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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종은 아무나 하나
팽팽한 분위기 속 인혁과 엠케이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는 다음 경연 주제곡.
선곡부터 난항이었다.
차인혁의 조는 랩파트와 안무에 익숙한 차인혁, 외모와는 달리 춤에 일가견이 있는 엠케이, 보컬지망인 심은규와 한재이. 이렇게 넷이었다.
"아 걸그룹 가자고 걸그루웁!!!"
거의 생떼를 쓰듯 우기고 있는 엠케이 옆에서 잘생긴 눈썹을 팍 찌푸리고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차인혁.
"안 돼. 이게 무슨 추석장기자랑도 아니고. 왜 하고 많은 아이돌 넘버들 중에 걸그룹의 곡을 커버를 하자는거야 대체?!"
차인혁의 말에 엠케이가 대꾸했다.
"재밌잖아. 분명 재밌을거라고!! 여장을 하자는 게 아니라 커버만 하자는 건데 왜 그렇게 질색을 하는건데 대체?!"
엠케이의 말에 차인혁이 말이 안통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눈치를 보던 심은규가 주저주저 말했다.
"그 그러지 말고 다수결로.."
"아까했잖아 그거!"
인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속도 없는 엠케이성애자 한재이때문에 결론이 안 났잖아!"
인혁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이 쪽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한재이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소심한 성격의 은규가 어깨를 움찔 하자 엠케이가 맞받아쳤다.
"그게 아니지! 니가 이렇게 윽박지르니까 은규가 제 의견을 제대로 못 낸 거잖아! 은규야 괜찮으니까 말해봐. 너도 실은 내 제안 괜찮았지 그치??"
은규의 팔을 잡아끌며 원하는 대답을 강요하는 엠케이를 보며 인혁이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당장 곡을 결정해 파트를 나누고 안무를 짜고 연습에 들어가도 빠듯할 시간에 벌써 반나절을 씨름중이었다. 초조함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던 재이가 나섰다.
"각자 그 곡을 미는 이유를 말해 봐."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냉큼 입을 열었다.
"걸그룹이라고 다 섹시 귀욤한 노래만 부르는 거 아니잖아. 이건 사랑 노래도 이별 타령도 아니라 파트만 잘 나누면 각자 자기를 어필하기엔 딱 좋을거라고.
이번 경연은 팀 별 과제이긴 해도 일단 각자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 놓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결국 마지막엔 팀별로 성적이 나뉘는 게 아니라 그 중 몇몇 개인의 모가지가 잘릴테니까 말이지."
엠케이가 핵심을 짚었다.
재이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이번 경연은 팀 대결이었지만 평가는 개인 단위로 이루어 질 예정이었다. 즉 엠케이의 말 대로 팀플레이를 하면서도 최대한 각자의 역량과 개성을 심사위원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평소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엠케이가 여기 모인 누구보다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놀란 인혁이 입을 벌린 채 엠케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헛똑똑이 같은 녀석.
평상시엔 앞으로 나서서 아이들을 챙기는 리더의 역할을 자연스레 맡게 되는 차인혁이었지만 저렇게 보면 저 녀석은 사실 순 맹탕이었다.
뭐랄까. 그냥 타고난 외모와 스킬셋이 이미 넘사라 머리 같은 거 안 굴려도 살아남는 케이스랄까.
‘전형적인 재능충 새끼...’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혁을 바라보며 재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엠케이 네 말은, 이 곡은 각자 튈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거네?"
은규가 물었다.
그로선 필사적일 수 밖에 없었다.
차인혁은 이미 데뷔가 확정되었다고 소문이 돌 정도로 연습생들 사이에서 넘사벽인 존재.
엠케이는 저 인형같은 외모와 톡톡 튀는 말투 외에도 연습생들 중 가장 뛰어난 리듬감을 지닌 춤꾼이었다.
그리고 한재이 저 녀석.
저 녀석만큼은 밑에 깔고 갈 수 있다고 생각 했건만, 1차경연 때 보여준 그의 모습은 정말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스튜디오 안 모두가 숨죽이게 한 그 음색이라니.
차인혁과 엠케이, 그리고 한재이.
은규에게 이들과 한 팀이 된 것은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독일 수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묻히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은규는 밀려드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원곡도 딱 네 명이니까 파트 분배 할 때도 쉬울거라고. 안무는 이미 머릿속에 생각 해 둔 게 좀 있으니까 인혁이랑 좀 맞춰 보면 금방 나올 것 같은데. 어때?"
엠케이의 시선이 인혁에게로 꽂혔다.
