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2화 (12/224)

#   12 - 3644849

#

시골 출신 이라서

재이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가시돋힌 말투에 뒤를 돌아보았다. 김봉만이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엔 바다 볼 기회도 좀 있었는데. 요샌 먹고 살기 바빠서요.”

“보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줘야 할 아이돌 치곤 너무 팍팍한데?”

“아직 데뷔를 못해서 그런지 감성이 그냥 말단직원 1이거든요.”

제길. 웃으면 안 되는 데 웃을 뻔 했다.

김봉만이 표정을 굳히곤 고개를 돌렸다.

‘되게 심심하신가보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가 싶더니 금방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김봉만을 쳐다보던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지금 기분이 좋았다.

아주 많이.

리온으로 살 때 누비던 고향의 바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동 트기 시작한 시각임에도 이미 이글거리기 시작한 태양의 열기 또한 이젠 그저 추억속에 그리던 고향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카히타마하키는 21세기 최고의 발견이라 일컬어지는 섬이었다. 한반도의 두 배에 달하는 면적의 섬이 태평양 한 가운데에 돌연 떠오른 것에 대해선 화산활동에 의한 극적인 지각변동 탓이라는 설이 우세했다.

섬의 입구에 차려진 유엔의 베이스캠프는 각국에서 온 취재진과 탐험대, 연구진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신원확인과 미디어패스를 발급받은 일행은 그나마 생태학적으로 확인이 끝나 안전하다는 평의 C구역으로 이동했다.

"와 엄청난데요.”

울창한 적도의 밀림을 눈 앞에 두고 최고탁이 중얼거렸다. 여기서부턴 최소한의 스탭들과 출연진들만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김봉만이 앞장서며 말했다.

"일단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움직이자. 거리상으론 이 밀림을 일직선으로 뚫고가면 평지가 나오니까 더 더워지기 전에 움직이는게 좋겠어.”

그의 말에 대원과 스탭등이 각자의 장비를 짊어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대열의 후미에서 걷고 있던 배우 이근우의 목소리였다.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이근우의 어깨 위로 성인 팔뚝만한 굵기의 붉은 뱀이 긴 몸뚱이를 반쯤 걸친 채 얼굴 가까이에서 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선두에서 길안내를 하고 있던 현지 가이드가 처음 보는 종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옆에 있던 차 피디가 애꿎은 통역에게 언성을 높이며 어떻게 좀 해보라고 가이드를 재촉하려는 순간

키에ㅋ!!!!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그대로 붉은 뱀의 목을 콰직 움켜쥐었다. 어찌나 빠른 손놀림이었는지 한 순간에 급소를 제압당한 뱀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저녀석 덩치만 컸지 독도 없어요."

모두가 벙쪄 있는 사이 축 늘어진 뱀을 울창한 숲 속으로 휙 던지며 재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뻐끔거리며 그 얼굴을 바라보던 차 피디가 금새 정신을 차리곤 재이의 옆에 선 VJ에게 지금 것 찍었냐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신호로 바로 앞에 서 있던 최고탁이 얼굴을 수습하며 재이에게 물었다.

"와 그냥 한방에 보내버렸네? 너 사실 땅꾼 뭐 그런거 아니야?”

"땅꾼 출신 아이돌도 좀 신선하긴 한데요?"

하하 웃으며 넉살좋게 대꾸하던 재이가 말을 이었다.

"제가 시골 출신이거든요. 어렸을 때 뒷산에서 놀다가 저런 놈들 보이면 가끔 잡으면서 놀고 그랬어요."

'개중 좀 덩치 큰 놈은 입에서 불도 뿜고 사람을 다른 세계로 날려버리는 주문도 쓰고 뭐 그랬죠.'

피식피식 웃으며 뒷 말을 삼킨 재이 옆에서 대체 어떤 깡촌에서 왔길래.... 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최고탁이 여전히 굳은 표정의 이근우에게 말을 건넸다.

