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3629910
#
1차 경연의 결과
이런 빌어먹을.
방금 막 뽑은 번호표를 바라보며 재이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오늘 영 운수가 더러울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맨 끝일 게 뭐야. 그것도 보컬지망에 이미 선배들과 몇 번 피쳐링도 한 적이 있는 실력파 이환의 뒷번호였다.
'쉽게 가는 법이 없지 아주.'
잠시 번호표를 내려다보던 재이는 생각과는 반대로 씨익 웃으며 자신의 번호를 평가단과 카메라를 향해 흔들어보인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나 할 만큼만 하면 끝이었다.
지난 일주일, 리온으로서의 기억을 최대한 살려 그 놈의 흡인력이라는 걸 끌어내는 법을 연습해 왔다. 나름 애절한 발라드인데 내 사랑을 받아줄래 아니면 그냥 뒈질래 하는 식으로 느껴지면 어쩌나 싶어 음색을 가다듬는 데 집중했다.
'내 귀로 듣기엔 그냥저냥 들을 만 해 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
긴장이야 뭐 맨손으로 칼창이 난무하는 전장도 수없이 헤쳐온 몸인데 이깟 몇 사람 앞에서 노래 한 곡 부르는 것이 대수겠는가. 재이는 천천히 무대 뒤편에 마련된 대기실의 간이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른 녀석들의 퍼포먼스를 감상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만.”
벌써 네 녀석 째였다.
문선일 대표의 차가운 말과 함께 채 2분을 넘기지 못하고 새로 들어온 녀석의 무대가 토막이 났다.
이어지는 독설에 주눅든 녀석이 한껏 쳐진 어깨로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홉 명의 아이들 가운데 중간에 끊기지 않고 통으로 자신의 무대를 하고 내려온 것은 차인혁과 엠케이 남궁찬 셋 뿐이었다. 한껏 경직된 분위기 속에 이환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그가 선택한 곡은 몇 해 전 크게 인기를 끌었던 빠른 비트의 러브송이었다.
원곡 자체가 고음에 자신있는 원곡자에 맞춰진 탓에 꽤 소화하기 힘든 고음임에도 원키로, 경쾌하고 세련된 감성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쳐지는 곳 없이 소화해내는 모습이 역시 신인답지 않게 노련해 보였다.
저 얼음장 같은 대표조차 고개를 까닥거리며 리듬을 타는 것이 보이자 재이는 살짝 초조해졌다.
'부적맨아 힘 좀 주라.'
평가단석에 앉아있는 차상혁을 힐끔 바라보았다. 잘생긴 부적을 쳐다보고 있자 시끄러웠던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오. 영험하네..'
혼자 킥킥 웃고 있는 사이 무대가 조용해졌다. 이환의 곡이 끝난 모양이었다.
칭찬, 지적, 조언. 조금 전 반토막 난 무대에 무자비한 코멘트로 너덜너덜해져서 내려오던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살짝 긴장한 듯한 이환은 아직 여유로워 보였다.
스탭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무대에 오를 순간이 왔다.
재이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적막이 가라앉은 무대 위
한 가운데 자리한 의자.
평가단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의자에 걸터앉은 재이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쏟아져 내리는 스포트라이트 너머 조명이 꺼져 어두운 곳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상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허름하고 낡은 고시원 옥상.
환하게 빛나는 전광판을 바라보던 자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감았던 눈을 뜸과 동시에 곡이 시작되었다.
".....씨발..."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식힐 겨를도 없이 모니터 앞을 차지하고 앉아 한재이의 무대를 보고 있던 이환이 나직이 욕을 내뱉었다. 주변에 앉아있던 몇몇이 그 소리에 흠칫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도 이환과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니터에 비친 무대는 이미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을 향한 절실한 연모의 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혼자 하는 사랑의 애달픔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손에 닿을 듯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듣는 사람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듯한 감정의 파도에 저절로 숨이 멎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처연하게 떨리자 그걸 보고있는 이 쪽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안무도 조명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무대 위, 한재이 한 사람만이 그저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있을 뿐인데도 저 넓은 무대가 꽉 찬 듯 시선을 돌릴 곳이 없었다.
'이런 로우템포 발라드로 이런 무대장악력이라니. 이새끼 무슨 약이라도 빤 거 아니야?'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한재이의 재수없게 잘생긴 얼굴을 노려보며 이환은 으득 이를 갈았다.
삑사리. 삑사리. 삑사리 내라 삑사리 삑....
"....하아"
곡의 마지막은 이환의 진심어린 저주가 무상하도록 곧게 뻗어나가는 미성이었다. 절절히 토해내듯 몰아치는 마지막 구절에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반주가 서서히 잦아들고 곧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모니터 앞에 모여선 채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도, 화면 속 비춰지는 평가단들도,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짝짝짝..
