로 들어가자 군데군데 자재를 실은 작은 트럭들과 불법으로 개조된 듯한 삼륜 오토바이들의 분주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분명히 이 주변이었을 것이다. 2층짜리 벽돌건물의, 그….
“….”
“어, 왜 그러세요?”
냉면집임을 알리는, 필기체로 디자인된 간판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유라 펠리스라는 이 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영어를 사용한 7층짜리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만이 서 있었다. 탁 트인 하늘을, 그 무기질(無機質)적인 그 멍청하고 아둔해 보이는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지난날, 가구 거리에서 있었던 소동을 들은 이다솜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자기도 데리고 가달라고 하며 알려줬던 작은 냉면집.
유명 만화가의 베스트 셀러 요리 만화에도 등장한 적이 있는, 6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이었건만, 어째서 저런 바보 같은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어 버린 것일까.
“아니, 원래 여기 냉면집이 하나 더 있었거든.”
“아…저기가 제일 맛있는 곳이었나 봐요?”
“아니….”
회를 넣은 함흥냉면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모인 골목, 그곳에는 본래 3개의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식당들이 있었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식당을 선택할 수 있었다. 없어진 그곳은 내 취향에는 그다지 맞지 않아 이다솜과 올 때를 제외하고는 잘 가지 않았지만 그 건물이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분명, 이 거리는 그 시절 그대로였을 터인데.
변치 않고, 쭉….
…
“저기 왼쪽에 있는 집이 제일 맛있어.”
“다행이다….”
허나 식당 하나가 줄어 균형이 무너진 탓일까, 내가 자주 가던 단골집은 입장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의 행렬이 길게 늘어 서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어, 이거 보세요. 얼마 전에 목요미식회라는 프로그램에 나왔었나 봐요.”
여름이가 가르킨 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목요미식회라는 케이블 티비의 인기 미식 프로그램을 캡처한 사진들이 늘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프로그램 내에서 대호평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찌 됐건, 인파가 이래서야 제때 밥을 먹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다른 곳으로 가자. 으음, 역 근처에 백반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시, 싫어요.”
“배고프다며? 저 정도 줄이면 한참은 기다려야 될걸.”
“…그냥, 궁금해서요. 아저씨가 맛있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맛있는 건지.”
확실히 나에게 전국팔도에서 가장 맛있는 냉면집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 집을 고를 정도로 맛있는 식당이긴했지만, 이 정도로 기대를 받으면 있는 확신도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아니, 네 입맛에 맞을지 안 맞을지는….”
“그래도 먹어보고 싶어요.”
“…알았어.”
그러나 이 엄청난 행렬에 서서 멍하니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그 아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차피 점심시간만 지나면 여유로워질것 같으니까…조금, 걷지 않을래?”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아니, 그냥. 모처럼 온 거니까 천천히 구경이라도 할까 해서.”
“알았어요.”
우리는 곧바로 냉면집 앞을 가득 메운 인파에서 벗어나 조그마한 골목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출력소나 전구나 목재를 파는 가게부터 작은 서점, 전파상 같은 이제는 영화나 근대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상점들까지. 그 사이를 음식을 담은 은색 철판을 머리에 인 아주머니와 골골거리는 자전거를 탄 중년의 남성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먼지가 쌓이고 녹슨 낡을 대로 낡은, 다 쓰러져가는 장소이건만 이 골목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점령당한 21세기 대한민국에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향수와 사람들의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강의가 모두 끝난 방과 후, 그녀, 설하와 나란히 걸었던 골목.
수다를 떨며 길을 걷다 신기한 가게를 발견하면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을 하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던 그때의 풍경은 아직도 이 거리에 남아 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아아….
너와, 다시 한 번 이 길을 걷고 싶었는데.
“뭐? 갑자기 거긴 왜… 됐으니까 여기나 가보자. 지금 아웃스타에서 난리도 아니라니까.”
“아니, 왜 자꾸 고집을 부리고 그래. 볼 것도 없는 곳인데…이제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거길 왜 가야 하느냐고.”
…
너는 왜 다시 나와 걸어주지 않았던 것일까.
새로 지은 백화점도,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도, 아름다운 수족관도.
이 거리에 비하면 그저 껍데기만 화려한 잡동사니에 불과할 뿐인데.
함께 나란히 걸으며 너의 살랑거리는 머리 사이로 보이던,
그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구나… 어, 그. 아저씨.”
“어, 응.”
