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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 대고 코 풀기
“이건 백퍼 한준이 녀석이 쓴 것 같은데요.”
늦은 밤.
숙소에 다른 녀석들을 내려 주고 그 길로 석관과 함께 케이엠 본사로 들어온 재이는 회의실에서 자신과 마주 앉은 전략 3팀 백은주 팀장에게 말했다.
“아. 한준이라고 제 동생 놈인데요. 얘가 좀 관종이라. 올린 시간 보니까 저랑 통화하고 바로 써서 올린 것 같은데. 어지간히 열 받았었나 보네요.”
통화하는데 시끄럽게 굴길래 그냥 끊었거든요.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으며 말하는 재이를 바라보며 백은주가 입을 열었다.
“동생이랑 사이가 좋지 않은가 봐?”
“뭐 그렇죠. 나이 차 안 나는 동성 형제랑 사이좋은 편이 드문 거 아닌가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래서, 일단 이번 일 회사 차원에서 어떻게 처리할 건지 기왕이면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
백은주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처리하실 건데요?”
“회의 결과 지금 당장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조치를 하기엔 아직 좀 이르다는 결론이 났어. 조금 더 지켜보자는 쪽이지.”
“그렇군요.”
차분한 재이의 대답에 백은주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에 재이가 이어 말했다.
“제가 볼 때도 이게 지금 회사 차원의 대응이 필요한 일 같아 보이진 않아서요. 아, 그래도 이렇게 일부러 불러서 직접 설명해 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백은주가 입을 열었다.
“의외네. 이런 상황이면 대부분은 불편해하는데. 아니면 이게 본인에게 별로 위협이 안 된다는 판단인 거야?”
“음. 불편하지 않은 건 제가 회사 측 입장이었어도 같은 판단이었을 것이라고 납득했기 때문이고.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제 선에서도 해결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 설명해 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는 백은주에 재이가 이어 말했다.
“일단 한준이 새..흠. 녀석이 저에 대해 한 말은, 이미 확인하셨겠지만 대부분 사실이니 그냥 둬도 될 일이죠. 제가 사람을 팬 쪽도 아니고 거꾸로 맞고 다닌 쪽이니 사실 그 녀석이 입을 털면 털수록 저한테 오히려 유리할걸요.
그러니 사실은 말 탈 줄 모른다더라, 생법팀이 프로그램 띄우려고 플롯 짜서 시청자를 기만했다는 플로우만 꺾어 놓으면 되는데 이건 크게 번질 것 같으면 회사가 움직이기 전에 생법팀이 먼저 움직일 것 같거든요.
그러니 지금 당장 이 글에 회사가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편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인 거죠.”
안 그래도 저 싸고돈다고 말 나오는 마당에 말이에요.
“···”
백은주가 놀란 얼굴로 재이를 쳐다보다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놀라라. 너 혹시 오기 전에 박 이사님이랑 통화했니?”
“아뇨? 왜 그러세요?”
“아니. 이사님이 하신 말씀하고 하도 똑같아서. 미리 따로 언질을 주셨나 했지.”
백은주가 재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어 말했다.
“뭐. 일단 재이 너도 회사 방침을 이해한다니 다행이야. 여기서 대부분 의견이 안 맞고 그러면 쉽게 갈 수 있는 일도 꼬이기에 십상이거든.”
인상을 찌푸리는 백은주에게 재이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빨리 슈스돼서 팀장님이 곧장 강경 대응 해 주시는 거 보고 싶단 생각도 드는데요.”
잠시 말을 멈춘 재이가 싱긋 웃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여유로움이 담뿍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어차피 상관없긴 해요.”
곧 조질거라서요.
한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아 참, 대신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요.”
“뭔데? 내 선에서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게. 나 지금 꽤 감탄했거든.”
재이의 말에 백은주가 대답했다.
“받고 싶은 자료가 있는데요.”
씩 웃는 재이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
한준은 이불 위에 드러누워 인터넷 창을 들여다보며 낄낄댔다.
“한재이새끼 꼴 좋다. 활활 잘 타네. 어우 속 시원해.”
스크롤을 휙휙 내리며 들여다보고 있는 곳엔 제가 쓴 글의 캡쳐본과 그것을 두고 갑론을박 하는 사람들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쩐지 생법 보면서 기분이 쎄했다느니 야생마를 장비도 없이 올라타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느니 하는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한재이를 옹호하는 글들도 몇몇 보이긴 했으나 대부분이 소속사와 방송사가 무리수를 뒀던 게 터졌다는 평이었다.
- 근데 한재이 그럼 학폭 피해자인거? 그건 좀 안됐는데.
└학폭인지 아닌지는 모르지 않나? 원글 어디에도 같은 학교라곤 안 했잖아
└사실 난 원글에서 이게 제일 주작 같음 그 얼굴 어디가 피해자야. 가해자면 몰라도
└이건 너무 나갔다 돌아와라
- 저 글 난 신뢰 안 감 애초에 주워 온 자식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주작인지 어떻게 암??
