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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이의 천적
- 강원도 춘천시 △△길 $# - 1
- 14:00 기차 탑승 - 춘천역 하차
- 17:00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것
“···이게 무슨 1박 3일도 아니고···”
재이는 지령이 담긴 종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저희 이대로 출발해야 하는 건가요?”
“정해진 시간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면 숙소에 들렀다 가셔도 됩니다.”
엠케이의 질문에 스태프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 된다는 말씀이시구나···”
“나 수면 베개 없으면 잠 못 자는데?”
“과연 잘 시간이 있을까.”
“제발 불길한 플래그 좀 세우지 마.”
아이들이 투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어도 시간이 촉박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한산한 평일 오후.
카메라와 함께 열차에 오르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하거나 쑥스러워할 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표정의 재이에게 VJ가 말을 건넸다.
- 어색하지 않은가 봐요?
“아, 뭐 네.”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익숙해서요.’라는 말은 애써 집어삼켰다.
꼴찌만 밥 먹듯 하던 연습생 따위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온이라면 모를까.
사실 리온의 경험을 지닌 재이에게 사람들의 시선이란 새삼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호감, 비호감, 애정, 증오, 연민, 시기, 질투···
인간군상이 내뿜는 거의 모든 감정의 오오라를 경험한 리온으로서 기껏해야 차량에 탄 몇십 명의 호기심 어린 시선쯤 그야말로 간지러운 수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사진 찍어도 돼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재이의 눈매가 살짝 흔들렸다.
‘윽. 하필이면.’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서비스 미소와 함께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사인도 해 드릴까요?”
“아 그건 필요 없어요.”
“와 우리 친구 보기보다 단호박이네요.”
괜히 한 마디 더 던졌다가 뼈도 못 추렸다.
재이와 VJ를 핸드폰으로 찍고 있던 어린이가 물었다.
“근데 지금 뭐 찍는 건데요?”
“···.저요.”
“···.왜요?”
진심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어린이의 곧은 시선에 그때까지 잘 웃고 있던 재이의 표정에 처음으로 살짝 금이 갔다.
그랬다.
리온과 융화한 한재이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도 원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가였지만, 딱 하나.
말을 섞기만 하면 대책없이 말려버리는 부류가 존재했다.
어린이.
“어 제가 TV프로그램에 나오고 있어서요.”
“헐 대박. 이름이 뭔데요?”
“한재ㅇ···”
“아뇨 프로그램 이름이요.”
“아··· TVM 스ㅌ..”
“케이블?”
“···.”
VJ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실례를···”
뒤늦게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아이를 끌어당기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아빠 저 사람 케이블에 나온대!”
“쉿. 크게 말 안 해도 다 들려. 너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으라니까 왜 돌아다녀···”
“카메라 보이길래 연예인 탄 줄 알았지.”
“그래서 누구래?”
“몰라.”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재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프로그램 첫 촬영일 부터 줄곧 재이를 전담으로 찍고 있어 나름 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담당 VJ가 말했다.
-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재이씨 이렇게 당황한 모습 처음인 것 같은데요.
“제가 원래 노약자분들께 좀 약해요.”
마음이 좀 여려서.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뻔뻔하게 내뱉는 재이의 얼굴을 카메라로 잡으며 VJ가 물었다.
- 솔직히 마상 입었죠?
“설마요. 그런 거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두면서 어떻게 이 바닥에서 정상을 노리겠습니까.”
- 와 지금 멘트 완벽한데요.
VJ가 줌을 확 당겨 그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미소를 클로즈업하며 말했다.
“한재이 열일 중이라고 자막 넣어 주세요.”
여유를 되찾은 재이가 받아쳤다.
“저기요.”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여유롭던 재이의 얼굴이 일순 흠칫했다.
아까 그 어린이였다.
“사인 해 주세요.”
“예?”
웬만해선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재이의 얼굴이 당황과 의문으로 물들었다.
VJ가 재빠르게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재재님이죠?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 왜 아까 말 안 해 주셨어요! 얼른 여기 사인 해 주세요. 두 장이요!”
어린이의 재촉에 재이는 얼결에 펜과 종이를 받아들곤 사인했다.
사인을 끝내기가 무섭게 어린이가 말했다.
“사진 찍으면 안 돼요?”
“아까 찍었잖아요?”
“그거 말고, 인증샷.”
“아, 네···”
떨떠름한 대답과는 달리 확실한 영업용 스마일과 함께 고객의 요구에 맞춰 손가락 하트까지 날려가며 사진을 찍어 준 재이에게 어린이가 말했다.
“재재님 근데 다음 편은 언제 올라와요?”
“어···. 그게···”
“용사님은 맨날 혼자 싸워요? 친구 없어요? 자고 일어난 드래곤이 또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빨간 드래곤 말고 또 무슨 드래곤 있어요? 빨주노초파남보?”
어린이는 조금 전의 그 심드렁했던 표정과는 다르게 반짝이는 눈으로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의 페이스에 그대로 휘말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재이를 카메라가 꼼꼼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하···”
- 왠지 진이 다 빠진 것 같은 얼굴인데요?
“마라톤 완주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
- 재재님 완전 유명인이던데. 그래서 다음 업로드는 언제쯤?
“한 번이니까 가능했죠. 비기너즈 럭.”
칼 같은 재이의 대답에 VJ가 말했다.
