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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쓸모있는
조용한 회의실.
흰 테이블 맞은편에 삼각대와 카메라를 세팅한 실내에 재이가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VJ가 한 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찍고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터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재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용히 의식을 집중하자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풀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착각에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을 쉴 새 없이 내달리고 있는 붉은 머리의 기사가 있었다. 목적지에 가까워 질 수록 전장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이 폐부를 찌르는 듯 느껴졌다. 주변의 공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크워어어어!!!”
이 쪽을 발견한 드래곤이 포효하며 브레스를 내뿜자 주변이 순식간에 붉은 화염으로 초토화 되었다. 신성력으로 미리 결계를 치고 있었음에도 방어막 너머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 질 정도였다.
“.....안되겠다. 넌 일단 나한테 좀 맞자."
무섭게 타오르며 번지는 화염의 한가운데에서 빛살같이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공격을 위해 잠시 숨을 돌린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기사의 검이 드래곤의 두꺼운 비늘을 갈랐다. 그 어떤 단단한 쇠붙이도 감히 흠집을 낼 수 없었던 위대한 레드 드래곤의 몸에 선명하고 깊은 검흔이 아로새겨졌다.
"크워어어어어어!!!!!"
- 인간! 용서하지 않겠다!
머릿 속에 직접 울리는 드래곤의 목소리에 붉은 머리의 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깟 게 어디서 용서를 하고 말고 해? 니가 아주 더 맞아야 정신 차리지 그치!"
대륙이 칭송하는 신의 기사 리온 드 세리엘.
불가침의 맹약을 맺은 뒤 몇 년 간 잠잠하던 레드 드래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최근 다시 레어에서 기어나와 설치고 다닌다는 정보에 확인 차 와 본 길이었다.
"너 분명 '인간! 그래 원하는 대로 니놈이 뒈질 때까진 레어에서 나가지 않으마. 그래봐야 이 위대한 몸에겐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터!' 라고 허세란 허세는 다 피우고 네 그 냄새나는 동굴에 쳐박히지 않았었냐!"
눈부시게 빛나는 검을 휘두르며 리온이 말했다.
태초에 신이 만물을 창생할 때, 드래곤은 그의 사랑을 받아 언령 없이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고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그런 초월적인 존재를 앞에 두고도 리온은 위축되기는 커녕 그 말투를 흉내내며 있는대로 한껏 도발하고 있었다.
평범한 다른 인간이었다면 이미 화염마법에 통구이가 되고도 남았을 테지만 리온은 달랐다.
그는 이 세계에서 신이 가장 사랑한 인간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기사였다.
솔직히 리온이 보기에 얘도 사랑하고 쟤도 사랑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영 못 미덥긴 했지만 이 능력 만큼은 진짜였다. 드래곤이 내 뿜는 브레스를 한 몸에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눈 앞의 이 드래곤은 천 년의 용생에 처음으로 인간 따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굴욕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체격 차이가 큰 탓에 리온이 작정하고 후려 갈겨 대면 드래곤은 그걸 하나하나 다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보통의 인간 대 드래곤의 공방이라면 피하지 못한다는 것 보다는 피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문제는 리온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신의 의지를 담아 두꺼운 비늘을 끊고 속살을 후벼파는 공격 앞에서는 드래곤의 무시무시한 재생력도 무용지물이었다.
- 이 몸은 허세따위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 레어는 냄새따위 나지 않아!
"뭐래 덩치만 큰 도마뱀 새끼가. 그래서 그 냄새도 안 나고 깨끗한 너네 집 놔 두고 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냐고! 내가 다음번에 또 아무데나 불 싸지르고 다니면 아주 아가리 못 벌리게 턱주가리를 날려주겠다고 했어 안 했어!!"
그 말과 함께 리온의 검이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횡으로 공간을 갈랐다.
"나오지! 말라고! 했지!! 내가!!
니네!! 집에! 얌전히!! 쳐박혀 있으라고!!
