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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심의 반란
“나보고 보컬을 하라고?”
“어. 할 수 있지?”
새카만 재이의 눈동자가 인혁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무심한 눈. 대체 속셈이 뭔지 모르겠네.’
인혁의 고민을 읽었는지 재이가 짧게 한숨을 내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포지션 딱히 랩으로 고정하고 있는 거 아니잖아. 이번 기회에 보컬로도 눈도장 찍어 놓는게 너한테도 이득이지 싶은데?”
내가 이런 것까지 챙겨 줘야 하느냐는 투로 내뱉는 재이의 말에 인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야. 형 놈하고 비교하겠다는 말인 줄 알았더니 나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었어?’
그래도 한솥밥 먹는 - 정확히는 밥 해주는 - 사이라고 챙겨 주는건가 싶어 왠지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려 했다. 방정맞게 나대려는 안면근육들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는데 또다시 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못하면 못하는 대로 다들 상혁이형의 열화판이 그 정도 했으면 됐다 하지 않겠어?”
빠직
인혁의 손에 들려있던 생수병이 와득 구겨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담당 VJ가 등을 곧게 세우며 클로즈 업 했다. 인혁의 잘생긴 이마에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 있었다.
‘와 분위기 반전 쩌네.’
VJ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렌즈 가득 인혁의 얼굴을 담았다. 조금 전까지 유들유들 웃고 있던 눈동자가 당장에라도 북풍한설이 몰아칠 듯 서늘하게 가라앉은 채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내 말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상혁이 형보다 잘하면 되겠네.”
그런 인혁의 눈빛 따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어조로 재이가 말했다.
“한 재이. 네 장난 받아주는 것도 정도껏...”
“차인혁. 너야말로 그 비대한 자의식 자랑 좀 작작 해라. 나중에 이불 차면서 후회하지 말고. 잘 나가는 형을 가진 심정이 어떤 건지 이해 못 하는건 아닌데 다른 사람이 그걸 딱하게 여겨 주길 바라는 거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꺼내지 말고 좀 넣어 두라고.”
추하니까.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인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재이의 독설이 짜증 나는 건 대부분의 경우 그게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사람이 가장 꺼리는 곳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그의 화법은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매서웠다. 더 분한 건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랑 있다간 분명 제 명에 못 살 거야."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지. 고마워해라."
"나한테 메보 양보해서 니가 얻는 건 뭔데?"
"밀리지 않는 존재감."
"미친."
"근거있는 자신감이라고도 하지."
"비대한 자의식 여기 한 분 더 계시네."
"아, 아까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럼 바꿔줄게. 진부한 열등감?"
"때려도 될까?"
"카메라 돌아가는 거 안 보이냐? 농담이 구식이네.”
"후. 말을 말자."
괜히 엄한 모닥불만 이리저리 휘저으며 인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 해 볼까 싶은 마음과 굳이 할 필요 있냐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거렸다. 국민적 지명도를 지닌 슈퍼스타의 동생으로서의 인생은 날 때부터 고달팠다. 무엇을 하건 형과 비교당했다. 하필이면 하고 싶은 것까지 닮을 게 뭐냐고. 피해의식이 안 생길 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의외네.’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차인혁이 착각하는 것처럼 저 녀석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내놓은 제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토록 애증 하는 형 놈을 공식적으로 조질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데 덥썩 물지 않고 망설이는 것은 의외의 반응이긴 했다.
‘쯧쯧. 아직 멀었네.’
차상혁 본인에게 대놓고 존재감을 어필 할 수 있는 기회를 앞에 두고 망설이다니.
‘그냥 내가 메보 한다고 할까.’
마음이 술렁였다. 최애에게 들이댈 수 있다는 생각에 잠잠하던 재재님이 슬쩍 고개를 쳐드는 것이 느껴졌다.
차인혁 이 재재님만도 못한 놈.
‘안 돼. 이번엔 차인혁이 메보로 가야 승산이 있어.’
재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1, 2차 경연이 심사위원단의 자체 심사로 그 자리에서 탈락자가 결정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심사위원단의 개인 평점과 화제도 조사 결과를 점수로 환산해 누적 스코어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결국 능력이 어느 정도 받쳐 준다는 전제하에 중요한 건.
‘어그로 승부라 이거지.’
그리고 이 한재이, 어그로라면 자신 있었다. 물론 이번 경연의 어그로 담당은 자신이 아니라 차인혁이었지만.
“생각 다 끝났으면 가볍게 맞춰 볼래? 시간도 없는데.”
재이의 말에 차인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설마 너 쫄았...으읍”
“너 그 입은 앞으로 노래 부를 때만 써라 응?”
재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차인혁이 투덜거렸다.
***
3일 후
장시간의 비행 끝에 돌아온 서울의 날씨는 이제 완연한 겨울이었다.
워커홀릭으로 소문난 차 피디는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바쁘다는 핑계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해산했다. 아 물론 진짜 풀려난 건 출연진들뿐 제작진들은 차 피디의 재촉을 들어가며 쉴 틈도 없이 방송국으로 향했지만. 마음은 이미 편집실에 가 있는 듯 자신들의 인사에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차 피디가 대뜸 말했다.
"너희들 본방 꼭 봐라. 알았지?"
“물론이죠 피디님. 본방 완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석대로의 대답에 옆에 선 맹 팀장이 잘 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보자고. 특히 한 재이.”
