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29화 (29/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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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겠다고 덤비면 걷어 차야지

“누구야?”

전화를 끊고 아예 전원을 꺼서 가방 속에 집어넣는데 룸미러로 석관이 이쪽을 살피며 물었다.

“아. 동생이요. 번호는 또 어떻게 안 건지."

"니가 알려 준 거 아니고?"

"저랑 얘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

석관이 잠시 침묵했다.

차는 마침 휴게소로 진입하고 있었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올테니까 기다려."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심은규 옆에서 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차로 돌아온 석관이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찜찜해서 본부에 확인했는데, 그 쪽에서 줬다네. 가족이라고 몇 년 째 연락이 안 되서 부모님이 걱정하신다고 예전 연락처 들이대면서 바뀐 번호 좀 알려달라고 해서 신분 확인 후 녹취 따고 알려 줬다고."

아무리 그래도 지금 세상이 어느 땐데.

석관이 혀를 차며 재이를 힐끔 살폈다.

“어째.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닌가 보다?”

“원래 형제가 많으면 그중에 꼭 하나 있잖아요. 덜된 놈.”

“···어, 그래.”

떨떠름한 석관의 대답에 재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애가 막내라 주변에서 하도 둥기둥가를 한 탓인지 아직 좀 덜 컸거든요.”

“넌 다 큰 녀석인 것처럼 말한다?”

“그걸 말이라고. 저 덜된 놈하고 비교하시면 저 완전 서운한데.”

차를 출발시키며 이쪽을 힐끔 쳐다본 석관과 눈을 맞추며 재이가 웃었다.

“번호 바꿔달라고 할까?"

석관이 물었다.

본인 동의 절차를 생략한 건 명백히 지원 본부의 실수였다. 아무리 아직 연습생 신분이라곤 해도 개인정보 유출은 정색하면 소송 감이었다. 다만 여기서 본부와 척을 져 봐야 재이 입장에 좋을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항의 올리는 참에 번호나 바꿔 달라고 하는 쪽이 무난했다.

이 바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원치 않아도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더러운 일을 많이 보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더러운 꼴을 보게 되는 루트가 바로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엮여 들어갈 때였다.

석관은 이제 겨우 이 바닥 커리어의 출발선에 서려는 녀석이 벌써 그런 안 겪어도 될 꼴을 겪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인간 관계건 뭐건 간에 더러운 건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석관의 물음에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형. 괜찮아요. 그 녀석 지금 제가 그동안 자기한테 관심 안 줬다고 떼부리는 거거든요.”

제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 녀석이라.

태연하게 대꾸하는 재이에게 석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굳이 가족하고 두루 다 잘 지내려고 할 필요 없다, 재이야. 이 바닥에선 혈연도 조심해야 돼.”

“형한테 그런 얘기 들으니까 신선한데요?”

“농담 아니야. 그냥 너는 너 갈 길만 열심히 가면 되는 거라고.”

“음. 지금 건 좀 꼰대스러웠고.”

“씁. 사람이 걱정을 해 주는데.”

“고맙습니다, 형.”

발끈하려던 석관이 뒤이어 들려 온 재이의 인사말에 입을 다물고 대신 힐끔 그를 살폈다. 거의 절연상태나 다름없던 골칫덩이 가족에게서 불시에 연락 폭탄을 받은 녀석치곤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동요하는 것보단 낫지 싶으면서도 저렇게 속으로 쌓아두면 안 좋을 텐데 싶은 생각에 석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좀 자 둬.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어.”

“네, 형.”

석관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 시트로 몸을 묻었다.

‘뭐, 어차피 그 단순한 새끼가 어떻게 나올 지야 뻔 하지.’

눈을 감은 채 재이는 생각했다.

원래 한재이야 본인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어렸을 때 부터 당하고 자란 탓에 들이받는 법도 모르는 순둥이였지만 자신은 달랐다.

물겠다고 덤비면 걷어 차 주는 게 맞지.

‘물론 나 말고 다른 사람 다리로.’

재이는 한준의 다음 패턴을 예상하며 오랫만에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

TVM 스튜디오

“야아아아 한재이!!!! 진짜 보고싶었다아아아!!!!!”

대기실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엠케이가 우다다 뛰어나와 슬리퍼 홀드를 시전하며 재이에게 들러붙었다. 재이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제 위에 매달린 녀석을 바닥에 메다꽂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제 등에 들러붙은 엠케이를 뜯어내며 말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엠케이.”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대답했다.

“아니거든? 진심이거든? 진짜 저것들하고 같이 있는 동안 먹은 거라곤 인스턴트 라면이랑 배달음식밖에 없다니까!”

