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4화 (4/224)

#   4 - 3627687

#

이상한 놈

"대폭 물갈이를 해야겠어."

연습생들의 프로필을 늘어놓고 회의를 연 평가단들 사이에 앉은 장 이사가 말했다.

"떨어져 나갈 애들은 좀 안됐지만 남은 애들에겐 좋은 자극이 되겠지.”

잠시 말이 없던 장 이사는 그 말을 듣고 박 이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TVM하고 진행중인 서바이벌 애들 확정됐던가?"

"거의. A팀 애들 여섯에 B팀 김도연, 그리고 이번에 JS에서 넘어온 애들 둘 해서 아홉으로 시작할 예정이야. 오늘내일 본인들에게 정식 통보 할거고. "

박 이사의 말에 장 이사가 말했다.

"김도연이 빼고 한재이 넣어 보는 건 어때?"

"뭐? 흠....."

장 이사의 말에 박 이사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한재이라....

쓸모없는 쭉정이라 생각했던 녀석이 뭘 잘못 먹기라도 했는지 그야말로 딴 놈이 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최종 조율 단계에 들어간 캐스팅을 엎자는 건 좀...

잠시 망설이던 박 이사는 힐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재이의 서류를 훑고 있는 장 이사를 바라보았다. 장태우 이사. 대박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다 하여 일명 개코로 불리는 저 남자가 저렇게 이야기를 할 땐 정말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간만에 한 건 하는 건가, 개코?"

자신의 말에 장 이사가 씨익 웃는 것이 보였다.

'저 표정은 역시 뭔가 촉이 왔다는 건데...이거 잘하면 정말 간만에 한 건 할 지도 모르겠는걸.'

박 이사는 회의실 탁자 위에 놓인 한재이의 프로필 사진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보스턴 백 하나.

정든 고시원을 떠나 ‘숙소’로 들어가게 된 재이의 짐은 달랑 그것 뿐이었다.

미리 통보받은 주소를 들고 숙소를 찾아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도착해 있던 몇몇이 자신을 돌아본다. 월말평가가 끝난 다음 날, 회사에 불려간 재이는 이미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와 자신처럼 다짜고짜 불려온 아이들 여덟명과 마주했다. 곧이어 들어온 기획팀 장 이사가 했던 이야기는 리온의 강심장을 지닌 재이도 놀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3개월 후의 연말평가에서 차기 데뷔조 인원을 가리기 위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A팀 애들이 데뷔하기 전 리얼예능을 뛸 거라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이 들어가게 될 줄은 생각치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데뷔조를 가리기 위한 서바이벌 예능.

이미 한 물 간 포맷이긴 했지만 데뷔를 앞둔 아이돌의 화제몰이로 이보다 더 한 기회는 없었다. 방송국과의 네트워크, 그를 뒷받침 해줄 수 있을 만한 자금력, 그리고 트렌드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닌 몇몇 대형 기획사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이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으나 분명 그만큼 득도 많은 포맷. 올 해 말 계약연장이나 바라고 있던 재이로서는 매우 뜬금없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이라는 느낌일 수 밖에 없었다.

- 최종적으로 한 명 만을 남길지 아홉 모두를 남길지는 전적으로 너희들의 역량에 달렸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말을 남기고 나서던 장 이사의 얼굴을 떠올리던 재이는 일단 비어 있는 방 침대 위에 제 짐을 풀었다. 냉장고 에어컨 등 대충 필요한 것만 간단히 갖춘 숙소였지만 열악한 고시원 제 방과 비교하면 방 세개짜리 아파트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프로그램이 잘 되면 협찬도 하나 둘 들어 오겠지.

아직 어색한 듯 이 방 저 방 배회하는 아이들과 그들을 쫓는 카메라들을 가로질러 재이는 핸드폰을 보며 뭔가를 체크하고 있던 담당 매니저 김석관에게 말을 걸었다.

"형 저 동네 한 바퀴 뛰고 와도 되죠?"

"어, 재이야. 오늘은 카메라 감독님 나와 계시니까 같이 행동해야 돼. 잠깐 기다려."

며칠 전 회사에서 얼굴을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로드 경력 5년차라는 석관은 이미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재이는 석관이 데리고 온 VJ와 함께 아직 낯선 길을 뛰기 시작했다.

