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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볼 줄 아는 남자
“···이게뭐야.”
- 하하하하하
재이의 망연자실한 어조에 화면 너머 스튜디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환심이! 그거 엄마한테 설명해 봐!
엉클박의 짖궂은 목소리에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두 사람 중 이환이 용기 내서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 계란 후라이를 하는데···”
“계란 후라이로 이게 된다고?”
재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재이의 손끝에 꽂혔다. 재이가 가리킨 곳에는 계란후라이··· 가 될 뻔한 무엇인가가 가스레인지 주변에 폭발이라도 한 듯 요란하게 분사되어 있었다.
- 한 번에 뒤집기라고, 한재이씨가 가르쳐 준 거라던데?
엉클박의 말에 재이가 이환과 심은규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두 사람이 움찔했다.
“가르쳐 준 적 없는데요. 애초에 얘네 하나는 재료심부름, 하나는 설거지 담당이라 요리를 배우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닌데요.”
재이의 대답에 화면 너머의 스튜디오가 잠시 침묵했다.
- 정말이야? 환심이 너네 한재이씨한테 요리 배웠다며?
엉클박의 물음에 재이가 대신 대답했다.
“네. 없습니다. 제가 가르쳤으면 쌩초보한테 이런 개무리수··· 아니 무모한 짓은 안 시켰죠.”
두 사람을 둘러보는 재이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너 너는 그렇게 하잖아.”
보다 못한 이환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지. 나는 그렇게 해도 백퍼 성공하지만 너희는 백퍼 실패할 게 뻔 하니까.”
대답과 함께 턱짓으로 처참한 가스레인지 주변을 가리킨 재이의 제스쳐에 이환과 심은규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 괜찮아~ 알았으면 이제 하지 말고. 난 또 누가 내 요린이들한테 이상한 거 묻혔나 해서 확인 해 보려고 했지.
스튜디오 너머 사람 좋은 엉클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네가 좀 어리버리 하지만 시키는건 또 그런대로 잘 하거든요. 엉클박 선생님께서 잘 지도해 주세요.”
재이의 말에 한 쪽에 서 있던 이환과 심은규의 표정이 차례로 썩어 들어갔다.
마치 담임 선생님께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부탁하는 학부모 같은 그 말투에 화면 너머의 엉클박이 유쾌하게 웃었다.
휘리릭!! 찹찹찹
“오오오오!!!!”
“역시 오리지널 갓재이!!”
“저게 왜 저렇게 쉽게 되지?”
“그러게, 혹시 우리도 저 후라이팬으로 했어야 되는거 아니냐.”
촬영이 끝난 후, 재료가 남았다며 한 번에 뒤집기 좀 보여달라고 떼쓰는 녀석들에게 등 떠 밀려 가스레인지 앞에 선 재이의 뒤쪽으로 녀석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재이가 들고 있는 후라이팬에선 조금 전 이환과 심은규가 생방송에서 장렬하게 까였던 계란 후라이 세 개 한 번에 뒤집기 기술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역시 한재이 그냥 이거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찾는게 나을 듯.”
“아이돌 서바이벌 말고 마스터 쉐프 뭐 그런거 나갔어야 하는거 아니냐.”
“진심 이건 진로선택이 잘못됐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헛소리 하는 놈은 밥 없다.”
재이의 한 마디에 재잘대던 목소리들이 뚝 끊겼다.
“수저 다 놨어!”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인혁 저 배신자.”
“와 수저도 한재이 꺼랑 지 것만 놨어. 왜지? 계란 후라이는 세 갠데!”
“저거 생법버프 너무 타는 거 아님? 석관이형! 나도 재이랑 스케줄 좀 잡아줘요!”
아이들이 아우성대며 식탁으로 몰려들었다.
“재이야 인간적으로 한 판 더 할 거지? 우리 여섯이잖아 그치.”
엠케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재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의자에 앉은 재이가 대답했다.
“이미 앉았는데? 먹고 싶으면 환심이한테 해달라고 해. 오늘 배웠다잖아.”
엠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이와 인혁은 이미 계란 후라이를 하나씩 덜어내고 있었다.