"흠... 일단 그 생각해 뒀다는 그 안무부터 좀 봐봐 그럼.”
"좋았어!!!!!!!!"
방방 뛰며 꺅꺅 소리를 질러대는 엠케이 옆에 선 인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
우여곡절 끝에 커버곡이 결정되고 안무연습이 한창인 연습실에서 재이는 문득 든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또네....’
최근 주변 사물이 묘하게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온으로서 저 쪽 세계를 종횡무진 하던 시절엔 그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가호를 받은 그의 능력은 특별했다. 남들보다 더 멀리, 더 자세히 볼 수 있었고, 누구보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기감을 가졌으며 한 번 본 것은 어지간해선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는 신의 가호가 사라진 전혀 다른 세계.
게다가 자신은 신의 기사 리온 드 세리엘이 아니라 아이돌 연습생 한재이였다. 최근 몇 개월 간 악착같이 트레이닝을 반복해 온 덕에 조금 봐 줄 만 해 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리온의 기억을 가진 자신이 보기에 한재이는 그저 약골인 일반인 1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마치 리온으로서의 한창 때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1차 경연때 까지만 해도 어렴풋이 느껴지기만 했던 것이 지금 이렇게 다른 녀석들과 함께 연습을 하고 있자니 확실히 느낌이 왔다.
'동작이 잘 보여.'
그랬다.
안무 시범을 보이고 있는 엠케이의 움직임이 슬로우모션처럼 자세히, 촘촘한 밀도로 눈에 들어왔다. 분명 빠른 템포의 꽤 복잡한 동작이었음에도 한없이 느리고,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작과 동작 사이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는 느낌이 마치 적이 휘두르는 검을 눈 앞에 두고 그 찰나의 순간에 공격의 허점을 파악하고 카운터를 날릴 지점을 찾아내던 그 느낌과 비슷했다.
재이는 저 쪽 동네에서 온 대륙이 칭송하던 불세출의 용사 리온의 재능이 한재이의 몸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엠케이, 이 부분 말인데. 이런 식으로 한 템포 당겼다가 다음 박자에 치고 들어가면 임팩트가 더 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진지한 얼굴로 자신에게 물어오는 한재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엠케이는 생각했다.
'저런 괴물같은 자식 별명이 퇴출 1호라니. 회사 높으신 분들이 프로그램 띄우려고 물밑 작업 제대로 해 뒀던 게 분명해.'
자신이 알고 있기로 - 그리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기로 - 한재이의 희망 포지션은 보컬. 그것도 메인 보컬이 아닌 서브보컬이었다. 자고로 서브 보컬이란 대부분 뭔가 두루두루 잘 하는 녀석들이 맡곤 했다. 바꿔 말하자면 춤은 대충 따라오는 정도지 저렇게 안무담당에게 팩폭을 해 댈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이다.
'그냥 얼굴로 밀어도 될 놈한테 왜 능력까지 몰빵하신거야!!!!'
엠케이는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했다.
***
강렬한 비트사운드와 함께 인혁의 나직하지만 힘있는 랩이 시작되었다. 팀원 모두 올 블랙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춘 가운데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혁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한 손에 든 스틱을 돌렸다.
천천히 심사위원석의 인물들과 시선을 맞추던 인혁이 새하얀 스틱을 들어 자신의 친형 차상혁을 겨누었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씨익 웃는 차인혁과 미간을 찌푸리는 차상혁의 닮은꼴 얼굴이 교차편집 되면서 두번째 미션곡이 시작되었다.
- 와 오프닝부터 대놓고 차상혁 버프 치사하다
- 차상혁 동생 형이랑 존똑ㅋㅋㅋㅋㅋ
- 저거 의상 올블랙으로 맞춘 것 같은데 차인혁 혼자 흰스틱 드는 거 반칙 아님?
- 비주얼 씹어먹네 역시 우월한 유전자.
- 오프닝 도중에 광고라니 이봐요 피디선생 상도덕 어딧???
- 광고 더 붙은 것 같지 않음? 지난 주보다 긴 것 같아
파일럿 방송 후 입소문이 컸던 탓인지 프로그램 관련 인터넷 게시판은 2회 오프닝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체감상 도통 끝날 것 같지 않던 광고가 끝나고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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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 전. 케이엠 연습실]
자막 뒤로 인혁과 엠케이가 경연곡 선정을 두고 옥신각신 설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무엇이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해 내는 형 차상혁의 얼굴을 그대로 빼다 박은 동생 차인혁의 이미지는 결단력 있는 리더 스타일의 상남자였다.
