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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운빨
SBM 차주인 PD.
공중파 주말 예능 중 심야 시청률을 책임지는 간판 프로그램 [생존의 법칙] 메인피디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워커홀릭인 그의 취미는 유튜브 서핑이었다.
전형적인 덕업일체형 인간인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잠든 새벽, 잘 끓인 라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것 저것 유튜브를 뒤적이던 차 피디의 손이 추천목록에 뜬 영상에서 멈췄다.
[MAD] 독재자와 노예들 (한재이 입덕필수영상)
#스텝업#서바이벌오디션#케이엠연습생#걍니들끼리데뷔해라#퇴출1호#선점추천#한재이밑에만인평등#21세기노예들#평범한위꼴사주의#평범한무한재생주의
4분남짓한 영상은 케이엠의 연습생들이 커버한 곡을 BGM으로 그들의 무대와 먹방이 혼합편집되어 있었다.
"스텝업이라...."
대학교 후배인 조민선이가 하고 있는 프로였다.
몇 달 전 동문 술자리에서 조피디 녀석이 또 아이돌 서바이벌이나 맡게 생겼다고 투덜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도 2회에 이정도면 본전 뽑겠는데..."
차피디는 중얼거렸다.
그는 올블랙 의상에 새카맣게 염색한 머리를 흩날리며 고난이도 안무를 소화하는 한재이라는 신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음정으로 노래 하던 한재이의 얼굴이 화면 한 가득 클로즈업되었다.
오만한 듯 자신감에 찬 눈빛.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새카맣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휘어잡았다. 아직 데뷔도 못한 애송이 치고는 드물게 제법 자신만의 아우라를 낼 줄 아는 녀석이었다. 간주와 함께 한제이의 노예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멤버들의 소개가 지나갔다. 매드영상에 빠지지 않는 주옥같은 코멘트들이 오버랩되며 지나가는 가운데 본격적인 먹방이 시작됐다.
"....대체 저 칼질은 어디서 배운거래.”
대구탕을 하기 위해 생선 손질을 하는 한재이의 손놀림에 차피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음식들의 향연. 보통 가정집 아니, 잘한다는 백반집보다 훨씬 훌륭한 비주얼의 음식들에 그의 노예가 된 멤버들이 체면, 염치 모두 내던지고 매달리는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지나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향연과 전투적이고 격렬한 무대의 콜라보레이션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모습에 차 피디는 또 한 번 다시보기 버튼을 클릭하고 말았다.
"...이런 젠장."
퉁퉁불어 다 식어빠진 라면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0여분 후.
귀신같은 해시태그의 경고처럼 평범한 무한재생의 루프에 빠져 있던 차 피디는 퉁퉁 불어 본연의 모습을 잃어 버린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투덜거렸다. 불어터진 라면 위로 조금 전까지 눈 앞을 가득 채우던 음식들의 잔상이 오버랩되자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식욕까지 싸그리 사그러드는 기분이었다.
"....쩝."
입맛을 다신 차 피디가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려는 순간.
- Prrrrrr
"어떤 잡놈이 새벽 세시에 전화질이야?"
차 피디는 가뜩이나 마뜩찮던 기분이 곤두박질 치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새벽에 걸려 오는 전화는 좋을 게 없었다. 좀 나쁜 소식이거나 그럭저럭 나쁜 소식이거나 아주 나쁜 소식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동우냐. 무슨일이야.”
발신인이 조연출인것을 확인한 차 피디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휴대폰 너머 상대가 용건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뭐? 네버로스가 차 사고가 났다고? 많이 다쳤대? 아. 그래? 아니 근데 그럼 당장 내일 모레 출국은 어쩔거래!?"
다음 주.
오랜 시간 공들인 끝에 허가가 떨어진 아프리카의 신생 섬 카히타마하키에서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쉽게 만들어 낸 기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출연진들의 선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 중 하나인 그룹 네버로스의 리더 비제이가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에 전치 4주의 깁스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 상태로 촬영은 무리였다. 물론 억지로 참가 시킬 수야 있겠지만 네버로스의 팬덤은 돌판에서도 사납기로 유명했다.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비제이가 못 하면 누군가 대신 들어와 줄 사람을 구해야 할 터였다. 당장 다음 주가 촬영이었다.
가는 곳이 가는 곳인 만큼 출국 전 준비해야 할 것들을 따져보면 지금 당장 땜빵을 구한다고 해도 시간이 빠듯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차 피디는 마침 모니터에 띄워 놓은 매드무비와 불어 터진 라면을 번갈아 보다 씩 웃었다.