“가위바위보 해! 가위바위보!”
“그런 게 어딨어 젓가락 먼저 댄 놈이 임자야!”
“젓가락은 무슨. 그냥 가져가면 되지!”
엠케이와 남궁찬이 달려들기도 전에 이환이 후라이팬 째 집어들며 말했다.
“야 이환 이 상도덕도 없는 새끼! 너는 니가 만들어 먹어!!”
“이것도 먹고 만들어서도 먹을거야!”
“하루에 계란 한 개가 국룰인거 몰라? 콜레스테롤 과다로 죽고싶냐고!”
“뭐래, 나 아직 뼈도 씹어먹을 나이거든.”
“그럼 그건 이리 주고 뼈나 씹어 먹던가!”
남궁찬과 엠케이가 이환과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심은규가 조용히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다른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며 재이에게 물었다.
“한 개만 할 땐 불 약하게 해야돼?”
“저 멍청한 놈들보단 니가 낫다 심은규.”
재이가 다 먹은 접시를 들고 일어서며 심은규에게 말했다.
얼결에 칭찬을 들은 심은규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서 불 어쩌라고.’하는 것을 귓등으로 흘리며 재이는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생법 하편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 다들 어디 갔죠?
생존의 법칙 타이틀롤과 함께 이근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군데군데 무성한 수풀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뿐 사람의 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초원 한 복판에 이근우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낙오한 모양인데요.
살짝 흔들리는 VJ의 목소리에 이근우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 아니 잠깐 자리 비운 것 뿐인데 그 사이에 출발 하는건 좀 아니지 않냐고요. 인원체크도 안 하고!?
- 일단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 보죠?
VJ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이근우가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그냥 가죠?
- 예에?
- 어차피 지도도 있고. 목적지도 아는데.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
[나 지도 볼 줄 아는 남좌라고!]
이근우의 얼굴 아래로 자막이 박혔다.
“불길한데···”
어느새 소파 앞 테이블 사이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엠케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저거 완전 플래그인데.”
남궁찬이 맞장구쳤다.
[한 시간 뒤]
- 허억 허억.. 아니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자막과 함께 이근우의 외침이 광활한 초원에 울려퍼졌다.
- 엇갈린 것 같은데요.
- 아니 분명 여기 이렇게잖아요 맞죠!
VJ의 말에 땀과 먼지로 너덜너덜해진 지도를 들이밀며 이근우가 따지듯 말했다.
- ···
VJ의 대답 대신 이근우가 손으로 찍은 곳과 한참 떨어진 곳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지며 자막이 떴다.
[지도를 볼 줄만 아는 남좌]
“저거 봐 저럴 줄 알았어.”
“이근우 선배님 굴욕ㅋㅋㅋ”
“근데 저거 어차피 대본이면 그냥 거기 서 있으면 주우러 오는 플로우 아님?”
“애초에 다 지어놨던 베캠을 옮긴다는 것 부터가 수상했음.”
“모르지 저것까지 대본인지.”
“근데 설마 이근우 선배님이 저 대본을 OK했을리가···”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히 소파에 기대어 앉은 재이와 다른 한쪽에 앉은 인혁에게 쏠렸다.
“궁금하면 계속 보든가.”
재이의 말에 인혁이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저것들한테 기대를 말아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들이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다른 쪽에선]
- 이근우 대체 어딨는거야!?
자막과 함께 반전한 화면에 김봉만의 초조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 야이씨 우리가 얘 하나 찾자고 이 길을 다시 돌아가야 되겠냐고.
- 그래도 사람은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요.
- 얼굴하고 입이 따로 노는 것 같아 어째.
초조한 얼굴의 김봉만이 시선을 돌리자 차상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의 김봉만과 달리 앞머리가 약간 땀에 젖었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 제가 원래 표정이 없단 소리 자주 듣습니다.
평온한 차상혁의 대꾸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단 근우 형 먼저 찾죠. 여기에도 없는 거 보니 아마 엇갈린 것 같은데요.
한재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수풀이 흔들리는 초원을 둘러보는 눈빛이 자뭇 날카로웠다.