- 분명 한재이 뜬 거 보고 배 아파진 어딘가의 방구석 찐따가 던진 돌ㅇㅇ
└그 돌에 왜 내가 마상 입고 있냐고 ㅋ큐ㅠㅠ
└야나두···ㅠㅠ
“아이씨 이것들이 누구보고 방구석 찐따래!?”
한준이 막 분노의 타이핑을 시작하려는 순간, 손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뭐야 한재이새끼잖아.”
발신자 정보를 확인한 한준이 중얼거렸다.
새끼. 이제야 쫄아서 전화 했나 보네. 그럼 그렇지.
“야 이 새끼야 어떠냐 꼭 손으로 직접 후려쳐야 맛은 아니지 그렇지 않아? 하하하하”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한준의 귀에 무덤덤한 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직 도착 안 했나 보네?
“뭔 개소리야?”
- 다이 형, 오늘 휴가 내고 너 보러 간다던데.
득의만만하던 한준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 내가 연락했거든. 형한테.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다이.
다섯 형제 중 맏형으로 부모님도 안중에 없는 한준이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인물이었다.
“너 너 뻥카치는거 내가 모를 줄 알고? 한다이 당분간 바빠서 못 온다고 분명히···”
- 니가 내 연락처 달라고 회사에 애걸복걸한 음성본이랑 인터넷에 올린 글 보내줬더니 당장 내려간다던데?
“···뻐 뻥치시네. 좆까 새꺄. 인터넷에 올린 게 내가 쓴 거란 증거 있어?! 어디서 사람을 엮으려고.”
- 머리는 장식이냐. 작정하면 못 잡는 게 없는 세상인데. 회사에서 너 찾아내서 고소하겠다는 거 일단 말리고 오는 길이다.
고마운 줄 알아.
고저없이 무심한 재이의 목소리에 한준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고소? 그까짓 거 하라고 해! 씨발 내가 뭐 없는 거 지어낸 것도 아닌데 고소할 게 뭐가 있다고!”
- 너 내가 말 탈 줄 모른다고 했잖아. 생법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그 그게 뭐. 너 말 탈 줄 모르잖아. 새꺄.”
한준의 말에 핸드폰 너머 재이가 한숨을 푹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너 그 기억력 가지고 일상생활 가능은 하냐?
“새끼가 처맞고 싶지 아주.”
- 너한테 뜯긴 돈이 다 어디서 났다고 생각하는데?
“···”
한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그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 새낀 돈이 어디서 나서 나한테 뜯기고 다녔지, 그러고 보니?
- 최 이장님 댁 목장. 기억 안 나?
“·········씨이발.”
- 우리 회사야 내가 어떻게든 부탁 해 볼 수 있다지만 상대가 방송국이면 나도 좀.
한준은 초조해졌다.
딱히 친구도 취미도 없는 한재이가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관심따위 없었다. 한준에게 중요한 것은 필요할 때마다 한재이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일뿐이었다.
많이 필요할 땐 많이, 적게 필요할 때도 많이, 있으면 뜯고 없어도 뜯고.
돈이 어디서 나서 저한테 뜯기는지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당연히 형들한테 구걸하거나 엄마한테 받아냈겠지 하고 있었는데.
- 안 믿기면 내일 이장님한테 가서 여쭤봐. 아주 자세히 얘기 해 주실 거다.
아 그 전에 다이형한테서 살아남으면.
얄밉게 덧붙이는 말에 한준이 이를 갈며 말했다.
“한다이 따위 안 무섭거든? 내가 뭐 잘못 한 것도 아니고. 엄마가 니 새끼 걱정하는 거 보다 못해서 연락처 좀 딴 게 뭐가 문제라고. 인터넷에 아무 글이나 싸지르는 거야 나 말고 다른 새끼들도 다 하는 거잖아. 거기 보니까 니 욕 하는 거 나 하나만도 아니던데!”
- 그래서. 엄마한테 내 연락처를 알려 드리긴 했고?
여전히 평온한 재이의 목소리에 한준이 버럭 소리쳤다.
“내일 가르쳐 주려고 했다! 뭐! 왜! 뭐!!”
-그래 그렇다고 치고.
“이게 근데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너 내가 물로 보이냐? 너 사는 곳 내가 못 찾아낼 것 같아? 당장 찾아가서 아가리를 날려버리···”
“한준 이리 나와.”
한참 제 분에 겨워 소리를 지르고 있던 한준의 등 뒤로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다이 형.”
그를 뻣뻣하게 돌아보며 중얼거린 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핸드폰을 뺏어 든 한다이가 말했다.
“재이냐.”
-네, 형. 도착하셨어요.
