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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화 (1/224)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 ⓒ 흐린눈

그래 까짓거 드래곤 찜쪄먹고 마왕 등뼈 부수며 놀던 이 몸인데 데뷔라고 못하겠냐

#차원이동 #저동네만렙용사 #이동네쪼렙연습생 #아이돌 #서바이벌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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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의 연습생

"이런 젠장할."

리온은 중얼거렸다.

분명 대마도사 샤리프와 레드드래곤 케니건의 음험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 두 개자식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 자신을 불러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몸은 신의 가호를 받는 리온 드 세리엘. 무서울 것 없었다. 그러나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숨통을 조여오는 고통에 전에 없이 힘을 쓸 수 없어 괴로워하는 자신에게 샤리프가 외쳤다.

"으흐흐흐 드디어 자네와도 안녕이로군. 잘가게 용사여!"

"썩을 영감탱이! 턱주걱을 날려주겠...."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멎었던 숨을 크게 들이쉼과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낯선 광경이었다.

눈 앞에서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헐렁한 옷을 입고 팔다리를 휘젓고 있었다.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에 눈을 찡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더니 팔짱을 낀 채 험악한 표정으로 이 쪽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귀가 찢어져라 울리던 소음이 멎으며 주변에서 허우적 거리던 놈들도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헉헉대는 그들의 숨소리만이 고요해진 실내를 메우는 사이, 매서운 눈빛의 남자가 이 쪽으로 다가왔다. 리온은 본능적으로 신성력을 끌어올리려 했.....?

없다. 없어.

신의 가호로 언제나 충만하게 그의 몸에 깃들던 신성력이 없..

퍽!!

리온은 머리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볼품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어이 한재이. 똑바로 안 해? 안무 하다가 갑자기 서는 놈이 어딨어? 아무리 연습이라고 해도 안무할 땐 실전처럼 하라고 했지? 너 이게 무대였으면 대형사고야, 알아?"

한재이? 누구? ... 나?

리온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의 서슬퍼런 기색에 이미 멀찍이 물러난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무어라 쑥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명백한 비웃음.

리온은 시선을 돌리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 신이시여. 저 부지깽이는 무엇에 쓰는 물건이옵니까.'

눈 앞에 들어온 것은 땀에 흠뻑 젖은 하나의 훌륭한 부지깽ㅇ... 가 아니라 허여 멀건한 낯빛에 비쩍 곯아 빠진 애송이였다. 잘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탄력있는 근육이 촘촘히 박힌 균형잡힌 몸매는 온데간데 없었다.

"뭐 이런 염병할..."

"이 자식이 어디서 욕을 해? 야, 너 정신이 나갔냐? 더워서 맛이 갔어? 어?"

흥분한 남자가 들고있던 서류 뭉치로 또다시 뒤통수를 퍽퍽 후려갈겼다. 옆에 서서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김 선생, 진정해, 진정해. 야 한재이 나가. 너 나가서 세수나 좀 하고 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누군가에게 떠밀려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겨 세면대에 물을 틀고 얼굴에 찬 물을 끼얹으니 멍한 정신이 좀 깨는 듯 했다.

눈 앞의 거울에 비친 희멀건 얼굴.

자신의 얼굴이 아니다.

리온 드 세리엘은 짧지만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에 호수같이 파란 눈동자. 그리고 남자답게 선이 굵은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눈을 뒤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검은 머리에 희끄무레한 피부. 흐릿한 눈과 얄상한 입술까지. 무엇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재이..."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마저 낯설다.

'그런데 왜 난 이 상황이 익숙하지.'

모든 것이 낯설어야 마땅할 이 상황이 어딘지 익숙해 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한재이. 18세.

충청도에서 길거리 캐스팅 된 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작정 상경한 지 2년 3개월 째. 부모님과는 절연상태. 자신도 연예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상경한 것은 좋았으나 극도로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 탓에 겨우 버티고 있는 연습생 신분도 언제 짤릴 지 모를 아슬아슬한 상태.

"한마디로 좆밥이란거네."

얼굴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는 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리온. 아니 재이가 중얼거렸다.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만큼 서늘하고 단호한 말투였다.

'하필이면 떨어져도 어디 이런 쉰 죽 같은 놈한테.'

다시 한 번 저 세상에서 웃고 있을 두 숙적들을 떠올리며 으득 이를 간 재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샤리프는 차원이동이라는 전대미문의 술식을 설계할 수 있는 두뇌를 지닌 자였다.

그리고 케니건은 차원의 틈을 생성하고 마법진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나를 지닌 레드 드래곤.

단체행동보다는 개인행동을 선호하는 두 존재였지만 본 적도 없는 신을 들먹이며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는 용사라는 놈을 치우기 위해 힘을 합쳤다. 결국 대마도사와 드래곤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빚어낸 초유의 술식에 걸려든 셈이니 한낱 용사 나부랭이인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다행히도 수 많은 전장을 헤쳐나온 불세출의 영웅은 상황판단이 빨랐다.