“전파…상이 뭐 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음…그냥 들어가서 보는 게 빠를걸.”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
내 옆에 있던 너는 어떤 눈으로 이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저씨, 이게 뭐예요?”
“디스켓…인데. 몰라?”
“네, 뭐하는 건데요.”
“…옛날에 나온 USB 같은 거야. 거기에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었어.”
“아…! 그래서 저장버튼이 이런 모양이었구나. 그럼 이거는요?”
“그건….”
네가 없는 거리를, 이 아이와 함께 걷는다.
“더워…이제 완전히 여름이네요.”
“그러게, 에어컨도 사야 하나.”
전파상을 나온 이후로도 이곳저곳을 들러 보다 조금 더위를 느낀 우리는 명보수퍼라는, 세월이 느껴지는 명조체 간판을 내걸고 있는 작은 슈퍼의 차양(遮陽) 아래에서 손부채 질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이렇게나 더워서야….
“…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슈퍼 주변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슈퍼 입구 근처에 비치된 싸구려 뽑기 기계와 정비를 게을리한 탓인지 이곳저곳에 먼지가 쌓이고 화면에 조금 노이즈가 일어나고 있는, 작은 오락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볼록한 CRT 모니터, 어린아이를 배려한듯한 조그마한 크기의 초록색 레버와 버튼들, 그리고 제과류 자동판매기라 적혀 있는 노란색 배너와 그 안에 들어있는, 언제 넣어 놨을지 짐작조차 안되는 다 녹아버린 초콜릿 과자들.
…언젠가 가련이와 함께 플레이했었던 하나의 게임.
“의자가 너무 작은 것 아니에요?”
슈퍼에 다시 들어가 가지고 있는 지폐를 100원짜리 동전으로 바꾼 뒤 의자에 앉아 게임을 플레이하려는 나를 보며 여름이는 그렇게 말했다. 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오락기니까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모니터를 보기 위해 굽힌 등, 부서질 것만 같은 의자, 손의 반절밖에 오지 않는 레버. 제 3자가 보고 있으면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려나.
“아니, 그렇게 폭탄을 까시면… 빨리, 빨리 위로 올라가세요. 아, 진짜!”
“….”
오락기안에 들어있는 게임은 초록색 펭귄 한 마리를 조작해 폭탄으로 방해하는 적들을 모두 제거한다는, 단순한 규칙의 아케이드 게임. 캐주얼해 보이는 그래픽, 그리고 룰과 달리 정교한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폭탄과 마치 사람이 조종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적의 인공지능으로 인해 실질적인 난이도는 꽤 어려운 편에 속하는 게임이었다.
“진짜 답답하게 하시네요. 왜 그걸 거기서.”
“…한 번 해볼래?”
“네?”
“이거 둘이서 할 수 있어.”
“…좋아요.”
그 아이는 오락기 근처에 방치된 또 하나의 작은 의자를 가지고 내 곁으로 와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투입기에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자, 이 버튼이 폭탄이고 이게 점프, 움직이는 건 이걸로 움직이면 되고….”
“아아… 네.”
게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분홍색 펭귄을 조작해 척척 게임을 진행해 가려는 여름이. 그러나….
“야, 거기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이리로….”
“자, 잠시만요. 어,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아!”
“…아까는 답답하다며?”
“…보,보기보다 어렵네요.”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것인지, 여름이는 기고만장했던 초반과는 달리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해나가며 끊임없이 게임오버를 당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동전의 탑도 점점 낮아져 가더니….
“아, 아저씨. 제가 돈 바꿔 올게요. 죽지만 마세요.”
“알았어. 자, 여기….”
“아저씨! 돈 바꿔 왔어요. 이제…어.”
“미안, 이미 늦은 것 같다.”
문어를 모티브로 한 것처럼 보이는 비행형 보스를 상대하던 우리는 단 한대의 유효타도 먹이지 못하고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기만 하다 비참하게 게임오버를 당하고 말았다. 3D 그래픽으로 표현된, 펭귄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운 표정만이 오락기안에 담담히 표시되고 있었다.
“아 씨, 뭐가 이렇게 어려워….”
“것 봐, 보기보다 어렵다고 했잖아.”
“…아저씨는 이거 깬 적 있어요?”
“음, 한 번 정도는.”
그날, 가련이와 영화관 안에 있는 오락실에 갔을 때.
“어, 어떻게요? 무슨 팁 같은 거라도 있어요?”
“별거 없어.”
“네?”