"동우야. 어 그래. 어 괜찮고."
조금 전 까지 동네 사람 다 깨도록 버럭거리던 사람과 동일인일까 싶을 정도로 차분해진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조연출이 선배님 괜찮으시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날 밝는대로 케이엠에 연락해서 대체 인원으로 한재이 보내 달라고 해. 단가 맞춰야 하면 한 명 정도 더 불러도 상관없고. 어. 뭐라고? 이름? 한재이. 한.재.이. 어 그래. 한재이 외 하나 더. 어, 잘 안 되면 연락하고. 기획 회의 내일 아침으로 다시 스케줄 잡고. 일단 작가들한테 연락 돌리고."
조연출에게 대강의 지시를 내리고 전화를 끊은 차피디가 정지화면 속 한재이와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운빨 한 번 기가 막히는구나 한재이. 어디 실제로 한 번 봐 보자. "
차 피디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울렸다.
"예에? 생법이요??"
개인 인터뷰 추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와 있던 한재이와 차인혁은 따로 좀 보자는 기획팀 장 이사의 말에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거두절미 본론으로 들어간 장 이사의 말에 옆에 앉은 매니저 석관이 설명했다.
"원래는 비제이가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른팔에 깁스를 하게 됐으니 촬영은 무리라는 결론이 났어. 대체 인력을 누구로 해야하나 하고 있는데 연출팀에서 먼저 니들 이름으로 지명이 온 거야."
석관의 말이 재이와 인혁이 서로를 마주봤다.
연출팀에서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한낱 연습생 나부랭이에 불과한 자신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컨택이 왔을까.
"피디가 우연히 우리 방송을 본 모양이더라고. 니들은 진짜 복 터진 줄 알아라."
석관이 덧붙인 말에 재이와 인혁이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 시청률을 석권하는 공중파 예능에 출연할 기회라니. 어지간한 스타들 조차 얻기 힘든 자리였다. 옆에서 잠시 뜸을 들이던 장 이사가 입을 열었다.
"본팀은 내일 모레 출국이야. 너희들은 준비가 되는 대로 따라 나설거야. 물론 스텝업 쪽 카메라도 같이 갈거고. 힘들겠지만 석관이가 말했듯 이건 아무한테나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죽기 살기로 덤벼서 살려 봐."
장 이사의 말에 재이와 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던 장 이사가 생각났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참. 이번 촬영 원래 우리쪽에선 비제이랑 상혁이랑 가기로 했던 거라 상혁이는 내일 모레 먼저 출국 할 거거든. 지금이야 심사위원과 연습생 신분이라지만 생법에선 그냥 한솥밥 먹는 같은 소속사 선후배니까 서로 서로 도와가면서 하고."
서로 분량 챙겨 주라는 말이었다.
물론 예능이라곤 지금 자기들 목줄 걸고 하는 프로그램이 경력의 전부인 초짜들이니 장 이사도 딱히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근데 그러면 저희 3차 경연 준비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재이가 물었다. 2회차 방송은 2차 경연의 중반에서 끝이 났지만 현장은 이미 3차 경연의 무대 녹화가 코 앞으로 다가 와 있었다.
“너희 둘이 같은 팀이잖아? 둘이 같이 가는데 뭐가 문제야?”
장 이사의 당연하다는 말에 인혁과 재이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3차 경연은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미션곡을 수행하는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장 이사의 말 대로 재이와 인혁 두 사람은 3차 경연에서 한 팀을 이룰 예정이었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불공평한 거 아니냐고 따지기엔 공중파 예능의 위엄이 너무 컸다.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된 두 사람의 얼굴을 회의실 구석에 따라 와 있던 카메라가 빠짐없이 훑었다.
“생법 현장에도 스텝업 카메라 들어갈 테니까 핑계 댈 생각 말고 준비 잘 해.”
장 이사의 당부에 재이와 인혁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
김봉만은 기분이 나빴다.
전 세계 오지란 오지는 구석구석 안 다녀 본 데가 없는 그였다. 그런 그도 카히타마하키라는 이름에는 가슴이 뛰었다. 카히타마하키는 발견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아 아직까지도 미지의 섬으로 불리며 학계의 주목을 받는 섬이었다.
제작진과 거의 6개월에 걸쳐 출연진을 협의한 끝에 고르고 골라 섭외한 베스트 5였다. 여배우 중 민첩하고 담이 크기로 소문 나 생법의 몇 에피소드도 함께 한 적이 있는 한미연, 떠오르는 액션스타이자 몸짱 연예인으로 요즘 핫한 이근우, 개그맨 후배이자 역시 생법 경험자인 최고탁, 네버로스의 리더이자 재간둥이인 비제이와 이번 에피소드의 화제성과 시청률을 담당할 차상혁까지.