"많이 놀랐지? 사실 놀라는 게 당연하지. 쟤가 이상한 거라니까."

'잡았으니 망정이지 실수라도 했으면 내가 대신 물렸을 거 아니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누굴 발판으로 삼으려고.'

최고탁이 건네는 위로에 건성으로 끄덕이며 이근우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울창한 밀림을 종단하자 그 끝은 의외로 지평선이 펼쳐진 초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빛 초원과 탁 트인 맑은 하늘이 빚어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카히타마하키 평원이라 불리는 C구역의 중앙입니다. 여러분은 이 곳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3일간 생존해야 합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동쪽 끝에는 호수가, 뒤에는 여러분이 지금 지나 온 밀림이, 그리고 눈 앞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섬의 입구에서 주의를 받으셨듯 이곳은 아직 탐사가 끝나지 않은 미지의 섬. 보고되지 않은 동물들과 마주칠 위험이 도시리고 있음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무사귀환을 바랍니다."

멘트를 읽어내려가는 차 피디의 목소리가 사뭇 심각했다. 덩달아 약간 심각해진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듯 김봉만이 입을 열었다.

"어쨌건 3일만 버티면 된다는거네. 호수에 숲에 초원까지. 먹을 건 걱정 안해도 되겠네.”

"족장님 든든한데?”

"제가 또 죽창질은 타고났거든요. 뭐가 잡힐 진 모르지만 아무것도 못 잡진 않을거예요 하핫!”

한미연의 말에 최고탁이 대신 나섰다. 김봉만의 옆에서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근우가 말했다.

"어.. 근데 여기서 호수 되게 멀어보이는데요?"

"뭐야 이 표시대로면 여기서 .... 5km는 떨어져 있단 얘기잖아?"

호수가 있으니 식수 걱정은 없겠다고 안심 하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제작진이 무엇인가를 출연진들에게 건넸다.

그것은 역사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가죽주머니.

그리고 가죽끈이었다.

얼빠진 표정의 출연진들에게 차 피디가 말했다.

"이 주변엔 야생마들이 서식한답니다. 섬의 환경에 맞는 객체들을 이주시키는 생태학 연구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애들이라는데 가이드 말로는 온순해서 사람 말을 잘 듣는다네요.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물주머니와 야생마를 포획할 때 쓰는 로프를 공수해 왔으니...."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김봉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야생마를 잡아 타고 5키로 떨어진 호수에서 물을 길어다 쓰라 이 말인거야?"

“그게 말이야 방구야. 야생마가 무슨 손 들면 멈춰 서는 택시도 아니고.”

어이없다는 출연진들의 얼굴에 차피디가 평온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니면 오신 길 그대로 돌아가셔서 게이트의 유엔본부에 위치한 매점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다만 그 경우엔 밀림 입구까지 타고 오셨던 사륜구동차량은 제공이 안되니 그 점 주의하시고요."

"이런 ㅆ.."

최고탁이 리얼하게 욕을 삼키며 인상을 팍 구겼다. 상황이 살벌한 것을 눈치챈 재이와 인혁은 모두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근우의 시선이 그런 둘에게 가 멎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시골 출신이라며. 뱀도 맨손으로 잡는데 말이라고 맨손으로 못 타겠어? 안 그래?

“우리 막내들 솜씨 한 번 보는건 어때요?”

이근우가 건치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원래 대본대로 가시죠 피디님.”

잠시 중단된 촬영을 틈 타 차상혁의 매니저 맹주찬이 차 피디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대본대로라면 야생마 길들이기라는 이 터무니 없는 요구에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출연진이 결국 제작진의 몇 가지 추가조건을 수용하는 대신 차량을 지원받는 흐름일 터 였다.

그런데 이근우의 뜬금없는 제안에 차 피디가 촬영을 잠시 중단하고 제작진 회의를 소집했다.

