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31화 (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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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우와아, 이거 진짜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풀리나.”

재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눈앞에는 차상혁의 얼굴이 박힌 현수막과 스탠드 배너로 장식된 밥차가 있었다. 아직 식사하기엔 이른 시간임에도 스태프 중 몇몇이 이미 밥차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본인 밥차도 아니고 남의 밥차 보는 게 평생소원이라니. 정말이지 네 머릿속은 알 수가 없다.”

옆에 서 있던 인혁이 삐딱하게 말했다.

“시끄럽다 차인혁. 집중 흐리니 말 걸지 마라.”

어느샌가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재이를 노려보던 인혁이 투덜거렸다.

“밥 먹자더니 제 자랑하려고 부른 거냐고.”

“어휴, 차인혁 꼬인 거 보소. 밥 사겠다는 사람 불러서 밥 사주는 아량을 칭찬하지 못할망정. 대체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남이사. 근데 진짜 왜 안 와. 사람 기다리게 해 놓고.”

“촬영이 길어지나 보지. 꼬우면 출세하던가.”

“넌 진짜 누구 편이냐고.”

“밥 사주는 사람 편.”

“어휴 진짜 한 대 칠 수도 없고.”

“와 문제 발언. 인터넷 터지겠다 조심해라.”

“실시간 터뜨리고 계신 분께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참에 바톤 넘겨받아도 돼.”

대신 마음 단디 먹고 받아라.

키득거리며 대답하는 재이를 보며 인혁은 저 쇠심줄 같은 신경에 새삼 감탄했다.

한재이의 과거사에 대한 ‘폭로’ 글은 실시간 화제 몰이 중이었다. 회사가 재빨리 원글을 내리긴 했지만 이미 커뮤니티 사이에서 캡쳐본이 돌고 있었다. 스텝 업과 생법 시청자들 사이에서 야금야금 퍼지기 시작한 글은 대형 커뮤니티 이슈란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글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 어린 연습생의 개인사를 동정하는 사람들만큼 그런 별 볼 일 없는 그가 생법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한 데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원래 작은 불씨도 아차 하는 사이에 큰불 되어 번지는 것이 이 바닥이었다. 인혁은 제 일도 아닌데 괜히 초조했다.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태평한데 말이지.’

사진은 다 찍었는지 이번엔 메뉴를 하나하나 구경 중인 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왠지 자신만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차상혁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습관처럼 얼굴을 팍 찡그리고 뭐라고 내뱉으려다 차상혁과 함께 다가오고 있는 인물을 발견한 인혁은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앗, 안녕하십니까!”

메뉴판에 정신이 팔려 있던 재이가 인혁의 목소리를 듣고 뒤늦게 달려와 인사했다.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와, 웬일로 이렇게 예의 바르지? 역시 선생님 덕인가?”

“이야 넌 딱 봐도 누구 동생인지 너무 티 난다. 인생이 괴로웠겠어.”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인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짜고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은 잘 알려진 연기파 배우 황민석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사전 촬영이 시작된 퓨전 사극 드라마 [서리 내린 달]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와 선생님, 그 말씀 서운한데요.”

상혁의 너스레에 황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슈스 동생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문제 안 일으키고 큰 것만 해도 넌 네 동생한테 감사해야 해 인마.”

황민석의 말에 인혁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어휴 저러다가 애 울겠네 아주.

옆에서 인혁을 힐끔 쳐다본 재이가 속으로 혀를 찼다.

“네가 걔구나? 야생마 조련남.”

“한재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근데 저는 어떻게 아셨어요?”

재이의 물음에 황민석 대신 옆에 있던 상혁이 대답했다.

“선생님이 승마가 취미시거든. 활동하시는 동호회에서 네 얘기가 나왔대.”

“그거 보고 내가 곧바로 상혁이한테 전화로 물어봤거든. 저거 편집이냐고.”

여전히 시선을 재이에게 둔 황민석의 말에 상혁이 덧붙였다.

