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26화 (26/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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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의 충고

재이의 표정을 힐끔 살핀 차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턴 형한테 맡길 테니 잘 부탁해요. 메인보컬 지망인데 맞붙을 애 보이스가 꽤 좋거든. 형이 이 집에 발 들여놓은 순간부터 얘랑 형, 운명 공동체인 거 알죠?”

이거 방송 탔는데 얘가 떨어지면 누가 욕먹겠냐고.

웃으며 덧붙이는 차상혁의 말에 이우연이 가볍게 그를 발길질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 말고 얼른 꺼지기나 해.”

이우연의 발길질을 피하며 차상혁이 심은규를 돌아봤다.

“심은규, 가자. 여기 있어 봤자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사람들 둘 사이에 치여서 진만 빠진다. 너는 나랑 가서 작곡 얘기나 좀 해 보자고.”

은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쉽게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참이었다.

“네! 선배님!!”

은규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차상혁을 따라 스튜디오를 나섰다.

“한재이, 처음부터 다시 한번 쭉 네 식대로 불러 봐.”

이우연의 주문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세를 가다듬었다.

곧이어 노래가 시작되었다.

반주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목소리를 꼼꼼하게 체크하며 이우연은 생각에 잠겼다.

신기한 일이었다.

케이엠 정도 되는 소속사에서 데뷔팀 후보에 오를 정도이니 분명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있었을 터였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꾸준히 트레이닝을 받은 보컬은 티가 난다. 기본기가 탄탄한 대신 자신만의 색깔보단 그 시대의 트렌드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이 녀석은 달랐다.

요새 유행하는 목소리라기엔 덜 다듬어진 느낌인데 그렇다고 기본이 빠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개성 있는 목소리였는데 이우연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음색이 독특하다는 그런 일차적인 부분이 아니라.

“여기, 이 부분은 왜 이렇게 불렀지?”

“···어, 이 부분에서는 좀 빨리 치고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냥요?”

녀석의 감각이었다.

‘이건 진짜 감이 좋다고밖에 설명이 안 되네.’

이론으로 따지고 들면 그냥 엇박자가 난 것뿐인데, 실제로 귀에 꽂히는 느낌은 확 달랐다. 경험 많은 가수들이 라이브에서 원 템포에서 벗어난 애드리브를 넣는 경우와 비슷했다. 이우연 본인 또한 그 기술이 다른 가수들보다 특출나다고 평가받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 녀석이 그런 기술을 벌써 체득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냥 타고 난 거네.’

오랜만에 보는 재능에 이우연의 눈에 욕심이 차올랐다.

트레이너로서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될 떡밥이라고.

“한재이, 넌 내가 잡았다.”

이우연이 중얼거렸다.

‘아, 뭐래.’

한재이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우연의 뜨거운 눈빛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선배님 피곤해 보이십니다.”

침착하게 말하자 이우연이 와하하 웃는 것이 보였다.

‘주무실 시간인 거 아닌가.’

사람이 피곤하면 폭주하기 마련이지.

무적의 보컬리스트도 피로 앞에선 장사 없나 보네.

재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이우연이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고. 너 보컬 트레이닝 제대로 받아본 적 없지?”

“어 받긴 받았는데요, 그게···”

“지금까지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그거 다 잊어.”

“···예?”

“무슨 말을 들었건 그거 다 너한텐 쓸모없으니까.”

‘와, 이 양반 영업에 소질 있으신 듯.’

이렇게 임팩트 쩌는 밑밥 깔기라니.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재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이우연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아 왜? 나 못 믿어? 나 이우연이야. 이래 봬도 앞으로 3년 치 레슨 스케쥴 꽉 찬 몸이라고.”

“믿습니다, 완전 믿습니다.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보다도 보컬신 이우연 선배님을 더 믿습니다.”

아부할 땐 확실히.

와르르 쏟아낸 재이의 말에 그제야 이우연의 표정이 슬쩍 풀렸다.

