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370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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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땐 떼로 덤비는 거죠
다음 날
케이엠 사옥 회의실
“음? 한재이 어디 갔어?”
이환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곤 물었다.
그의 옆에 앉아 영상을 체크하던 은규가 대답했다.
“재이? 어, 그러게? 언제 나갔지?”
이환의 말에 은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 사람은 태영기획 데뷔 조와의 첫 번째 경연을 위한 전략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태영기획과의 경연은 세 번의 스테이지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었다. 첫 번째는 노래, 두 번째는 랩과 댄스, 그리고 세 번째는 팀 퍼포먼스로 이루어질 스테이지를 위해 각자 자신 있는 스테이지를 맡아 전략을 짜기로 했다.
보컬 포지션의 세 사람 - 한재이, 이환, 그리고 심은규는 첫 번째 스테이지의 전략을 구상 중이었다.
경연은 제작진이 제시하는 키워드를 보고 연상되는 노래들을 각 팀의 대표자가 하나씩 불러 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방청객의 실시간 투표로 득표수가 더 많은 쪽이 이기는 단순한 구조였다. 다시 말하면 방청객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느냐가 관건이었다.
“그쪽 데뷔조 보컬 담당이 누구라고 했지?”
이환의 말에 은규가 핸드폰으로 전날 찍은 사진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핑크 머리랑 노란 머리. 핑크 머리가 메보, 노란 머리가 섭보래.”
“얘네는 벌써 포지션도 다 정해졌나 보네. 우리보다 빠른 듯.”
부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이환에 은규가 말했다.
“준비 기간도 우리보다 길었다는데 뭐.”
“그래서 그런가. 카메라 돌아가는데 긴장 1도 안 하대?”
“하긴. 너 첫 촬영 때 하곤 비교가 안 되긴 하더라.”
“뭐야 심은규 너도 만만치 않았거든?”
“뭔데? 나 없다고 농땡이 피우고 있었던 거야?”
은규와 이환이 티격태격 하고 있는 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재이가 돌아왔다.
“뭐야 한재이 너야말로 어디 갔다가 이제 기어들어 와?”
“이야 이환, 대사 찰진 거 봐라. 바가지 긁는 마누라 역할 하면 딱이겠는데?”
“시끄럽고. 어디 갔다 온 건데?”
와 이환, 순간 한재인 줄.
옆에서 은규가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재이가 대답했다.
“아. 전화 좀 받느라고.”
재이의 말에 이환과 은규가 멈칫했다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왜? 뭐? 왜? 누구 전환데?”
“네 그 개차반 동생? 또 뭐라고 해?”
“아냐 걔 아니고.”
“아니면 뭐지? 너 혹시 또 혼자 스케줄 잡혔냐?”
“악 뭔데 이번엔 나 데리고 가! 미리 말해두지만 차인혁에게 시드권은 없다!”
가만 놔두니 아주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이환과 은규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잘들 논다.”
재이가 툭 던진 말에 이환과 은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와··· 사람이 걱정을 해 주는데 고마워는 못할망정.”
“아 미안. 그게 걱정이었어? 누구 걱정? 네 걱정?”
재이의 말에 녀석들의 눈이 샐쭉해졌다.
“그래서, 이거 할 거야 안 할 거야?”
재이는 회의실 책상 위에서 뒹굴고 있던 영상 자료를 가리키며 물었다.
“해야지! 너 기다렸잖아. 땡땡이치다 온 주제에 큰소리는!”
“그렇다 그렇다!”
드물게도 이환과 심은규가 한목소리로 재이를 성토했다.
“하여간에. 나 없으면 안 돌아가지 아주.”
“···.”
“···.”
재이의 태연한 중얼거림에 이환과 은규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
두 번째 스테이지를 준비하는 차인혁과 남궁찬, 엠케이와 합류한 건 오후 무렵이었다. 이번 경연은 하루에 세 가지의 무대를 올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빠듯했다.