“오늘 마침 너랑 저 녀석 놀러 오기로 했단 얘기를 들으시더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길래 모시고 왔지.”

오늘은 촬영 스케줄도 여유 있는 편이니.

상혁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아··· 감사합니다.”

아직 연예인과 일반인의 중간단계인 속칭 연반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국민적인 인지도를 지니는 유명 배우가 관심을 가졌다니. 본업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점이 좀 아쉬웠으나 어쨌든 신기한 기분이긴 했다.

“너 이따가 나랑 좀 보자. 마침 오늘 말도 와 있으니 딱 좋네.”

“어···무슨 말씀이신지 잘.”

황민석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상혁이 말했다.

“베어 백 라이딩, 해보고 싶으시대.”

못 말린다는 듯 이야기하는 상혁의 말에 황민석이 발끈했다.

“그거 잘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니가 몰라서 그런다니까. 김 감독도 그 얘기 듣더니 자기도 끼워달라고 했다고.”

“어느 틈에 김 감독님까지 끌어들이셨습니까? 선생님.”

“너 촬영 하는 틈에.”

“···저 김 감독님은 누구신데요?”

재이의 물음에 상혁이 대답했다.

“아 우리 무술 감독님. 선생님하고 같은 동호회 하시거든. 오늘 촬영 때문에 말 몇 필 같이 와 있으니 아주 제때 오긴 했다 니가. 아, 근데 그거 송 피디님한테 말씀은 하셨습니까, 선생님?”

“이따 스케쥴 봐서 구경하러 오겠다던데?”

“진짜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신다니까.”

이미 판 다 깔아 놨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황민석과 그 옆에서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는 상혁을 차례차례 쳐다본 재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뭐 하나 부탁드려도 되나요?”

“뭔데? 말 해 봐.”

제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돌하게 묻는 어린 녀석이 재밌다는 듯 황민석이 재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기왕 하는 거. 챌린지 형식으로 하면 어떨까 해서요.”

“챌린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재이가 웃었다.

“네. 챌린지요.”

이왕에 깔린 판인데. 저도 덕 좀 보자고요.

***

“골치 아프게 됐네.”

생존의 법칙 담당 PD 차주인은 편집실에 앉아 중얼거렸다.

최근 방영된 카히타마하티 편은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갈아엎으며 좀 느슨해지고 있던 프로그램의 인기를 다시 바짝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연말을 노려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흡족하던 참이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역대급 오프닝이라고 인터넷에서 칭찬이 자자하던 오프닝에 태클이 들어온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카더라로 돌다 말 것 같이 보이던 글이 점점 퍼지는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늘 아침엔 결국 CP한테 한마디 듣고 난 뒤라 기분이 더 별로였다. 억울했지만 이 바닥 생리가 그랬다. 해명 글을 올리는 상황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바로 손 쓸 수 있도록 예전에 편집해 뒀던 클립 중 몇 개를 직접 검토하던 중이었다.

[서 작가: 피디님 이것 좀 보세요.]

그때, 메인 작가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건···”

메시지에 링크된 주소를 클릭하자 배우 황민석의 트위티 계정이 화면에 떴다.

#승마챌린지 #선생님과_학생들

이야 이게 직접 해보니까 쉽지 않던데요. 재밌었어요 ㅎㅎ 상혁 후배님은 어떠셨는지 @shsh_chacha

글과 함께 첨부된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영상에는 한재이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안장 없이 말에 올라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배우 황민석과 차상혁이 각자 도전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단번에 성공한 차상혁과 달리 몇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한 황민석이 환호하는 것으로 짧은 영상은 끝이 나 있었다.