현지의 타이트한 인원 제한 때문에 졸지에 차상혁에 더해 연습생 둘의 관리까지 떠맡게 된 맹주찬은 경력 15년의 베태랑이었다.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촉이 말했다.

지금은 피디에게 개겨야 할 타이밍이라고.

그림도 좋고 예능도 좋지만 맹주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맡은 아이들의 안전이었다. 오프닝 그림 하나 따 보겠다고 저 야생마들 사이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을 밀어넣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내가 이 짬에 저 핏덩이들 뒤치닥꺼리까지 해야 하다니.’

당초 계획 대로라면 일선 업무는 함께 왔을 비제이의 매니저에게 맡기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전속 매니저도 붙지 않은 혹 두 개를 달고 이 이역만리 오지에서 저 혼자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대표님이 눈여겨 보신다니 대충 할 수도 없고 참.’

출국 전, 핏덩이들 직접 챙기라고 신신당부하던 문대표의 오른팔 장 이사의 말을 떠올린 맹주찬은 내심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맹 팀장님 말씀은 일단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림 좋게 뽑히면 그 쪽 애들한텐 오히려 좋은 것 아닙니까?”

차 피디가 맹주찬의 항의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말을 보태고 나섰다.

이근우의 매니저였다.

'시작부터 한 번 밟고 가겠다는 거구만. 양아치새끼 같으니라고.'

맹주찬은 얼굴을 콱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오프닝 그림 하나 뽑자고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애들한테 야생마 등 위에 올라 타 보라고 하라는 겁니까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그렇게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으면 이 배우보고 타라고 하시지, 왜요.”

“맹 팀장님. 저는 선의에서 제안 드린 건데 말씀이 좀 심하신 거 아닙니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맹주찬이 피디 들이받는 꼴을 내심 흥미롭게 구경중이던 이근우가 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 일단 알겠습니다. 맹 팀장님 진정하시고. 근우씨도 그렇게 받아들일 일 아니니 그만 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차 피디가 중재를 하고 나섰다.

그 때.

“어 어엇 위험해!!”

“꺄아악!! 누가 좀 말려 봐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집중됐다.

****

일행이 있는 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야생마 몇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 제작진들 사이에서 큰 소리가 간간히 터져 나오는 것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있던 재이가 인혁에게 말했다.

“차인혁 너 달리기 잘 하냐?”

뜬금없는 질문에 인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넌 지금 이 상황에 그게 궁금 하냐?”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궁금해야 하는게 그거 말고 또 뭐 있는데?”

아, 설마 달리기 자신 없었냐. 쏘리.

근데 그러면 그 기럭지는 대체 어디에 쓰는 거냐고 묻는듯 머리부터 발끝가지 저를 위아래로 슥 훌어보는 한재이의 눈길에 차인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나 잘하거든! 달리기!!”

“그래? 좋아, 그럼 좀 뛰고 오자.”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와락 잡아 끄는 손길에 인혁은 그대로 재이가 이끄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 그가 자신을 어디로 끌고가고 있는 것인지 깨닫곤 소리쳤다.

“야이 미친놈아아아아!!!!”

인혁의 목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졌다.

맞은편에서 그 때까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야생마 무리가 일제히 고개를 번쩍 치켜올리고 이 쪽을 쳐다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멍청아. 다 달아나기 전에 얼른 뛰어!! 더 빨리!!"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팔을 잡아 끄는 손길에 힘이 실렸다.

인혁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말들이 하나 둘 씩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안되겠다. 넌 여기서 기다려."

좀 갔다올게.

우악스럽게 잡아 끌던 힘이 툭 끊기더니 한재이가 앞으로 훅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 새끼. 대체 어쩌려고?!’

차인혁은 자신을 제치고 뛰기 시작한 말의 무리 사이로 섞여든 한재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룹에서 이탈한 저희들을 발견한 제작진들이 등 뒤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 가자고 재이의 이름을 부르려던 인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한재이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