아뇨 안 봐도 되는데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곤 대신 안녕히 가시라고 우렁차게 인사했다. 피식 웃은 차 피디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차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촬영 재밌었어.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고.”
“데뷔시켜 주시면 찾아 뵙겠습니다.”
“거기까진 각자도생 하시고.”
“와 단호박.”
차상혁이 웃자 옆에 서 있던 차인혁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 최애님 웃는 걸 이렇게 코앞에서 보는 게 심장에 안 좋긴 하지. 이해한다.
“어이 거기 케이엠 패밀리!”
스태프들과 함께 이동하던 김봉만이 이쪽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이거 제대로 터지면 연말에 부를 테니 그때 보자고.”
연말 시상식 얘기였다. 최근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니 확실히 이번에 제대로 화제 몰이만 된다면 연말에 한 자리 정도 노려볼 만도 했다.
“안 부르시면 찾아가겠습니다.”
“상혁씨는 알아서 오시고. 우리 막내들은 내가 챙겨야지.”
“와 대놓고 차별.”
“꼬꼬마들하고 같은 취급을 바라다니. 양심이 있어야지 사람이.”
180cm이 넘는 꼬꼬마들을 올려다보며 봉만이 웃었다.
“나중에 데뷔하면 팬 미팅 할 때 불러라. 지인 할증 해 줄게.”
“어휴 형님 기대도 말라는 말씀을 그렇게 정성껏 하시고.”
“하하하. 본방 보면 연락해.”
봉만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첫 만남 때 인사도 안 받아주려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건너편에 마중 나와 있던 김석관이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한 듯 웃어 보였다.
“촬영 중 이라고요?”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
다른 아이들은 뭐 하고 있냐는 질문에 돌아온 뜻밖의 대답에 재이와 인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너희들한테 자극받은 건지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이환이랑 은규 녀석이 엉클박 프로그램에 참가 신청을 넣고 싶다더라고. 스텝 업 쪽 하고도 상의했는데 나쁠 것 없겠다는 결론이라 허락했더니 그쪽에서도 마침 한 자리 났다고 바로 들어오라고 했다더라고.”
타이밍 좋았지.
핸들을 돌리며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는 김석관의 목소리가 밝았다. 생법에 이어 엉클박까지. 의외의 변수들이 시기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건 분명 흥할 조짐이었다.
“근데 걔네가 요리를 할 줄은 안대요?”
“모르니까 된 거 아니고?”
인혁의 미심쩍은 말투에 재이가 대답했다.
[엉클박: 요리를 도와줘요!]는 요식업계의 대부라 불리는 박종운 대표가 최근에 새로 시작한 요리 프로그램이었다. 요리를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참가 신청을 받아 스튜디오와 온라인으로 연결해 박종운 대표를 따라 요리를 만들어 보는 내용으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레시피와 요리 초보자들의 엉망진창 요리 실력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는 평이었다.
“첫 촬영이라 자기들끼리 하고 있을 거야, 아마. 나중에 반응 좋으면 방송국에서 촬영팀도 보내준다는데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일이고.”
차에서 내리며 김석관이 이야기했다.
‘하긴. 한 번에 참가하는 팀만 30팀이라는데 그 사이에서 반응을 끌어낸다는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재이는 혼자 생각하며 석관, 인혁과 함께 숙소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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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악!!!!”
- 환심이네! 무슨 일이야! 아니, 거기서 후라이팬을 그렇게 돌리면 어떡해!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너네 실력으론 어림없다고!! 그냥 얌전히 뒤집기나 하세요, 좀!
“아 그게 맨날 이렇게 하길래 될 줄..”
- 아~ 어머니가 하시는 거를 봤구나? 근데 어머니랑 요리 실력이 같겠어요? 본인 나이만큼은 경력 차이가 날 텐데? 어디서 벌써 어머니 흉내를 내려고 해?
- ㅋㅋ 아 지금 엉클박 열받으셨어, 열받으셨어. 환심이네 분들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짓지 마시고 기본부터 하세요. 엉클박한테 차근차근 배우다 보면 언젠간 어머님을 따라 잡을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일랜드식 조리대 앞에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이환과 심은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뒤쪽에서 남궁찬과 함께 배경 역할을 하고 있던 엠케이가 이 쪽을 보더니 소리쳤다.
“와 엄마 오셨다!!!”
“아핰핰핰ㅋㅋㅋ 엄마아아!!!”
- 뭐야 어머니 오셨어? 잠깐 이리 좀 와 보시라고 해! 대체 아들한테 뭘 보여주셨길래 겉멋만 저렇게 잔뜩 들었어?!
이미 숨넘어가게 웃고 있는 두 녀석을 눈으로 흘기며 버티고 있으려니 김석관이 어서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하는 수 없이 재이는 쭈뼛쭈뼛 카메라 시야각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 ........
와하하하하하하하
숙소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박자 늦게 스튜디오에서 실시간 댓글을 확인 중이던 댓글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지금 들어오신 게 환심이들 엄마 맞네요 ㅋㅋ 연습생들 밥 담당이시라고~ 한재이씨~ 맞죠?
“아... 예...”
- 근데 한재이씨 얘네가 참가신청서에 뭐라고 쓴지 아세요?
댓글요정의 목소리에 재이가 이환과 심은규를 돌아보았다.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인지 두 녀석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 주방 독립 만세라고. 엉클박에게 요리를 배워서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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