“됐고.”

이우연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넌 좀 독특한 케이스인 것 같다. 이게 분명 덜 다듬어진 티는 나는데 듣다 보면 또 딱히 안 다듬어도 될 것 같단 말이지.”

자신이 말하고도 앞뒤가 안 맞는 듯한 말에 이우연이 피식 웃었다.

“쉽게 말해서 섣불리 건드렸다가 괜히 니 색깔만 죽일 수 있으니 그냥 놔 두는 게 좋을 것 같단 얘기야.”

“와 방목인가요.”

“여우 주제에 양인 척하기는.”

재이의 말에 핀잔을 준 이우연이 말했다.

“그렇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부르는 게 꼭 능사는 아니야. 특히 네가 솔로가 아니라 팀의 메인보컬이 되고 싶다면 너 혼자 튀는 것보단 다른 목소리를 어떻게 융화시켜 이끌어 나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

재이는 이우연의 말에 속으로 맞장구쳤다.

“리보가 됐건 메보가 됐건 네가 보컬 욕심을 낸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일 것 같다.”

이우연이 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튀지 않게 튀는 법”

열린 교회 닫힘 같은 이우연의 말에 재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

다음 날 아침

이우연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심은규, 그거 아니라니까. 아직도 달걀부침 하나 못하다니. 엉클박 선생님이 보시면 등짝스매싱 날아왔을 듯.”

“선생님이 너 같은 줄 아냐.”

“야 그거 문제 발언이야. 내가 언제 너 때린 적 있냐.”

“있지. 많이 있지. 매일 있지.”

“와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내가 언제—”

“입만 열면 뼈 때리잖아. 언어폭력도 폭력이야, 한재이.”

“말은 바로 하자. 내가 한 건 팩폭이지. 일반적인 언어폭력하곤 좀 다르지 않냐.”

“폭력은 결국 폭력인 법이야. 이참에 반성하고 회개하자.”

“어 근데 너는 일단 그거나 닦아. 다 튀었잖아. 지저분하게.”

“독재자 새끼.”

“꼬우면 독립하던가. 근데 그 실력으로 환갑 전에 가능은 할지 모르겠다.”

“와 지금 건 나이 차별적 발언.”

“시끄럽고 닦기나 해.”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이우연은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 밖으로 나오니 1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난간 너머로 아일랜드 키친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두 녀석의 머리통이 보였다.

‘저것들은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네. 역시 젊은 게 좋은 건가.’

작업에 열을 올리다 보니 결국 동이 트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각자 자러 들어갔던 참이었다. 자신은 아직도 피곤이 덜 풀렸는지 머리가 무거운데 저것들은 저렇게 투닥거릴 여유도 있다니. 나이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딱이라는 생각에 어느새 불혹을 훌쩍 넘겨 버린 이우연은 조금 서글퍼졌다.

“식기 다 놨어.”

‘응? 이 목소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입으로는 심은규를 타박하면서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한재이가 고개를 돌려 대답하는 것이 보였다.

“아 그러면 형 냉장고에서 우유랑 요구르트 좀 꺼내 놔 주세요.”

“우유 벌써 따라 놓으라고?”

“아뇨. 마시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마시면 되죠. 그냥 가져다 놓기만 하세요.”

자연스러운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은 국민적 대세 스타이자 이 집의 주인인 차상혁이었다.

“어? 형 일어나셨어요?”

그때 마침 시키는 대로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들고 몸을 돌려 식탁으로 향하던 차상혁이 이우연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선배님.”

한 박자 늦게 입을 모아 인사하는 두 녀석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이곤 계단을 내려오며 이우연이 말했다.

“좋은 아침. 와 맛있는 냄새 나는데 아침 메뉴가 뭐야?”

“···”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으려는 이우연의 모습에 순간 실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형 거기 말고 일단 이쪽으로.”

차상혁이 손짓했다.

“응? 왜?”