차상혁의 계정으로 들어가자 같은 태그를 단 글과 함께 차상혁을 메인으로 찍은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승마챌린지 #보호장비는_꼭_착용하기

보기만 했지 직접 해본 건 처음인데 스릴만점이네요. 유경험자인 근우씨 소환합니다 @Kunuman1

#승마챌린지 #이미_한_자의_여유 #현장감_어떠심 #카히타마하키의_위엄

전 이미 했으니 이걸로··· 미연 누님 어소세요 @God_Miyeon0021

차상혁에게 지명받은 이근우는 카히타마하키에서 직접 찍었던 영상을 올려놓았다. 로프만 겨우 붙잡은 이근우가 날뛰는 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분명 비명 비슷한 걸 질러댔던 거로 기억하는데 영상에선 경쾌한 배경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해시태그가 붙은 글은 차주인 PD가 트위티를 훑어보고 있는 동안에도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차 PD는 꽉 막혀있던 속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야, 이게 이렇게 풀리나.”

첫 영상에서 황민석과 함께 있던 한재이를 떠올린 차 PD가 웃었다.

“운빨 하나 끝내주는구나, 한재이. 타고났네, 타고났어.”

그럼 이쪽도 웨이브 한 번 타 볼까.

차 PD가 고쳐 앉으며 중얼거렸다.

***

“우리도 할까, 승마챌린지?”

스텝 업 4차 경연 본방을 보기 위해 거실에 모여있던 녀석들 중 엠케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애초에 말 탈 줄 알기나 하냐.”

“왜 이래. 이래 봬도 나도 타 봤다고.”

“뭐. 포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그치.”

이환과 엠케이가 티격태격하는데 남궁찬이 끼어들었다.

“그거 보니까 사람들 막 자기 말 타본 적 없다고 대신 말 인형 타고 그러던데.”

“그럼 우린 말 대신 얘 타면 되겠네.”

엠케이가 잘됐다는 듯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이환의 등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야악!! 씨ㅂ···무거워 내려와!!! 안 내려와!? 어??!!!”

“남궁찬 빨리 찍어 지금 찍어!”

“야 그렇게 갑자기···. 잠깐 기다려봐 조금만 더 버텨.”

“야이씨 안 내려와? 어!!??”

“와 이게 진짜 어렵긴 어렵구나 오오. 떨어질 듯!!”

“근데 우리 어차피 계정도 없어서 올릴 수도 없잖아.”

심은규의 차분한 말에 이환과 엠케이, 남궁찬의 움직임이 일순 멈칫했다.

“야이씨 엠케이 당장 내려와!”

엠케이를 겨우 뿌리친 이환이 씩씩대며 말했다.

“아으 내 허리. 엠케이 너 진짜 두고 보자. 가만 안 둔다 내가.”

“아 미안미안. 진짜 미안.”

“미안하면 메로나.”

“끼지 마라, 남궁찬.”

투닥대는 녀석들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심은규가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진짜 이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저거 찍으려고 일부러 상혁 선배님 찾아갔던 거야?”

“와 그거 진짜면 소오름”

“한재이 흑막보스설”

녀석들의 아우성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지난번 경연 때 얘랑 신세 졌다고 밥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촬영장으로 오라고 하셔서 갔던 것뿐이라고. 나머지는 어쩌다 보니.”

힐끗 차인혁을 턱짓하며 대답하는 재이의 말에 아이들이 저희끼리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난 쟤 저 어쩌다 보니.라는 말이 제일 무섭더라.”

“그러게 저게 어쩌다 보니 인지 어쩌나 보자인지 어떻게 알아.”

“분명 다 계획적이었을 거야.”

“저거 꿈이 아이돌이라 다행이지, 아니면 국가전복 꿈꾸는 완전범죄자 같은 거 됐을 듯”

“남궁찬 너는 인터넷 좀 그만해라.”

재이는 그런 녀석들을 흘겨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운 좋게 예상보다 일찍 끝날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네. 한준이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귀찮은 꼴인지. 다음에 만나면 확실히 단속해 둬야지 안 되겠어.’

되도록 가족과 접촉하지 않고 지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바뀐 이상 계획도 수정해야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칠 일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넷째와 전혀 다른 성격이 된 지금의 자신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 보면 아예 소멸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재이는 TV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텝 업 4차 경연] 멘토링의 결과는?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온에어 체크가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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