했어 안했어!! 어!?!!"
"크어어어어어!!!!!!!"
- 으아악!!! 내 얼굴!!!"
"얼굴 뭐 볼 거 있다고. 그래봐야 그냥 두꺼비 비늘이구만."
그와 동시에 리온의 검이 눈부신 빛을 뿜으며 드래곤을 향해 짓쳐들었다.
‘내가 살다살다 그 용새끼가 쓸모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재이는 피식 웃었다.
눈 앞에 놓인 도구들을 둘러본 재이가 중얼거렸다.
“자 그럼 시작 해 볼까.”
***
직장인 2년차 김은지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 벌기 시작하면 곧바로 독립하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직장을 잡고 2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생활 중이었다. 집이란 게 1, 2년 돈 벌었다고 덜컥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직장을 다녀보니 혼자 살겠다는 다짐이 무뎌진 탓도 있었다.
그나마 독립에 대한 의지가 조금 솟구치는 것은 주말마다 쳐들어오는 언니네 조카와 놀아줘야 할 때였다.
다섯 살 남자아이와 놀아준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극한의 육체노동.
아무 것도 안 하고 가열차게 쉬기만 해도 월요일 아침이 피곤할 마당에 주말 중 하루를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나면 분가에 대한 욕구가 다시 한 번 샘솟곤 했다.
그랬는데.
"안녕 친구들! 재재님이야. 오늘은 말썽꾸러기 드래곤을 혼내주는 법에 대해 알려 줄게. 잘 들어봐."
김은지는 조카가 넋놓고 보고 있는 영상을 들여다 보았다.
결 좋은 흑발의 잘생긴 청년이 마트에서 흔히 파는 인형들을 가지고 장난감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저거 한재이잖아."
"아닌데. 재재님인데?"
조카가 단박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그래 재재님. 근데 너 이거 어떻게 찾아 본 거야?"
"응? 그냥 아무거나 눌렀는데?"
"아.. 그래."
김은지는 핸드폰을 들었다. 며칠 전 드디어 분판에 성공한 스텝 업 게시판은 이미 난리였다.
- 재재님 영상 본 사람? 장난감 리뷰라니 넘ㅋㅋㅋ 상상도 못했음
- 인형들끼리 치고박고 하는데 난 그게 뭐라고 손에 땀흘려가면서 봄 ㅋㅋㅋ
- 그와중에 진지하게 설명하는 재재님 졸귀...
- ㅈ같은 직장상사 혼내주는 법도 좀 알려줬으면.
"아 뭐야 예고도 없이 올라온 거야? TVM 거저먹네 아주.”
"이모 조용히 해. 재재님 목소리 안 들려."
"아...그래."
김은지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곤 TVM예능국 채널을 확인했다. 한재이 이외의 다른 멤버들 영상도 모두 다 올라와 있었다.
"... 크오와아앙!!!!"
김은지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조카의 아이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미간을 모으고 한껏 무서운 표정을 한 한재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포효하고 있었다. 솔직히 하나도 안 무섭고 귀엽기만 했...
“아.. 나 쎄게 치인 것 같아.”
김은지가 중얼거리는 옆에서 조카가 조용히 하라며 옆구리를 쳤다.
"크오와아아 카아앙 키에에엥 뀨와앙!"
"뭐라고! 내 집은 냄새 안 난다고!? 그럼 그냥 계속 집에 있지 왜 나왔어!!!"
한 손에 들고 있는 빨간 드래곤 인형의 버둥거림에 맞춰 크와앙 거리더니 곧바로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검을 쥔 용사님 인형을 흔들면서 대사를 친다.
"자 친구들 여기가 중요한 거예요. 여기서 이 덩치만 큰 드래곤을 무서워 하면 안 돼요. 얘가 이렇게 크왕크왕 크게 떠드는 건 사실 용사님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럴 땐 용감하게 검을 들고서"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용사님 인형을 들어올린 한재이가 드래곤 인형의 머리를 검으로 내리치면서 말했다.
