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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법칙 - 온에어
싱그러운 초록이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저 멀리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지평선의 한복판을 힘껏 내달리는 야생마 한 마리.
팽팽하게 긴장한 근육이 교차하며 간격을 벌려 성큼 달아나던 시원한 질주가 뒷편에서 뻗어온 올가미에 붙잡혀 급작스레 끝이 난다.
깜짝 놀란 말의 앞발이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사이 로프를 쥔 흑발의 인영이 거침없이 성난 말의 갈기를 휘어잡았다. 자신이 타고 있던 말에서 조금 전 포획한 야생마에게로 순식간에 옮겨 탄 그가 말의 목덜미를 두어번 두드리며 귓가에 뭐라고 소근 거리자 당장에라도 제 위에 올라 탄 인간을 떨어뜨리려 반항하던 말이 거짓말처럼 앞발을 땅에 내려놓고는 분한 듯 세찬 콧김만 뿜어댔다.
잘했다는 듯 안심하라는 듯 말의 귓가에 또다시 무어라 속삭이는 청년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청년이 타고 온 말은 온순하게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다시 초원의 풀을 뜯었다. 두 마리 모두 안장의 흔적조차 없는 매끈한 등을 가진 야생마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시야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푸른 바다에 우뚝 솟아 있는 광활한 섬 카히타마하키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 위로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올라간다.
[생존의 법칙 특별편 - 신비의 섬 카히타마하키]
- ㅎㄷㄷ 지금 저거 뭐임? 영화?
- 저 남자 누구? 이근우?
- ㄴㄴ 이근우 갈색머리쟝. 봉만이형 아님?
- 님 시력 다이죠부? 저거 봉만이형 2인분 합쳐야 나올 기럭지ㅇㅇ
- 차상혁 아님? 차상혁 나온다고 타이틀 다시찍었나본데? 케이엠이 돈 쳐발랐나보네
- ㄴㄴ 차상혁 머리 저거 아님 저거 누구인지 아시는 분????
고작 15초 남짓의 타이틀 영상으로 게시판은 이미 난리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예능 최초로 미지의 섬에 들어갔다는 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던 차에 야생마를 능숙하게 길들이는 이름 모를 청년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리쬐는 적도의 햇살 아래 눈가를 살짝 덮는 길이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야생마 두 마리와 함께 초원을 내달리는 청년의 모습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매력적이고 또한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었다.
[봉만 족장 절체절명의 위기]
검은 배경에 뜬 심플한 자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봉만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생법의 단골 멤버이자 자칭타칭 봉만 족장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최고탁의 심각한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카메라가 다시 봉만의 축 쳐진 어깨 어딘가에 고정된다.
“야, 저거 어디서 굴러 먹다가 온 놈이야? 와 나 진짜 이 바닥 경력 몇십 년 만에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야 탁아 이거 어쩌면 좋냐.”
“형님이 답이 없는 걸 저 라고 답이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냥..”
“야 임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떻게 저런... “
얼굴 가득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못 한 채 심각한 얼굴로 대답하는 최고탁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버럭 언성을 높인 봉만이 옆에 서 있던 그림자를 향해 몸을 틀었다.
“야 짐꾼. 니가 말해봐 쟤 저거.. 혹시 보기만 좋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봉만의 목소리에 짐꾼이라 불린 그림자가 움찔했다.
“..... 안타깝게도 저건 찐이에요. 형님. 포기하시죠.”
“이런 엑스맨같은 놈..”
이승의 백팔번뇌를 잊은 자 만이 낼 수 있는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김봉만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카메라 앵글이 그제서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비췄다.
짤달막한 두 중년과 달리 보는 이의 눈이 시원해질 정도로 훤칠하게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그에 걸맞도록 남자답게 선 굵은 이목구비를 지닌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달라고 하면 주긴 줄 걸요. ...아마도.”