“그냥 깰 때까지 동전을 넣으면 돼.”
“….”
깰 수 없으면 깰 때까지 동전을 계속해서 넣으면 된다.
언젠가, 그 아이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잠시만요.”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켜더니 쓱쓱 거리며 무언가를 정신없이 검색하고 있는 여름이.
평소에는 조용하더니, 저런 모습은 또 처음이군.
“…이제 됐어요. 다시 해봐요.”
“알았어.”
여름이의 신호에 맞춰 우리는 다시 한 번 오락기 앞에 앉아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뭐, 이번에는 돈도 많이 바꿔왔으니까 시간만 들이면 언젠가는….
“…뭐야, 그거?”
“뭐가요?”
적의 눈앞까지 걸어가 아슬아슬하게 폭탄을 놓고 도망치는 게 고작인 나와 달리 여름이는 층과 층을 이어주는, 돌아가는 발판을 이용해 투석기처럼 원거리에서 적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저씨, 거기 보너스 있으니까 점프하세요. 그리고 싹쓸이 아이템 쓸 거니까 준비를….”
“어, 어. 잠깐만.”
조금 전까지는 나와 대동소이한 실력을 갖추고 있던 여름이는 어느새 처음 보는 잔기술들과 비밀 아이템들을 줄줄 읊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정교한 오더 덕에 우리는 한 번의 목숨도 낭비하지 않고 무사히 첫 스테이지의 보스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보스까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네 번째 보스까지 와 있었다.
“아저씨, 제 쪽으로 폭탄을 패스하세요. 제가 쏠 테니까.”
“그, 그래.”
“어, 잠깐만. 이런 건 인터넷에 안 나와 있었는데….”
“이리로 넘어와, 점프해.”
처음 세 개의 스테이지와 달리 네 번째 보스는 한층 더 정교해진 인공지능과 피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공격을 두 펭귄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분전했지만, 결국 보스의 체력을 한 칸 정도 남겨둔 채 우리는 게임오버를 당하고 말았다.
“…거기 동전 좀 넣어줄래.”
“됐어요. 여기까지만 해요.”
“어, 왜? 조금 더 하면 마지막까지 깰 수 있을 것 같은데….”
“돈 아까워요. 그리고….”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귀가에 우렁차게 들린다. 여름이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배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 살랑거리는 그 아이의 머리카락 사이로 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보였다.
“말을 하지.”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진짜 돈이 아까워서….”
“아까 허둥거리면서 돈 바꾼 건 어디 사는 누구인데.”
“…그.”
자리를 정리하고 골목을 따라 냉면집으로 향하는 길, 아까의 꼬르륵거리는 소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아이의 표정이 재밌어서 말을 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 게임에서 당한 수모를 풀고 싶기도 했고.
“지, 진짜 그만하시라고요.”
“…알았어. 그나저나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뭐, 뭐가요.”
“아니, 두 번째로 게임을 시작했을 때 말이야.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척척 게임을 진행하길래.”
“인터넷에서 공략을 검색했어요.”
여름이는 담담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공략?”
“굳이 지름길이 있는데 맨땅에 헤딩할 필요는 없잖아요.”
“….”
돈을 계속 넣으면 된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게임을 할 때마다 쭉 그렇게 생각해왔다.
다른 방법도, 있었던 걸까.
“휴, 안 기다려도 되겠네.”
“…벌써 2시가 다 됐네.”
땀을 닦기 위해 머리카락을 스윽 쓸어 넘기며 여름이가 안도한 듯이 말을 꺼냈다.
“이모, 여기 회냉면 두 개 주세요.”
“총각, 선불이야.”
“제가 계산하고 올게요. 카드 주세요.”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해진 식당 안, 계산을 마친 여름이는 내 곁으로 돌아와 식당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보고 있었다.
“냉면을 맛있게 드시려면…참기름, 식초, 겨자, 설탕을…아, 이건가.”
“너무 많이 넣지는 마. 먹어보면서 부족하다 싶으면 조금씩 넣어.”
“복잡하네요…아, 이것도 공략인가.”
“뭐가?”
“아니, 아저씨가 이 식당에 자주 왔으니까 어느 정도 넣어야 적당한지 알 수 있던 거지, 저 혼자 왔으면 그것도 모르고 잔뜩 넣었다 망했을 걸요.”
“그런가?”
생각해보면, 나도 이다솜이 가르쳐 줬기에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전해줄 수 있던 걸까.