"헉 헉 허억 헉"

재이는 자신의 옆에서 카메라도 내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VJ를 돌아보며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런닝을 시작한 지 겨우 삼십 분. 뛰는 건 자신있다며 자신만만하게 웃던 VJ가 결국 조금 쉬었다 가자며 자신을 멈춰세웠다. 숙소가 마련된 아파트 단지는 뒤편으로 꽤 높이가 있는 야산을 끼고 있었고 재이에게 그것은 딱 좋은 런닝코스였다. 약간 신이 나 오버스피드로 달린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나가떨어질 정도라니.

'체력 좋다더니 허세였구만.'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매일 이렇게 뛰나요?"

얼마간의 휴식 후 살짝 페이스를 낮춰 달리는 재이를 카메라에 담으며 VJ가 물었다.

"예 뭐. 체력쌓기엔 역시 이만한 게 없으니까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여전히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달리는 재이를 쫓으며 VJ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숙소로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 속에 각자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이는 그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매일 학교 급식과 편의점 도시락으로 식사를 때우던 재이는 식재료와 식기가 모두 구비되어 있는 숙소의 주방을 둘러보고 황홀함에 잠시 넋이 나갔다.

그리고 거의 본능적으로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걸 보니 진짜 어지간히도 감동했나보다.

재이가 뭔가 부시럭거리기 시작하자 호기심이 동했는지 숙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이 주방으로 다가왔다.

" 뭐 만들어?"

자신 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덩치가 물어왔다. 이름이 뭐였더라. 차..인혁이랬던가?

" 된장찌개."

" 이야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

자신의 말에 녀석의 얼굴에 급 친한 척을 해 온다. 속셈이야 뻔하지.

" 수저 놓고 그릇 좀 가져 와.”

자신의 말에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빤히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왜. 너도 먹는 거 아니었어? 그럼 도와야지 뭐 해?"

재이의 말에 인혁이 씨익 웃었다.

‘짜식 거 되게 잘 생겼네.’

재이는 부담스럽게 잘생긴 인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야 너 요리 할 줄 아는거 맞지? 실은 소금하고 설탕하고 구분 못해서 막 거꾸로 집어넣고 하는 거 아냐?"

" 된장찌개에는 소금도 설탕도 안들어가니까 걱정마."

자신의 대답이 재밌다는 듯 하하 웃는 인혁을 슬쩍 흘기던 재이는 인혁과의 대화를 듣고 다가온 몇몇이 주방 입구에서 얼쩡거리는 것을 보곤 말했다.

" 뭐 해. 물이라도 떠다 놓고 와서 앉아.”

그리고 몇 분 뒤 재이는 마음씨 좋은 주방 아줌마 역할을 자처한 자신의 발등을 찍었다.

" 야 한재이. 이거 완전 맛있어. 우리엄마보다 니가 낫다. 좀 더 없냐?"

조그맣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주제에 벌써 세 그릇째 먹어치우며 밥그릇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입을 놀리는 저 녀석은 미국에서 왔다는 엠케이.

" 이거 떨어져도 먹고 살 길은 있어보이니 좋겠네."

그냥 맛있다고 하면 될 걸 배배 꼬아 던지는 저 주둥이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생긴 이환.

" 내일 아침엔 뭐 할 지 정했어? 난 오믈렛이 좋은데. 오믈렛도 할 줄 알아?"

내가 무슨 식당아줌마인 줄 착각하는 저 사차원은 남궁찬.

그리고.

" 너 그냥 나랑 결혼하자.”

한 입 먹자마자 다짜고짜 청혼한 잘생긴 띨빡 차인혁까지.

자신의 저녁식사에 숟가락 하나 들고 끼어든 녀석들 치곤 뻔뻔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재이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혼자 차려먹고 말 걸 이라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난 다 먹었으니 뒷정리 잘 해라?"

먼저 일어서는 재이에게 나머지 넷의 시선이 꽂혔다.

" 왜? 설마 먹여준 것도 모자라 설거지까지 해 달라는 건 아니지?"