비제이의 차 사고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 대신 들어온다는 게 아직 데뷔조차 하지 않은 기획사 연습생이라니. 그것도 둘씩이나.
‘끼워 팔기도 정도껏이어야지.
차 피디가 케이엠에 약점이라도 잡혔나?’
간만에 진짜 프로그램 본연의 취지에 걸맞는 탐험대를 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그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듣보잡 아이돌들 - 그것도 예비 아이돌 -의 합류 소식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옆에서 오늘 머물 짐을 풀던 후배 최고탁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형, 살살해요 살살.”
항상 사람좋은 인상의 김봉만이 굳은 얼굴을 풀 줄 모른 채 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있자 눈치백단인 그가 말했다.
"그래도 대신 온다는 둘 중에 하나는 요리 꽤나 하는 모양이던데. 어떻게 쓸모 있을 수도 있잖아요?"
"군대도 안 다녀온 고딩이 요리를 해 봤자지. 체력이나 좋아서 쳐지지나 않으면 좋겠다만."
한숨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자 최고탁이 그도 일리 있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차인혁입니다.”
“한재이라고 합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며 힘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 잘 왔어. 반갑다. 너희들이 비제이 대신 온다던 애들이구나? 난 최고탁. 나 알지? 초면에 반말해서 미안? 근데 어차피 곧 있으면 말 놓을거니까 그냥 처음부터 놓을게? 알았지? 그래 좋아 좋아."
호들갑을 떨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최고탁 너머로 김봉만이 그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둘 다 18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길게 뻗은 팔 다리가 확실히 일반인의 피지컬은 아니었다. 땜빵이라고는 해도 데뷔도 하기 전에 공중파 예능에 출연할 수 있을 정도면 케이엠에서도 엄청나게 푸쉬하고 있는 녀석들임에 분명했다.
'저 녀석이 차상혁 동생이겠군. 그렇다면 그 옆이 그 요리 좀 한다는 녀석일테고. 쯧. 여기서 뭐 음방 찍을 것도 아니고. 차상혁이 동생이야 제 형이랑 엮으면 된다지만 저 허여멀건한 녀석은 대체 어디다 쓰라고.'
두 사람을 위아래로 빤히 쳐다볼 뿐 말이 없는 김봉만의 옆에서 최고탁이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허흠 흠. 인사는 어차피 촬영 시작 하면 다시 다 할테니 어서 가서 좀 쉬어 둬. 이동하느라 힘들었을텐데. 내일 새벽부터 촬영하니까 침대에서 잘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자 두는 게 좋을거야. 경험자로서의 충고니까 새겨들어. 그래그래. 어서 가서 좀 자.”
최고탁에게 떠밀리듯 배정받은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쎄한데?”
차인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 좋게 볼 이유가 1도 없잖아.”
한재이가 대답했다.
- 가면 분위기 안 좋을 거다. 피디님이 무슨 생각으로 너희들을 지명하셨는진 몰라도 남들이 보기엔 기획사빨로 굴러들어 온 애송이들로 밖에 안 보일테니까.
차인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출국 전 문병차 들린 병실에서 한가롭게 침대에 기대 앉아 빨대 꽂은 주스팩을 쪽쪽거리며 비제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봐야 하루이틀 늦은 것 뿐인데 뒤늦게 합류한 떨거지들 취급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현장 분위기는 싸늘했다.
너희는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냐며 부러움과 질투섞인 얼굴로 배웅하던 다른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말 처럼 무작정 좋아하기엔 욕먹거나 묻히거나 아무튼 안 좋은 쪽으로 굴러갈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뭐 촬영 들어가 보면 알겠지.”
평온한 목소리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인간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태평하지?’
재이가 인간의 호의만큼이나 적의에도 이미 충분히 익숙하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인혁은 쇠심줄을 삶아 먹은 것 같은 그 신경에 새삼 감탄했다. 결국 금새 잠이 든 재이와 달리 인혁은 그 뒤로도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동 틀 무렵 출연진을 태운 보트가 카히타마하키로 이동했다. 이 쪽 동네로 온 뒤 복잡한 서울 시내만 돌아다니던 재이는 눈 앞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수평선에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여유롭네. 누가 보면 휴가라도 온 줄 알겠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 선 목소리에 재이는 뒤를 돌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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