“….”
“왜, 입에 안 맞아?”
주문했던 냉면이 나오고, 양념장 배합을 마친 여름이는 냉면을 먹기 시작했지만 어째서인지 젓가락을 든 채로 굳어 있는 것이었다. 역시 입에 안 맞는 것일까? 아니면 양념장 배합을….
“…야. 천천히 먹으라니까.”
그런 생각을 마치기도 무섭게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는 후룩, 후룩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냉면 한 그릇을 비워내는 것이었다.
“…저기.”
“응?”
“그…정말로 죄송한데요.”
“괜찮으니까 말을 해.”
“하, 한 그릇만 더 시키면 안 될까요? 내일 밥 안 먹어도 되니까, 제발….”
별것도 아닌 일을 너무나도 간절한 얼굴로 말하는 그 아이의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도….
“이모, 여기 회냉면 하나 더 주세요. 특으로.”
“그, 그렇게까지 많이 필요하진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고, 감상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즐거워서.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지하철에 오래 앉아 있었으니까.”
돌아오는 길,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리고 보면 시간은 벌써 5시를 조금 넘기려 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계단 몇 개와 작은 언덕길 하나를 지나가야 하는 관계로, 우리는 초여름의 더위와 싸워가며 시멘트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길을 걷고 있자니, 문득 아까 이 아이와 함께 걸었던 가구거리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처음 역에서 나왔을 때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먼지 쌓인 골목길도, 촌스러운 간판들도, 조금 무심한 주인장이 있는 가구점도.
모두 그녀와 함께 걸었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녀, 그리고 그녀들의 흔적이, 아직도 그 거리에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 흔적들은 내가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 둔 케케묵은 감정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허나,
“…저기.”
“네?”
그 거리는, 내가 기억하는 거리와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대로변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점들이 잔뜩 생겼고, 누군가가 좋아했던 식당이 있던 자리에는 콘크리트 빌딩이 올라가 있었으며, 나만이 알던 식당은 이제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변해간다.
도시의 원형을 기억한 채로,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너와 함께 걸었던 거리에는, 이제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
“저번에 봤던 영화 말이야.”
“아, 그…노래로 대화하는 그거요?”
“그래, 그거.”
“갑자기 그건 왜요?”
“저녁 먹으면서 다시 보지 않을래? 저번에는 보다 말았잖아.”
나는 회사를 떠났다.
줄곧 이어오던 그녀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냈다.
“…상관은 없는데 또 웃을지도 몰라요. 해설 같은 거라도 들려주시면 또 모르겠지만….”
“괜찮아.”
허나 그녀들은,
너는…
아직도 내 안에 존재한다.
이렇게나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보면서 왜 웃긴 지 설명이나 해줘, 궁금하니까.”
너희들을, 아니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도 눈이 녹듯, 그 거리가 변하듯 사라질까?
아니….
아마도 불가능하겠지.
수십 년의 시간을 투자해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녀들과 보냈던 시간은, 이 칙칙한 인생에서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니까.
애초에.
“가, 갑자기요? 그, 비꼬시는 거 아니죠? 죄송하다니까요….”
“아니야,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
애초에, 나는 왜 그녀들과의 시간을 지우려고, 잊으려고 했던 걸까.
왜 그녀들을 생각할 때마다 괴로워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퇴사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불만을 말하는 그 순간에도 전우의, 아버지의, 친구의 목소리와 표정이 자꾸만 내 귀로 흘러들어왔으니까.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그래서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싫은 일에서 고개를 돌리고 잊으려 했다.
그렇지만….
“…왜요.”
“지겨워졌거든.”
이 아이가 말해줬다.
나는, 우리는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내가 괴로워서 관계를 끊은 것이고,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
그렇다면 내가 한 행위에 대해 조금도 주눅이 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피할 필요도, 외면할 필요도 없이,
온전히, 그 사실만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게 뭐야. 아무튼, 저녁은 어떻게 하실래요?”
“배달 시켜먹는 것도 지겹고, 마트나 들려서….”
“그럴까요. 오늘은 순두부….”
“잠깐만.”
“…네?”
그러니까,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더 이상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 몇 번이고 말해주마.
“미안, 먼저 가 있어.”
“…아저씨.”
며칠 전까지,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리던 그 얼굴.
떨림은, 이제 없다.
그렇기에, 너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나의 친구.
나의 이해자.
나의 사장님.
“담배, 끊은 것아니었어?”
네가 있는 거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