“그래. 뭘 전화까지 했냐.”
-그래도 얘한테도 상황 설명은 좀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네, 형.
전화를 끊은 한다이가 한준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한다이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듯한 느낌에 한준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재이는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았다.
‘원래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이기는게 상책인 거거든.’
리온이었던 시절 왕국과 교단 사이의 알력다툼에서 배운 정치질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언제 한 번 내려가서 직접 봐야겠지만 일단 이걸로 당분간은 잠잠하겠지.’
형, 수고 좀 해요.
과거의 재이가 가족 중 가장 믿고 의지하던 맏형 다이의 얼굴을 떠올린 지금의 재이가 피식 웃었다.
“통화 끝났어?”
방문을 열고 나서자 늦은 시각임에도 자지 않고 모여 있던 녀석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엠케이가 묻는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뭐야 왜 안 자고 있어? 체력 좋네 다들.”
평소와 다름없는 재이의 모습에 안심한 것인지 녀석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니가 방 차지하고 있어서 자고 싶어도 못 잤잖아.”
“그래 한재이. 우리가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는 건 네 탓이니 일단 뭘 좀 먹자.”
재이와 한방을 쓰는 엠케이와 남궁찬이 앞다퉈 내뱉은 말에 이환이 끼어들었다.
“남궁찬 일관성 오지네.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먹을 거로 통하냐.”
“재이야 이환이는 안 먹는단다.”
“제기랄 내가 언제!”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인혁이 입을 열었다.
“한재이.”
그 서늘한 음성에 투덕거리던 녀석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순간 조용해진 실내에 재이가 불편한 듯 대답했다.
“왜, 뭔데.”
그런 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인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시켜 먹자.”
“아 뭐야 놀랐잖아.”
“한 대 치는 줄.”
“진심 카메라 막아서야 하나 순간 고민했잖아.”
한 박자 늦게 아이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근데 듣고 보니 쎄하네? 우리가 언제 한재이한테 야식해 달랬냐?”
“그러게 꼭 자기만 착한 척.”
“그러고 보니 쟨 저번부터 노골적으로 한재이한테 아부하네?”
“엠케이 그건 너고요.”
“아 뭐래 내가 무슨 아부를 했다고. 난 사실을 말했지. 사실을.”
“근데 뭐 시키지?”
“진리의 김떡순이지.”
“말이돼냐. 이 시간엔 치킨 족발 콤보가 국룰인거 몰라?”
“남궁찬 넌 어느 나라 사람이냐. 치킨하고 족발을 섞다니 이런 근본 없는 자 같으니.”
또다시 우르르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피식 웃자 소파 반대편에 앉아있던 차인혁이 이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냐?”
아 뭐야 느끼하게. 하고 되받아치려던 재이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래도 명색이 아이돌 지망생인데 머릿수만큼 야식을 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냐는 파와 대표님이 허락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는 파로 나뉘어 티격태격하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제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기분. 나쁘지 않은데.’
재이는 속으로 생각하며 씩 웃었다.
“날 뭐로 보고?”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감 충만한 그 웃음에 사방에서 쿠션이 날아왔다.
“내일 다들 뭐 할 거야?”
한 시간 뒤. 결국 족발과 순대로 합의를 본 후 식탁에 모여앉아 열심히 먹던 중 이환이 물었다. 내일은 모두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프일이었다.
“난 집에 갈 거야.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자다 올 듯.”
남궁찬의 말에 마지막 족발을 두고 이환과 젓가락 싸움을 벌이던 엠케이가 말했다.
“난 옷 사러 갈 거야. 가지고 온 옷만 돌려입으니 진심 옷에 구멍 날 지경.”
“오 나도 같이 가자. 나도 옷 좀 사야 돼.”
엠케이의 말에 은규가 반색했다.
“난 연습실. 에이미 선배님 쪽 보컬 선생님이 봐 주신다고 했거든.”
“와 이환 비겁하다. 쉴 땐 다 같이 쉬어야 한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그러게. 에이미 선배님 담당이면 연습생 트레이닝은 안 한다고 하셨던 분 아니냐? 그걸 그렇게 뚫냐. 무서운 놈.”
“아 뭐야 휴일을 어떻게 쓰건 내 맘이지. 꼬우면 너희들도 연습하던가.”
“저거 한재이식 화법.”
“이환 아주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는.”
“쯧쯧. 싹수가 노랗다 노래.”
이환의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야유를 쏟아부었다.
“그래서 넌 뭐 할 건데?”
아쉬운지 다 발라낸 족발을 손에 들고 쪽쪽 빨고 있던 엠케이가 재이에게 물었다.
“나? 얘랑 슈스한테 삥뜯기러 갈 예정.”
마침 순대에 막장을 한껏 찍어 만든 깻잎쌈을 한 입에 넣고 있던 차인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재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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