그에게 있어 능력 밖의 일로 고민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재이는 거울 속 낯선 자신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앞머리에 살짝 가린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수룩해보이던 얼굴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어 보이던 소년이 있던 자리엔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씨익 웃고 있는 낯선 이가 서 있었다.

"그래도 굴러 먹던 가락이 있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눌하고 느릿한 소년의 것이 아닌 또렷하고 차분한 울림으로 변해갔다.

"이 정도 찐따 인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지 뭐."

불세출의 영웅,  대륙의 구원자, 신이 사랑한 기사라 불리며 지상 만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남자, 리온 드 세리엘. 아니, 연예인병이 들어 집 나와 개고생 중인 열여덟 한재이가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샤리프 그 영감탱이에게 감사라도 해야되나'

몸의 원 주인인 한재이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이 낯선 환경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이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 왔다면 처음 가게 될 곳은 분명 정신병원 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온 재이는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문득 유리창 너머로 안 쪽을 들여다 보았다. 저를 빼고 안무 연습이 한창이었다. 자신이 속한 팀은 C팀. 연습생의 성적순으로 할당된 알파벳 A, B, C팀에 각 팀 당 인원은 여섯. 제 기억으론 그 중에서도 자신이 꼴찌였다.

처음 연습생으로 정식 오퍼를 받았을 때 배정되었던 곳이 말석이긴 해도 A팀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2년간 그야말로 수직하강의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매 달 열리는 월말평가 때마다 까이고 빻인 자존심과 자존감은 가루가 되어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나마 타고난 끈기 하나로 여기까지 버텼지만 그마저도 아마 이번 연말을 넘기진 못할 듯 했다.

매년 말, 소속사는 그 해 신인 오디션을 통과한 아이들을 새로운 연습생으로 들이는 대신 기존 연습생 중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계약해지 통보를 하곤 했다. 이번 연말 평가때 새로 들어오는 여섯 명의 신입 대신 기존 연습생들 중 여섯의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슬쩍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제 머리통을 쥐어박던 김 선생이 도끼눈을 뜨고 저를 노려본다. 꾸벅 인사하고 제 자리로 들어갔다.

김 선생.

말은 험해도 연습생들을 동생처럼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한재이는 기억을 더듬어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아 씨벌. 힘이 딸려서 춤을 못 따라가는게 말이 돼?'

그랬다.

아이돌의 꽃 칼군무.

그들이 소화해 내야 하는 안무는 리듬에 맞춰 몸만 흔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동작이 요구되는 고도의 기술이었다. 물론 그것을 하려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 기초체력. 그런데 이 한재이는 풀만, 아니 물만 먹고 산 건지 그 기초 체력이 없어 지금 허덕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는 동작이 반 박자 늦게 손발을 타고 재현되는 이 답답함이라니.

재이는 김선생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 그래. 한재이 넌 나 좀 보자."

연습이 끝나고 다들 빠져나가는 사이 김 선생이 불러 세웠다.

'아까 욕은 그쪽한테 한 건 아닌데.'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던 김 선생이 입을 열었다.

"재이야. 아직도 밤에 알바뛰냐?"

그의 말에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다.

접시닦이 알바.

재이는 고시원에서 가까운 한남동 바에서 밤새 접시닦이를 하고 있었다. 소속사에선 연습생의 아르바이트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 도망쳐 서울로 올라온 상황에선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었다. 밤낮으로 몰아치는 일과에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미련한 놈. 이번 연말 평가에서 떨어지면 짐 싸서 내려가야되는 거 알지? 알바 같은 거 할 시간 있으면 안무 연습이나 좀 더 하라니까."

아무 말 없는 재이를 잠시 바라보던 김 선생이 가방에서 흰봉투를 꺼냈다.

"다이형님이 주라시더라. 그렇게 안보여도 네 걱정 많이 하고 계셔. 연락 좀 드려라"

한다이.

재이의 큰 형이었다.

'그러고보니 김선생이 군대 있을 때 다이형 밑에 있었다고 했었던가.'

다섯 형제 중 넷째인 재이와 딱 열 살이 차이나는 큰 형 다이는 종종 김 선생을 통해 부모님 몰래 용돈을 보내오곤 했다. 봉투를 받아 든 재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김 선생이 말했다.

"내가 사정을 봐 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러니 이제 정말 최선을 다 해 봐."

그가 나가자 텅 빈 연습실에 봉투를 쥔 재이만이 남았다. 김 선생이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정말 최선을 다 해보라고?'

이미 리온과 융화된 재이의 영혼이 울부짖기라도 하는 듯 가슴 깊은 곳에서 꾸물거리며 까닭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 해 왔는데? 왜?!!'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봉투가 손아귀에서 와그락, 볼품없이 구겨졌다. 재이가 큭큭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왜 한재이. 그런 말을 들으니까 없던 자존심이 용솟음 치냐. 병신같은 녀석. 지금 니 꼴을 봐라. 김 선생 아니라 나라도 너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할 거다. 왜 꼽냐? 억울해? 억울할 거 없어. 너를 이렇게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니까. "

거울 속 희멀건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며 재이가 말했다.

" 걱정 마. 한재이. 내가 또 뒤집기 한 판은 자신있거든."

재이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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