“아, 그거.”

재이의 서늘한 대답에 엠케이가 다급히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딱히 밥 때문에 니가 그리웠단 얘기는 아니고. 근데 저 새끼들 진짜 할 줄 아는 게 1도 없어서 라면 하나 끓이는데 무슨 사골국 우린 줄 알았다니까. 시켜 먹는 것도 죄다 무슨 칼로리 염분 폭탄에다가. 진짜 내가 경연만 아니었어도 당장 짐 싸서 너 있는 곳으로 가는 건데···”

“와 엠케이 양심 어딨··· 한재이 없다고 그동안 못 먹었던 인스턴트 음식 줄 세우기 해서 다 먹어보겠다고 제일 먼저 나서서 편의점 털어온 게 누구였더라?”

남궁찬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러게. 먹었으면 치우라는 잔소리 안 들으니 살 것 같다고도 하지 않았나?”

옆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차인혁이 심드렁하게 거들었다.

“아무리 한재이가 요리의 신이어도 김떡순은 역시 사 먹는 게 진리라고도 했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세팅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이환이 말했다.

“···어, 아니 그러니까 그건.”

엠케이가 재이의 눈치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동그란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그건 인정.”

“응?”

평소대로라면 사정없이 후려쳤을 신랄한 코멘트 대신 들려온 짤막한 대답에 엠케이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재이를 바라봤다.

“인정이라고. 김떡순은 사실 아무리 잘해도 사 먹는 것만 못하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는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급 반색하며 맞장구쳤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한재이, 요리를 잘하려면 미각도 좋아야 한다더니. 그 말이 딱 너네 너야. 절대 미각 한재이, 인정할 건 인정하는 쿨가이. 멋지다 응!”

엠케이의 말에 대기실 이곳저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와 LTE 급 태세전환. 아주 눈이 부시다 눈이 부셔.”

“타고났네! 타고났어. 저 정도 아부라니 엠케이 전생에 이방이었을 듯.”

“야 누가 쟤 손바닥에 지문 있나 확인해라. 하도 비벼대서 다 닳아 없어졌을 듯.”

“리허설 시작합니다-”

엠케이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스태프가 대기실 입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나름 평온하던 대기실의 공기가 일순 팽팽해졌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이리저리 제각각 흩어져 있던 녀석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확 피어올랐다. 이제부턴 각자도생의 시간이었다.

***

“팀장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케이엠 마케팅 전략 3팀의 백은주 팀장은 자신을 부르는 부하 직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애매하다는 듯 줄어드는 목소리가 왠지 불길한 촉을 자극했다.

“뭔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의 데스크톱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백은주가 중얼거렸다.

“···안 좋은데.”

TVM과의 합작 프로그램 스텝 업 관련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한재이 사실은ㅋㅋㅋ]

야 내가 진짜 TV에 이새끼 얼굴 나오는 거 보고 놀라 자빠질 뻔 했잖아ㅋㅋ. 사실 얘 우리 동네에서도 유명했음 찌질하기로 ㅇㅇ 이새끼네 형제만 얘 포함 다섯인데 다섯 중에 하나만 찌질하다고 동네 사람들이 주워 온 자식이라고 수근거렸는데 사실 그냥 그거임ㅋㅋㅋㅋㅋ 지 부모가 못 키우겠다고 버리고 간 거 그 집 식구들이 불쌍하다고 주워서 키워줌 ㅇㅇ 근데 할 줄 아는 거 진짜 ㅈ도없어서 밥만 축내던 새끼가 갑자기 쳐 도른건지 지가 연예인이 될 거라느니 명함을 받았다느니 이ㅈㄹ ㅋㅋ대체 누가 개 찐따 새끼한테 명함을 준다고 ㅁㅊ 눈깔이 삐지 않고서야 ㅋㅋ ㅈㄴ맨날 찔찔 짜면서 빵셔틀만 하다가 그것도 제대로 못 해서 얻어터지고 다니던 걸로 유명한 새낀데ㅋㅋ 서바이벌인가 뭔가 저거 다 조작임 소속사하고 방송국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ㅇㅇ 생법에서 말 타는 건 진짜 개무리수 ㅋㅋㅋ그거 백퍼 다 합성임ㅋㅋ 그 새끼 말 타는 거 본 적 없음ㅋㅋ 내가 장담함 ㅋㅋㅇㅇ

- 주작 개에반데;;

- 수근x 수군o

- 너무 길어서 못읽겠다 누가 요약좀;

- 별 ㅋㅋ거지 같은ㅋㅋㅋ 내가 장담한대 ㅋㅋㅋ 지가 뭔데 ㅋㅋㅋ

- 네 다음 열폭

- 근데 사실 생법은 말 나올 만함

└사실 일반인이 야생마 조련하는 건 좀 말이 안 되지 않냐

└지금껏 참느라 고생했다 바로 말 얹는 거 보소 ㅉㅉ

└ 뭐래 제작진 인증짤 올라온 거 못 봤어?