눈썹을 치켜뜨며 묻자 찔끔한 듯 시선을 돌리는 녀석들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난 재이 뒤로 설거지 당번을 정하겠다며 가위바위보냐 사다리타기냐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방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놈이야'

한재이에 대한 인혁의 평가는 그랬다.

지난번 월말평가 때 처음 본 한재이라는 녀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퇴출1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평가단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에도 오디토리엄 객석 제일 뒤편에 마련된 연습생들의 대기석 끄트머리에 앉아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던 그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평소같았으면 다른 팀들의 무대 따위 보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 C팀의 무대까지 자리를 지켰다. 자신이 보기에도 딱히 합이 맞는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삐걱대는 C팀의 퍼포먼스 속에서 한재이 혼자 돋보였다. 타고난 신체 비율에 리듬감 또한 좋은 것인지 절묘한 타이밍으로 연결되는 동작들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격렬하게 이어지는 안무에 반해 그야말로 무심한 듯 서늘한 표정이 묘한 매력을 주는 녀석이었다.

승부욕과 호기심이 뒤엉켜 인혁의 가슴께를 근질거렸다. 평가단이 단체로 눈이 삐지 않은 이상, 별명처럼 퇴출 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대로 한재이는 기획사의 새 데뷔조를 정하기 위한 서바이벌 예능에 합류하게 되었다.

카메라 감독들과 스탭들, 매니저로 북적이는 숙소에 처음 발을 디딘 아이들이 아직 어색한 환경 속에 우왕좌왕 하는 사이, 그 녀석이 저녁운동을 하겠다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인혁은 조금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비롯해 이미 방송사 전파를 몇 번 탄 적 있는 A팀 멤버들 조차 데뷔가 걸린 서바이벌 이라는 무게에 눌려 우왕좌왕 할 정도였건만, 회사 내 카메라 테스트 때 빼곤 이 쪽 경험은 아직 전무할 녀석이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움직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한재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으로 쫓게 된 인혁은 그가 돌아와 향한 곳이 제 짐을 풀어놓은 방도 거실 한 구석도 아닌 주방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능숙한 듯 일정하게 들려오는 칼질 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몇 마디 주고받다가 된장찌개를 만들겠다는 말에 눈이 번쩍 했다. 잘 만들면 좋고 못 만들어도 그림이 나오니 좋지.

'이 자식 역시 예능을 아네..'

인혁은 영업용 미소를 띄운 채 물었다.

" 야 너 요리 할 줄 아는거 맞지? 실은 소금하고 설탕하고 구분 못해서 막 거꾸로 집어넣고 하는 거 아냐?"

"된장찌개엔 소금도 설탕도 안 들어가니 걱정 마.”

...분하게도 리액션 타이밍을 못 맞췄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갔거든.'

말 붙이기 힘들어 보이는 서늘한 인상과는 달리, 자신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를 하는 녀석의 모습은 조금 의외이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무지하게 낯 가릴 것 같이 생겨서는, 뒤늦게 음식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다가온 이환이나 엠케이, 남궁찬에게도 하나하나 눈을 맞춰가며 먹고싶으면 물이라도 떠 놓고 앉으라 협박아닌 협박을 하는 모습이 조금... 그래, 아주 조금 호감이었다.

그리고 그 희미한 호감은 녀석이 만든 된장찌개를 한 숟갈 먹어 보고는 바로 최고치를 찍었다. 뇌가 생각하기도 전에 "나랑 결혼하자"라는 본능적인 고백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진짜 할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맛있었다.

데뷔 못 해도 먹고 살 길 있어 좋겠다는 이환의 배배꼬인 칭찬에 녀석이 샐쭉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이환의 의견엔 자신도 찬성이었다. 숙소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제대로 된 음식과는 안녕이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기우였음을 느끼며 요리스킬을 장착한 놈을 프로그램에 끼워 넣어 주신 신의 배려에 감사하기로 했다. 아 신이 아니고 대표이사님이구나. 뭐 그거나 그거나.

그리고 차인혁의 한재이에 대한 평가는 모두 모여 펼쳐진 잠자리 배정을 위한 사다리타기에서 결론이 났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사다리를 타는 한재이의 모습은 엄근진 그 자체였다. 그리고 결과 그의 사다리가 1등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음방 1위라도 한 듯 기뻐날뛰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이상한 놈이야.’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