허름한 멘트와는 달리 빈틈없이 잘 생긴 얼굴이 화면 한 가득 클로즈업 되면서 그 아래로 자막이 박혔다.
차인혁 (18세)
직업: 아이돌 연습생 (노예생활 n주차)
생법 내 포지션: 짐꾼 (혹은 짐짝)
- 차인혁이면 차상혁 동생 아님?
- 와 끼워팔기 오지닼ㅋ 아직 데뷔도 안한 동생 밀어주기냐.
- 잠깐근데 어째서 노옠ㅋㅋㅋㅋ
- 얔ㅋㅋ설마 저겈ㅋㅋㅋㅋ밥재이나오는거 아님??
- 밥재이가 뭐야? 듣보홍보 ㄴㄴ
- 생법도 한 물 갔네. 이런 대형 기획에 아이돌 끼워팔기라니 ㅉㅉ
- 님 이거 한 번 보고 와서 그런 말씀 하셈ㅋㅋㅋㅋ ⇒https://you▼◎◇.be/ChMnhs
- 앜ㅋㅋ이거 설맠ㅋㅋ
- 야잌ㅋㅋㅋ그만햌ㅋㅋㅋㅋ
카메라의 시선은 봉만의 일행이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 쪽으로 옮겨 갔다.
출연진들 뿐 아니라 촬영 스태프들까지 모여든 듯 꽤나 북적하게 붐비는 가운데 카메라는 그 중심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흑발의 청년을 포착했다.
“상혁이 형, 그거 다 발라내지 않으면 비려서 못 먹어요. 싹 다 빼 내세요.”
“근우 형 상혁이형한테 물 좀 더 갖다 주세요."
"누나, 잠깐만요. 그렇게 넣으면 다 타요. 조금 더 싸서 안쪽으로 밀어넣으세요. 네, 그렇게요. 잘 하시네요."
쉴 새 없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자꾸 시야를 덮는 머리카락이 귀찮았는지 고개를 젖혀 머리를 뒤로 넘기려는 순간, 까만 눈동자가 석양에 반짝였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담아 낸 화면 아래로 자막이 박혔다.
한재이 (18세)
직업: 아이돌 연습생 (혹은 독재자)
생법 내 포지션: 봉만의 밥줄을 위협하는 신흥 족장
- 미친ㅋㅋㅋㅋ이제 아무나 족장이냨ㅋ
- 봉만 형 안습ㅋㅋㅋㅋ
- 얼굴은 취향인데. 그래서 이번에 케이엠에서 미는 게 쟤네 둘인거임??
- 야 근데 저 검은머리 아까...
- 밥재이 생법 먹으려고 왔냐곸ㅋㅋㅋㅋ
- 재이야 내밥도 돜ㅋㅋㅋ
- 생법피디 미친ㅋㅋ캐스팅 신의한숰ㅋㅋㅋㅋ
- 재이느님ㅋㅋㅋ
- 경!!!!!!!!!!!!밥재이 공중파 진출!!!!!!!!!!!!!축
- 뭐야 갑자기 어디서 다들 튀어나옴???
- 쟤 아직 연습생이라며 갑자기 불판 화력 무엇ㄷㄷ
[족장 타이틀 매치: 김봉만 vs 한재이]
김봉만 쪽 테이블에 놓인 음식이 클로즈업되었다. 손질한 나뭇가지에 생선을 꿰어 모닥불에 직화로 구워 낸 생선구이였다. 자막과 함께 시식한 제작진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굶주림을 밑간으로 허기를 반찬삼아 먹는다 - 이것이야말로 생법 클래식! by 족장 김봉만]
"...어, 그냥 불에 구운 생선 맛?" (촬영팀 박OO)
그 뒤를 이어 한재이 쪽 테이블에 놓인 음식이 등장했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감싸 구운 생선구이였다.