노래와 랩댄스배틀은 각자 맡은 팀이 대강의 전략만 짜 두고 나머지는 그날 무대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스테이지인 팀 퍼포먼스는 앞의 두 무대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 무대야말로 하나의 팀으로서 얼마나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는가가 승패의 갈림길이 될 터였다.
당일 있을 방청객의 투표뿐 아니라 온에어를 볼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가가 키포인트였다. 앞의 두 스테이지를 아무리 잘했어도 마지막 무대에서의 인상이 흐릿해서야 죽도 밥도 안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포메이션은 이대로 간다고 쳐도 군무파트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이번 경연의 안무를 도와주러 온 댄스 트레이너 김 선생의 물음에 엠케이가 대답했다.
“저쪽은 사픽의 개인 유명세도 무시하지 못할 테니 분명 사픽이 어느 정도 하드캐리 하는 모양새가 될 거예요. 그러면 우린 아예 처음부터 각 잡고 칼군무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떼로 덤비는 거죠.”
그래야 좀 비벼볼 만할걸요.
엠케이의 대답에 옆에 있던 차인혁이 거들었다.
“뭐, 저쪽 멤버들 개개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잠시 말을 멈춘 차인혁이 이어 말했다.
“이쪽은 칼군무 때려 박는다고 보컬이 삐끗하진 않을 거예요. 그치?”
차인혁이 한재이, 이환, 심은규, 즉 보컬 3인방을 차례차례 훑어보며 물었다.
“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
“지금 이건 멕이는건가, 그런 건가.”
“흥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이라 이거야?”
“그래서, 자신 없다고?”
세 사람의 투덜거림에 인혁이 물었다.
“와 저열한 도발.”
“여기서 자신 없다고 하면 우리만 뭐 되는 거잖아.”
“사실 난 문제 없는데, 얘네 둘이 문제지.”
한재이가 툭 내뱉은 말에 이환과 은규가 그를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야 한재이 이 배신자!”
“진짜 저 빼고 다 적인 새끼!”
“저런 거 보면 한재이가 참 일관성 있긴 해.”
“그렇지. 저렇게까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엿 같기가 쉽지 않은데.”
“존경스럽다 진짜.”
김 선생은 묘한 표정으로 한재이와 그를 둘러싸고 투닥대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사이 좋아 보이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다가온 VJ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 예 뭐.”
“감회가 새로우신가봐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VJ가 재차 물어왔다.
“그러게요. 신기하긴 하네요.”
특히 쟤가.
김 선생은 자신에게 헤드록을 건 엠케이를 가볍게 메치면서 주변에서 구경 중인 녀석들에게 뭐라고 성질을 내고 있는 한재이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한재이씨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시다면서요?”
VJ의 말에 김 선생이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개인적 친분이랄 것까진 없는데. 정확히는 저 녀석 큰형님하고 아는 사이인 것뿐이라.”
김 선생이 선을 그었다.
뭔가 더 묻고 싶은 듯 입을 여는 VJ보다 빨리 김 선생이 이어 말했다.
“사실 한재이한테 저런 재능이 있었다는 걸 몰라봤으니 트레이너로서 부끄러울 뿐이죠.”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 대열을 가다듬고 저희끼리 안무의 합을 맞춰보기 시작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한재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김 선생은 생각했다.
‘진짜. 저게 그 한재이랑 동일 인물이라니 누가 믿겠냐고.’
최근 케이엠 소속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한재이라는 존재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를 직접 담당했던 트레이너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그건 재생 불가 폐급이었다고 수군댔지만 그걸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폐급이었던 건 너희들의 안목이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것이야말로 그 말로만 듣던 힘숨찐아니냐는 것에서부터 문 대표가 TVM과의 프로젝트를 띄우기 위해 오래 전부터 깔아둔 밑밥이었다는 이야기까지. 트레이너들 사이에서도 인터넷에서 회자하는 이야기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쟤 때문에 밥그릇 뺏길 뻔 했다고요.”