“선배님 식사 같이하실 겁니까?”

한재이가 물었다.

“어? 어, 어어···”

뭔가 쎄한 느낌에 이우연이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럼 좀 이따 아이스크림 사 오세요.”

사 주세요도 아닌 명령형 말투에 이우연이 눈을 찌푸렸다.

차상혁이 말했다.

“와 너무하네. 나는 30분 내내 부려먹었으면서 늦잠 잔 우연이 형은 겨우 아이스크림 심부름이라고?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한재이?”

“그러니까요. 한재이 너무나 투명한 아부.”

“불만이시면 따로 드셔도 된다니까요. 심은규 너도.”

재이의 말에 차상혁이 짜증을 냈다.

“누가 불만이랬냐고. 얜 툭 하면 협박이야.”

“성격이 더러워서 그래요. 선배님이 이해하세요.”

“심은규 네가 고생이 많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차상혁과 심은규의 말에 기가 찬 이우연이 중얼거렸다.

“뭔데 이 분위기···”

“아 형. 이 녀석한테 밥 얻어먹으려면 뭔갈 해야 하거든요.”

“아이스크림 사 오기는 사실 제일 쪼렙···”

“심은규.”

“아 말이 헛나갔습니다. 그게 아이스크림 담당이 제일 꿀 보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희 숙소에서도 제일 할 일 없어 보이는 애가 그거 해요···

뒤이어 들려온 심은규의 말에 차상혁이 ‘아 왜지. 나 걔 알 것 같아···’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귀찮으시면 따로 드셔도 돼요. 선배님.”

티끌 한 점 없이 말간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은 같이 샜는데 피로는 자신에게만 엉겨 붙은 것 같은 기분에 이우연은 울컥 억울함이 치밀었다.

“다 차려놓고 나만 따로 먹으라는 건 좀 치사한 거 아니냐 한재이?”

“준비할 동안 주무셨잖아요.”

“그거야 어제 너 봐 주느라 그런 거잖아!”

“상혁이 형한테 제발 저 좀 넘기라고 30분도 넘게 설득하셨다면서요.”

“야···그건···”

“제 멘토 자리 넘기면 상혁이 형이 하자는 건 뭐든 다 하겠다고 막 애걸복걸하셨다던데.”

“제기랄 누가 그래! 애걸복걸이라니 사람을 뭐로 보고!”

“상혁이 형이 통화 녹음본 들려줬는데···”

이우연이 도끼눈을 뜨고 상혁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차상혁!!!”

“아이고 목청도 좋으셔라. 아침부터 기운이 펄펄 넘치십니다. 형님.”

차상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이우연이 씩씩거리며 재이를 돌아보았다.

“그래! 내가 부탁했다. 근데 뭐!”

“감사하다고요.”

“···뭐?”

“감사하다고요. 그러니까 맛있는 아침 드시고 아이스크림 사 오셨으면 좋겠다는 거죠.”

참 평화롭죠 그쵸잉?

시종일관 침착하고 여유로운 말투로 이우연에게 대답한 재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서늘한 눈매가 휘어지며 개구진 소년의 미소가 드러났다.

“···새꺄 웃지 마. 징그러워.”

재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이우연이 대답했다.

“눈 돌리면 지는 거라던데.”

“나랑 눈싸움할 군번이냐 니가 지금?”

투덜대는 말과는 달리 식탁 앞에 앉는 이우연에게 재이가 말했다.

“선배님 저는 메로나 말고 바밤바가 좋습니다.”

“형, 저는 하겐다즈 아니면 안 먹는 거 아시죠?”

“서 선배님 전 아무거나 사다 주시는 거면 다···”

식탁을 둘러싸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세 사람에 혼이 쏙 빠진 표정의 이우연이 주변을 둘러보다 점멸하고 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누구 전화 오는데?”

투닥거리던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다.

“어, 제 거네요? 누구지, 전화 올 사람 없는데?”

재이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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