- 과연 진짜 한 번으로 끝날까요.
“이거 떨어지면 생각해 볼게요.”
- 하하하···
재이의 대답에 민망해진 VJ가 소리 내서 웃었다.
결국, 용산에서 춘천까지의 여정 중 대부분을 어린 팬과 함께하게 된 재재님, 아니 재이는 기차가 춘천역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리온의 기억을 가지고 새롭게 깨어난 이후 처음 겪어보는 류의 피로감이었다.
‘역시 방심했어.’
자고로 노인과 아이를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동서고금의 진리라 여기는 격언을 떠올리며 재이는 조회 수 좀 벌어 보겠다고 제 손으로 벌집을 쑤셔버린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며 잠시 반성했다.
“···어?”
“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맞은 편에서 길을 건 너 이쪽으로 오고 있는 낯익은 사람을 발견한 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쪽도 의외였던 듯 잠시 멈춰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심은규~”
“한재이!!”
한걸음에 이쪽으로 달려온 은규가 물었다.
“뭐야 우리 같은 멘토인 거야?”
“그런 듯?”
은규의 말에 대답하던 재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너도 기차?”
“아니? 나 석관이 형 차.”
은규의 대답에 재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너 잠깐 종이 좀 보여줘 봐.”
은규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듯 빼앗아 든 재이가 내용을 확인했다.
- 강원도 춘천시 △△길 $# - 1
- 15:00 매니저 차로 출발
- 17:00 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것
“와 이런 데서 멕이네.”
재이의 억울하다는 듯한 말투에 은규가 물었다.
“왜? 넌 뭐로 왔길래?”
“기차.”
“그 정도면 준수하다 야. 내가 오면서 석관이 형한테 들었는데 애들 중 하나는 자전거 나왔다더라. 목적지까지 30km쯤 되는데 자전거로 오라고 했대.”
“차 타고 오면서 꿀 빤 너한테 듣고 싶은 얘긴 아니다, 심은규.”
“왜, 오면서 무슨 일 있었어?”
눈치 좋은 은규의 물음에 재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었지···. 그럼··· 있었지.”
“감독님 얘 왜 이래요?”
은규가 재이의 담당 VJ에게 물었다.
- 천적을 만났거든요.
“천···적이요? 한재 이한테 천적이 있어요? 친척 아니고 천적? 레알?”
눈을 빛내며 VJ에게 다가가는 은규의 팔을 잡아끌며 재이가 말했다.
“그건 나중에 하고 일단 가자.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야 잠깐만, 끌지 마! 옷 늘어나! 이거 일부러 숙소 들러서 갈아입고 온 거라고!”
은규의 외침에 재이의 얼굴이 한 층 더 구겨졌다.
“아 그래? 누구는 그 고생을 하면서 왔구만. 누구는 꽃단장까지 하고 매니저 차 타고 왔다 이거네? 심은규 완전 슈스가 따로 없는데?”
“아니 뭐라고 할 거면 피디님한테 가서 따지던가! 왜 날 잡아! 아 옷 망가진다고.!!!”
일부러 더 소매를 콱 틀어쥐곤 목적지까지 은규를 질질 끌고 간 재이는 대문 앞에 서서야 손에 쥐었던 힘을 풀었다.
“와 씨 한재이 악력 실화냐. 누가 보면 운동선수인 줄 알겠어.”
잔뜩 구겨진 소매만큼이나 인상을 찌푸린 은규가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이는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야, 야,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은규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자동으로 열린 대문 너머로 재이가 먼저 발을 내디뎠다.
“야, 한재이, 이 치사한 놈아 같이 가!”
은규가 다급하게 외치며 한달음에 달려와 재이 옆에 나란히 섰다.
대문을 지나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걸어 나간 두 사람의 눈앞에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의 정원이 펼쳐졌다. 묘목과 디딤돌의 배치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손을 쓴 것이 느껴지는 듯, 정교하게 구성된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선 재이가 은규에게 말했다.
“누른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현관 벨을 누르려던 순간
벌컥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재이는 시야에 들어온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이미 심장이 쳐 뛰기 시작했다. 저기 오리지널 재재님 잠깐 진정 좀···.
“차상혁 선배님!!!”
재이 만큼이나 놀랐는지 심하게 음 이탈한 목소리로 은규가 소리 질렀다.
“어, 그래. 내가 차상혁이다.”
그런 은규의 반응이 마냥 싫지는 않은지 옅게 웃으며 상혁이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 새끼 성량 포텐이 여기서 터지네···
재이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하는 심은규를 흘낏 쳐다보며 함께 꾸벅 인사했다.
“그래, 어서들 와.”
2D에서 튀어나온 듯 잘생긴 얼굴이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내가 작업할 때 쓰는 개인 별장이야. 2층에 방 있으니 각자 마음에 드는 곳을 쓰면 돼.”
집주인의 성격을 드러내듯 쓸데없는 장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노톤의 실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연예인의 집이라면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대형 셀프사진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소리를 내는 것이라곤 한쪽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뿐인 거실에선 벽 대신 과감하게 낸 통창 너머로 붉은 석양이 내려앉는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벽난로 속 장작 타는 소리만이 가끔 들려오고 있었다.
“와··· 이것이 바로 자본의 향기···”
“출세하고 싶다. 의욕이 마구 솟구친다.”
재이와 은규는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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