"이렇게 이얍 이얍 이얍!! 그리곤 마지막 한 방 크게 야압!"
기합과 함께 용사님의 발차기가 드래곤의 턱에 꽂혔다. 드래곤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공격할 때는 쉬면 안 돼요. 드래곤이 다시 마법을 쓰기라도 하면 큰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드래곤이 기절할 때 까지"
넘어진 드래곤 위에서 용사님이 방방 뛰었다.
"열심히 밟아주면 됩니다. 괜찮아요, 드래곤은 많이 맞아도 자고 나면 다 낫거든요. 위대하죠? 그러니 이제 얜 자러 갈 거예요."
테이블 아래로 드래곤 인형을 감추던 재이가 생각 난 듯 덧붙였다.
“우리 친구들 드래곤은 때려도 되지만 사람은 때리면 안 되는 거 알지요?”
싱긋 웃으며 가볍게 윙크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곤 용사님 인형과 함께 꾸벅 인사 하며 말했다.
"이 이야기가 재밌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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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친구들 재재님이야. 오늘은...”
저도 모르게 영상에 빠져 끝까지 함께 본 김은지는 처음부터 다시 반복재생되는 영상에 조카를 쳐다보며 물었다.
“또 봐?”
“응”
“아까 봤잖아.”
“재밌잖아.”
“뭐가 재밌어?”
“드래곤 혼내주는 거. 용감해. 머싯써.”
“누가 재재님이?”
“아니 용사님.”
더 말을 붙이려던 김은지는 입을 다물었다. 조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화면에 집중해 있었다. 화면에선 여전히 재재님 아니 한재이가 진지하게 건방진 드래곤을 박살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안녕 친구들! 재재님이야. 오늘은...”
그렇게 이모와 조카는 나란히 앉아 재재님의 강의를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
“아하하 한재이 이거 진짜 물건이네.”
제작회의를 위해 방송국 회의실에 앉아 집계 현황을 살피던 조민선 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어제 아침 공개한 영상의 조회수와 좋아요의 추이 그래프가 참가자 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모니터 한 쪽에선 편집 전 개인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 장난감 리뷰는 어떻게 생각해 낸 아이디어인가요?
- 상식의 선에서 재미는 있는데 유해하지 않고 조회수와 좋아요를 최대한 많이 끌어올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제작진의 물음에 한재이의 표정이 진지했다.
- 그래서 생각 해 낸 게 장난감 리뷰였어요?
- 뭘 할까 고민이 돼서 웹서핑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애가 맨날 본거 또 본다고. 그랬더니 밑에 원래 애들은 그렇다는 얘기가 주루룩 달려있는 걸 보고 혹시? 싶었죠.
- 원래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가요?
그 물음에 한재이가 비죽 웃었다. 어딘가 짖궂으면서도 유쾌한 웃음이었다.
- 드래곤과 용사님 얘기라면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요. 재재님은 거짓말 안 합니다.
웃음과 함께 제작진이 아닌 카메라를 응시한 한재이가 윙크했다. 영상의 재재님을 연상케 하는 그 동작에 제작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좋네. 역시 이 친구가 방송을 알아.”
조피디의 말에 옆에 앉아 함께 자료를 체크하던 작가가 말했다.
“이대로 가면 무난하게 따라 잡겠는데요?”
“그건 아직 모르지. 차인혁이 이번에 어그로 제대로 끌었잖아.”
조피디의 말에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하기도 전에 출연자가 먼저 구도를 끌어다 주는것도 오랫만에 보네. 형제쪽은 슬슬 불 들어 오나 봐?
“그러게요. 소속사가 같으니 조율하기도 편하고. 장작은 자기들이 알아서 넣어 줬고. 이제 원하는 방향으로 잘 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걸 하는게 우리 일이지. 안 그래?”
“어휴 피디님 또 눈 돌아갔어.”
“정 작가 거울 안 봤구나? 당신 눈도 똑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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