└ 방송국 새끼들이 하는 말을 믿냐 머릿속 꽃밭이심?

- 솔까 얘만 노골적으로 푸쉬하는거 그동안 거슬렸던 거 나 뿐임?

└ㅇㅇ애초에 설정이 과함 ㅋㅋㅋ

└ㅈㄴ 주변 다 들러리 만들고

└어그로 끌어모아 솔로 데뷔시키려는 소속사의 빅픽쳐 ㅋㅋㅋ

- 병신들이 떡밥 던져 줬더니 이때다 싶어서 몰려드는 거 봐라.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진짜ㅉㅉ

└쌓인 게 터진 거지 언제고 말 나올 줄 알았음 ㅇㅇ

└생법 저건 해명해야 한다고 본다 ㅇㅇ

└ㅇㄱㄹㅇ

게시판은 이미 슬슬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쩌죠 팀장님?”

“음···”

백은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전담 팀을 꾸려 케어할 필요가 없는 신인이나 그 외 연예인들을 담당하고 있는 전략 3팀의 주된 업무는 사실 인터넷 모니터링이었다. 기획 쪽은 기획본부가 총괄하고 있는데다 담당 연예인의 라인업 상 기민한 프레스 대응이나 타사 간 조율이 필요한 굵직한 안건이 생기기 어려운 환경 탓이 컸지만, 백은주는 딱히 자신이 맡은 업무에 불만은 없었다.

자고로 회사란 가늘고 길게 가야 하는 법.

굵직한 일이 많아 봐야 스트레스만 쌓이고 수명만 줄었다.

그리고 백은주는 지금 올라온 이 글이 자신의 근로 원칙을 심각하게 위협할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건 잘라내야겠다.”

사실 원글의 찌질이네 뭐네 하는 이런 쪽은 그냥 가끔가다 보이는 주작에 가까웠다. 그냥 내버려 둬도 좀 타다 사그라질 수준이었는데.

‘문제는 생법이지.’

생법 상 편 온에어가 나간 뒤 있었던 정례회의에서는 혹시 모르니 일단 촬영에 참여했던 스태프의 SNS로 인증샷 몇 개를 풀어놓는 정도로 사전조치하자는 결론이 났었다. 한재이가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장면이 너무 잘 빠진 탓에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의견에 따른 조치였다. 이 바닥에선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이 믿는 쪽이 사실이자 진리였다. 그리고 그 믿음의 무게가 이쪽으로 향하도록 미리미리 약을 쳐 놓는 것이 자신이 맡은 주 업무라고 백은주는 생각했다.

‘쉽게 지나가자 제발.’

속으로 중얼거리며 백은주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사님. 네, 저 3팀 백은주입니다. 지금 잠시 통화할 수 있으십니까.”

일단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부터 직접 챙기고 있는 박 이사에게 보고를 올렸다. 통화를 마친 백은주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안 대리, 우선 원글 좀 내리자. 본문하고 댓글, 관련 글 따로 모아두고 게시판이랑 SNS 모니터링 계속하고 다른 쪽으로 번지는 거 최대한 잡아 봐. 최 주임은 매니저한테 연락 넣고 얘 가족 사항 다시 확인해 오고. 김 대리는 기획팀이랑 연계하고. 아니, 아직 나설 타이밍 아니니까 그냥 업데이트만 해 두라고. 이사님하고 30분 후에 미팅 잡았으니까 다들 그 전에 상황 보고 부탁 해.”

백은주가 가닥을 잡아 주자 나머지 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TVM 스튜디오 앞 주차장

촬영을 마치자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아침나절만 해도 나름 생기발랄하던 녀석들도 종일 이어진 촬영과 마지막에 공개된 심사 결과에 생각이 많은 듯 했다. 숙소로 출발하려던 석관이 갑작스러운 전화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옹기종기 여섯 명이 꽉 채워 앉은 차 안엔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야. 이거···”

그 고요함을 깬 것은 엠케이의 목소리였다.

“뭔데?”

옆자리의 심은규가 심각한 얼굴의 엠케이를 흘깃 살피곤 그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야. 한재이.”

뒷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던 재이가 심은규를 바라보았다.

“너 난리 난 듯.”

딱딱하게 굳은 심은규의 목소리가 차 안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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