김 선생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센터 포지션에서 안무의 중심을 잡고 있는 한재이의 모습이 있었다.
“센터를 빼앗기다니.”
휴식시간.
연습실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던 녀석들 중 이환이 중얼거렸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은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야 솔직히 네 얼굴로 센터는 좀 아니지.”
“아 왜 내가 어때서?!”
“음. 못난 건 아닌데 딱히 잘난 것도 없달까?”
“닥쳐라, 심은규.”
“사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중 제일 얼굴빨 서는 건 차인혁이지.”
엠케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차인혁에게 쏠렸다. 다 같이 땀에 푹 절었는데 혼자 화보라도 찍는 듯 땀에 젖은 머리칼까지 그럴듯했다.
“안 돼. 쟤 센터로 넣으면 상혁선배님이 아이돌로 복귀한 줄 알 거야.”
“그래. 차인혁 너는 되도록 존재감 숨기고 옆으로 빠져 있어라.”
“그러면 이번엔 케이엠 신인 남돌 멤버 중에 차상혁 있더라는 카더라 도는 거 아니고?”
“좋아, 차인혁 너는 아예 예명 차상혁으로 가자.”
“선 넘지 아주?”
서늘한 차인혁의 한 마디에 움찔한 녀석들이 타겟을 돌렸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환 네가 센터에 욕심 있는 줄 몰랐다.”
“놔둬라, 사람은 원래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잖냐.”
“허황된 꿈으로 인생 낭비하는 거 보기 안타까워 그러지.”
“와 찐 우정이네. 눈물겹다 엠케이”
“가만 보면 니들이 제일 악질이야. 이리 와.”
이환이 자신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해 도망가는 엠케이와 은규를 쫓아다니다 포기했는지 다시 바닥에 뒹굴 드러누웠다.
“근데 진짜 이게 먹힐까? 난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데?”
“심은규 아무리 봐도 너에게 필요한 건 기초체력이야. 속이 울렁거리는 건 멘탈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냥 니가 안무 소화할 체력이 없어서라니까.”
“와 한재이 팩폭 오지네.”
“그쯤 해 둬라. 심은규 울겠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있던 생수병의 물을 남김없이 다 마신 재이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잠깐. 잠깐만. 우리 인간적으로 조금만 더 쉬자 응? 나 아직 다리 후들거린다고.”
엠케이의 말에 재이가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더 쉬어. 난 다 쉬었거든.”
누구 덕분에 여기서 말리면 덤터기 쓰게 생긴 터라.
한쪽에 앉아 쉬고 있던 인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아이고, 저 무슨 ‘먹고 싶은 대로 시켜, 참고로 난 짜장면’ 같은 발언이냐.”
“아흑 불쌍한 내 인생. 어쩌다가 저런 독종하고 엮여서 삶이 이렇게 고단하냐고.”
재이의 말에 이환과 은규가 삐걱대는 몸을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재이 아까 마지막으로 했던 그 파트부터 다시 가면 안 돼? 나 거기 화음 넣으면서 동작 들어가는 타이밍이 아무래도 불안하거든.”
“거기랑 뒤쪽 후렴구 연결파트도 하나씩 끊어서 좀 가 보자. 난 자꾸 거기서 걸리더라고.”
삭신이 쑤신다며 투덜거릴 땐 언제고 자리에서 일어나선 곧장 재이를 둘러싸고 자신들이 맡은 파트의 확인에 들어간 은규와 이환을 눈으로 좇던 엠케이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어어.”
어느샌가 이미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인혁이 그런 엠케이를 보며 말했다.
“엠케이 오버페이스인 것 같으면 무리하지 마.”
“날 뭐로 보고. 체력은 내가 너보다 낫거든요.”
“그럼 엄살을 피우지 말던가.”
“이익···”
인혁에게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은 엠케이가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말했다.
“근데 남궁찬 얘는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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