- 아니 낙오를 했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나 있지, 겁도 없이 왜 돌아다녀, 돌아다니길!
말고삐를 고쳐 쥐며 김봉만이 소리쳤다.
세 사람은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이근우를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가 다 같이 휴식했던 지점으로 돌아왔음에도 이근우의 행방을 찾을 수 없자 느긋하던 김봉만의 표정에 초조함이 깔리기 시작했다.
- 이거 차피디한테 일단 무전 쳐야 하는 거 아니야?
- 근우 형 카메라 감독님하고 같이 있잖아요?
- 그러게, 그 양반 카메라에 GPS라도 좀 달아놓지. 이러다가 해라도 지면 진짜 사고 제대로 나겠다고.
초조한 김봉만의 얼굴 너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양이 화면에 잡혔다.
- 잠깐만요. 저기 저 쪽으로 조금만 가 보죠?
어느샌가 말에서 내려 수풀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니던 재이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 막내야, 여기서 우리까지 낙오하면 일 커 지는거 알지?
김봉만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데 차상혁이 물었다.
- 뭐 찾은 거라도 있어?
그 물음에 재이가 씩 웃으며 수풀 한 쪽을 가리켰다.
- 여기 발자국이요. 저 쪽으로 나 있어요. 분명 저 쪽으로 갔어요.
“어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이환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발자국 1도 안 보임]
재이가 가리킨 수풀을 클로즈업 한 화면 밑에 이환의 말을 대변하는 듯한 자막이 깔렸다.
그리고 곧이어 확대, 재확대, 삼확대한 화면에 초원의 억센 수풀 위로 발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빨간 실선이 희미한 발자국 위로 덧그려졌다.
[자칭 시골출신 신흥 족장의 X친 능력]
“와 저게 보였다고? 거짓말!”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엠케이가 몸을 뒤로 젖히며 외쳤다.
“각본이 심하네. 저 정도 짜고치면 시청자 항의 들어올 듯.”
“한재이 조심해라 이환이 게시판에 항의글 쓴댄다.”
“역시 이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자.”
“아 내가 언제. 이것들은 내가 말만 하면 뭐래 진짜.”
한편 화면에선 이근우의 필사적인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만만하던 얼굴과는 180도 달리 초조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 헉헉. 감독님 진짜 연출팀하고 연락 안 돼요?
- 그게 아까 그 휴식포인트에서 재합류할 예정이었던지라···
- 아니 그럼 아까 좀 말리지!!!
[니가 지도 볼 줄 안다며···]
VJ의 대답 대신 자막이 흘렀다. 태양은 이미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 아우우우—
-···저 ···저 소리 지금 저 소리!!
- ···이 부근에 육식동물 돌아다닌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요.
- 아이씨 대체 제대로 아는게 뭔데요! 얼른 가요! 가요!
- 여기서 좀 더 기다리는 편이···
- 아뇨 가야죠. 일단 저 소리 안 들리는 데 까지는 가야 될 거 아니예요!!
- 아우우우우——
- 아이씨.. 더 가까이 들리는 것 같은데. 감독님 뭐 없어요?
- 뭐가 있어야 되는데요?
- 에이씨. 그럼 내 뒤로 와요 얼른.
- 왜요 어쩌시려고?
이근우가 품 속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생법에선 필수 아이템이 된 맥가이버 나이프였다.
- 이 이걸로라도 일단. 아 맞다, 감독님 그거 가지고 있지 않아요? 비상용 폭죽 같은거. 있죠? 받은 거 얼른 꺼내요. 묵혀 뒀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요.
- 어 있긴 한데. 어 잠시만요.
VJ가 카메라를 내려 놓았는지 시야가 거칠게 옆으로 기울었다.
초조한 숨소리와 다급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화면을 메웠다.
- 아우우우우우——!!!!
- 야이씨···! 감독님, 그거 쏘아 올릴 때 까진 어떻게든 시간 벌 테니까 가까이 오지 말고 얼른 먼저 쏴요 알았죠?
- 근우 씨? 근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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