[오지음식은 맛이 없다는 편견은 버려! 자연 조리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by 도전자 한재이]
"이게 가능해요? 이 허브 따로 가져 온 거 아니죠? 비린내도 없고 퍼석거리지 않고. 아 잠깐 이리 내놔요 나 아직 다 안 먹었다고요!" (연출팀 정XX)
화면은 자연스럽게 한재이의 테이블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로 옮겨갔다. 요리를 하는 사람들, 그 주변에 모여 구경중인 사람들 모두에게서 곧 먹게 될 음식을 향한 뜨거운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낯설고 척박한 오지에서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린 끝에 만나게 된 먹음직스러운 요리.
그 원초적인 유혹 앞에선 충무로 액션계의 블루칩이라 불리는 배우도, 외모, 연기, 성격 모두 여신급이라 칭송받는 배우도, 가요계도 모자라 드라마판까지 씹어먹고 있다는 평의 만능 엔터테이너도 모두 굶주린 짐승에 불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호화로운 짐승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던 그가 반대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봉만 형님, 그냥 같이 드실래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봉만을 대신해 그 옆에 서 있던 최고탁이 재빨리 외쳤다.
“우리 것도 있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봉만 형, 막내가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너무 거절하는것도 선배로서 모양이 좋지 않으니 우리가 양보하죠?”
최고탁의 말에 두 사람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인혁이 재이를 향해 외쳤다.
“우리 뭐 하면 되는데?”
그의 물음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려던 봉만과 이미 그의 팔을 잡아 끌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중이던 최고탁이 인혁과 재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재이의 얼굴이 화면에 한가득 잡혔다. 차가운 지배자의 눈동자가 짙게 깔리기 시작한 밤빛에 반짝였다.
***
“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김봉만 형님을 짐꾼으로 부릴 생각을 할 수가 있냐. 하여간에 담도 커요, 한재이.”
언제나 그렇듯 재이가 만든 야참을 먹으며 TV 앞에 모여 본방을 보고 있던 아이들 중 남궁찬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내 사전에 무임승차란 없거든."
원래 인력 운용이란 적재적소에 해야 하는 법이야. 사심이 들어가면 안 되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목에 걸고 있던 휴대용 안마기를 이리저리 뒤적이는 재이의 반응에 남궁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들 상대로 하던 걸 저기서도 그대로 해 버리면 어떡해. 그러다가 미운털이라도 박히면 어쩌려고."
심은규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저 인간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쓰겠냐. 대표님한테도 먹고 싶으면 이따 설거지 ㅇㅋ? 하고 딜부터 칠 놈인데."
"먹고 싶으면 일을 해야지. 만고 불변의 진리야."
"아 그만해. 세뇌당하는 기분이야."
이환이 안고 있던 쿠션을 집어던졌다.
화면에선 생존의 법칙 특별편 카히타마하키 상 편의 엔딩롤이 올라가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엔딩 크레딧의 배경으로 정글의 영원한 족장 김봉만과 자칭 정글족의 2인자 최고탁, 그리고 뭘 해도 화보인 듯 완벽한 외모의 차인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뙤약볕 아래 등짐을 지고 걷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야생마 위에 올라 탄 한미연과 차상혁, 한재이가 느긋한 얼굴로 속도를 맞춰 걷고 있었다.
총연출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화면이 암전된 다음 순간
[그런데]
까만 배경에 뜬 불길한 글씨체의 자막과 함께 누군가의 초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근우씨 어딨어!”
조금 전 까지의 영상이 빠르게 리플레이 됐다.
캠핑에 필요한 도구를 나눠 들고 호수까지 도보로 행군중인 김봉만, 최고탁, 차인혁. 야생마를 한 마리씩 차지하고 앉아 느긋하게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고 있는 한미연, 차상혁, 한재이.
그 어디에도 이근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근우씨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뭐야, 스태프 쪽에도 없다고?"
"아까 쉬었던 지점에서 낙오 한 거 아니야?"
"설마, 그게 벌써 한 시간도 전 일인데!"
[다음 주 X요일 밤 23:00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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