문선일 대표였다. 시종일관 독설과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가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행동이 주는 의미에 이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니터는 한가득 한재이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심장을 옭죄는 듯한 목소리로 절실하게 제 감정을 토해내던 사람 같지 않게 담백한 얼굴이 환한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신인답지 않게 깔끔하고 세련됐던 이환의 무대는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한재이. 그의 목소리만이 스튜디오 안팎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겼을 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차경연은 얼터너티브 힙합으로 유명한 그룹의 곡을 커버한 차인혁의 승리였다. 마지막에 극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재이였지만 곡 해석과 기술력, 그리고 아이돌로서의 장르적 해석력 등 종합적인 평가로서는 차인혁과 이환의 뒤를 잇는 3등이었다.
그러나 순위와는 상관없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바뀐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조용한 발라드 한 곡을 불렀을 뿐임에도 듣는 사람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압도적인 매력을 발산한 무대였다.
퇴출1호라는 타이틀 답게 적당히 초반 화제몰이에 쓰이다가 경연 시작과 함께 광탈시키겠지 하는 주변의 생각을 단번에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그저 그렇게 바닥만 받쳐 주다가 탈락해 버리리라 생각했던 녀석이 단번에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오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데뷔라는 목표를 놓고 경쟁하는 다른 연습생들이었다.
"한재이, 선택하겠습니다."
인혁의 말에 재이와 이환의 눈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다음 경연은 팀대결.
1등과 2등으로 첫번째 미션을 통과한 인혁과 이환은 자신과 함께 할 멤버를 고를 수 있었다.
인혁이 고른 첫 번째 인물은 한재이.
보컬욕심이 남다른 이환으로서 한재이란 딱히 욕심나는 팀원은 아니었지만 인혁이 아무런 주저 없이 한재이를 택하자 왠지 자존심이 구겨지는 기분이었다.
"남궁찬 선택합니다.”
"그럼 저는 엠케이 가겠습니다.”
첫 경연에서 탈락한 한 명을 빼고 나머지 여덟명이 각각 인혁과 이환의 두 팀으로 나뉘어졌다. 이번 미션은 선배 아이돌곡의 커버링. 아이돌로서의 자질을 두고 벌이는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이었다. 팀으로서의 퍼포먼스에 공헌하면서도 자신만의 매력을 얼마나 잘 어필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이환은 인혁의 팀 쪽에 선 한재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퇴출1호라 불리던 녀석에게도 숨겨진 한 수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 운빨, 이제 아작 내 주지.’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올라 온 자리인데.
겨우 저기 막 고지가 보이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귀같은 녀석에게 데뷔조의 보컬 자리를 빼앗길 순 없었다.
이환은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하루종일 이어진 녹화에 평가단의 피도 눈물도 없는 코멘트로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친 그날 밤
"젠장할. 이 - --- ------!!"
얌전하게 생긴 얼굴과는 반대로 불같은 성격인 이환은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유혹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걸쭉한 욕을 내뱉고야 말았다.
얼큰한 냄새에 못 견디고 거실로 나와보니 예의 그 고정멤버가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홀린 듯 다가가 확인해 보니 커다란 냄비 속에 새빨간 국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만두가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만두전골.
만두전골!
만두전골!!!!
악마의 자식 한재이가 자신을 발견하곤 먹고싶으면 얼른 움직이라는 듯 저기 수저통을 턱짓했다. 그 옆에서 이미 제 앞에 놓인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냄비 안에 남아있는 전골을 곁눈질하던 남궁찬이 이환의 욕 퍼레이드에 놀라 말했다.
"뭐야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 아직 다 먹은 것도 아닌데 웬 성질이야.”
그러면서도 한 국자 더 떠서 제 그릇에 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냄새 나면 곧바로 나와야지. 늑장 부린 대가다. 굶어.”
남궁찬에게서 빼앗듯 국자를 집어채며 인혁이 거들었다.
"안 먹을거면 저리 좀 비켜봐. 걸리적 거려.”
엠케이가 다급하게 보챘다.
한재이놈이 인혁에게서 국자를 빼앗아 들고 엠케이에게 한 번 크게 떠 주곤 냄비를 기울여 제 그릇에 담는 것이 보였다. 장정 넷이 달라붙으니 저 커다란 냄비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자존심이 있지 참으라는 이성의 목소리를 비집고 만두전골엔 죄가 없으니 일단 먹고보라는 본능의 속삭임이 꾸물꾸물 흘러나온다. 이환의 이성과 본능이 치고박고 하는 사이 눈 앞의 전골은 이제 마지막 한 국자로 끝이었다. 염치나 눈치따위 개나 줘 버린 저 남궁찬 자식이 그 마지막 국자에 손을 뻗는 것을 본 순간,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갔다.
찰싹.
남궁찬의 손등을 찰지게 때린 이환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본능에 져 버린 자신의 나약한 이성에 분노했다. 동시에 자신의 내적 갈등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악마의 자식, 아니 악마 한재이를 노려보았다.
"먹고싶으면 수저 놓고 앉든가."
마치 '네 놈이 이걸 안 먹고 버틸 수 있겠냐'라는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한재이의 말투에 울컥했지만 주책맞은 손은 이미 수저통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 제길 나새끼 병신새끼....'
이환은 울고싶어졌다.
빌어먹을 만두전골은 눈물나게 맛있었다.
그리고 한 쌍의 눈동자가 그런 그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