그러나 처음엔 그토록 싫다고 질색하던 걸그룹의 안무를 팀컬러에 맞게 변형하는데 골몰하고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허당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여긴 이렇게 스핀하면서 원 투 쓰리. 이렇게."
"원 투 쓰리. 이렇겐가?"
인혁의 리드에 따라 안무를 맞추는 한재이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자 게시판의 리젠에 스피드가 붙었다.
- 방금 움직이는 거 봤음? ㅈㄴ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침????
- 차인혁 놀라서 굳은 거 봐 ㅋㅋㅋㅋㅋ
- 한재이 몸치에 박치라고 한 트레이너 짐 싸야 할 듯
차인혁과 한재이, 엠케이와 심은규, 2인 1팀으로 안무를 익혀나가는 모습을 잠시 비추던 카메라의 화면이 빨리감기처럼 빨리 돌아갔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
.
.
긴 시간동안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연습에 지친 멤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아직 한 사람, 한재이만은 거울 속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동작을 가다듬고 있었다.
애저녁에 나가떨어져 연습실 바닥에 휴지조각 처럼 널부러져 있던 심은규의 초점없는 눈동자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저건 괴물이야..."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넋나간 표정의 은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화면 속에서 나직히 울려퍼졌다.
- 와 체력 장난아님 무슨 에너자이저이심?
- 심은규 넋부자 ㅋㅋㅋㅋㅋ 어쩜좋아 불쌍해ㅋㅋㅋㅋ
- 진심 도핑테스트가 필요하다고 본다 ㅋㅋㅋㅋ 뭐냐 저 사기캐 ㅋㅋㅋ
댓글이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인혁의 팀은 그 후로도 혹독한 스파르타식 스케줄로 안무와 보컬을 다듬어갔다.
애초에 잘못은 의욕에 앞서 스파르타식 연습 스케줄을 짠 엠케이와 차인혁에게 있었지만 그 말도 안되는 스케줄을 모조리 소화해 내는 한재이 탓에 나머지 멤버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그 무리한 설정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연습생 생활을 1년 더 하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일 주일 만에 볼살이 쪽 빠져 한 층 더 날렵한 인상이 된 심은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원래도 약간 팔 자로 쳐진 눈썹이 더 아래로 내려앉은 녀석이 울먹였다.
"엠케이도 인혁이도 독하지만 한재이 그녀석은 찐이예요 찐. 인간같지가 않다고요. 분명 그 전날 자정이 다 될 때 까지 미친듯이 연습을 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멀쩡하게 조깅을 나가더라니까요."
심은규에 이어 심각한 표정의 엠케이가 화면에 등장했다.
"저런 놈은 처음 봐요. 회사에서 몰래 키운 비밀병기가 분명하다고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엠케이 다음 차인혁이 등장했다. 조용히 앉아있던 인혁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한 마디로 미친ㄴ이죠"
삐 소리와 함께 자음처리된 인혁의 한마디를 뒤로한 채 장면은 이환의 팀 연습장면으로 넘어갔다.
- ㅋㅋㅋㅋㅋ 존나 깔끔한 한줄요약
- 기승전미친놈이냐몈ㅋㅋㅋㅋㅋ
- 쟤들 하도 쥐어짜여서 얼굴 다 수척해졌어ㅋㅋㅋㅋㅋㅋ
인혁의 팀을 동정하는 댓글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방송의 러닝타임음 중후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다시 수상한 BGM과 함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밥 먹겠다고 할 걸 그랬죠. 근데 또 이제와서 새삼 끼어들기는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식사시간엔 그냥 나가서 사먹고 와요.”
이환의 팀 멤버들의 뜬금없는 코멘트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심은규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밥 멤버에 낀 건 좋은데 좀 살벌해서..."
팔자눈썹이 축 쳐지며 소심하게 말끝을 흐린다.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화면이 바뀌며 등장한 것은 식탁을 둘러싸고 앉은 차인혁, 엠케이, 이환, 남궁찬, 한재이 그리고 심은규의 모습.
밥재이 아니 한재이의 밥 멤버를 소개한다는 자막이 나가자 인터넷 게시판이 들썩였다.
- 밥재이 ㅋㅋㅋㅋㅋ 식당아줌마 확정이냐며ㅋㅋㅋ
- 심은규 밥멤버 막차탔냐고ㅋㅋㅋㅋㅋ
- 아니 근데 쟤네 왜 저렇게 살벌해?
아닌 게 아니라 화면 속 식탁을 둘러싸고 앉은 여섯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말이 돼? 너무 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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