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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야 이것 좀 봐봐.”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궁찬이 들어오며 외쳤다.
“뭐야 어디 구석에서 궁상이라도 떨고 있을 줄 알았더니?”
“어 궁상떨려고 나갔던 건 맞는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환의 말에 대꾸하던 남궁찬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핸드폰 영상을 들이밀었다.
[갓영기획에서 남돌로 데뷔하는 법] ⑤ 미안하지만, 이번 무대, 우리가 접수한다!
유튜브 섬네일과 함께 총천연색 염색 머리 군단이 화면에 등장했다. 어제 만난 그 녀석들이었다.
“뭐야 이거? 얘네 유튜브 채널도 있었어?”
“태영기획 열일하네. 구독자 수 좀 봐.”
“어제 얘네 쪽 카메라도 들어와 있었나?”
“아니 근데 누구 마음대로 무대를 접수하겠대??”
남궁찬의 핸드폰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녀석들이 제각각 한 소리씩 쏟아냈다.
“근데 이러면 우리가 불리한 거 아니야?”
“딱히 유불리는 없지 않냐? 인터넷 투표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그래도 방청객 중에 얘들 보러 오시는 분들이 더 많으면.”
“어 그것도 그렇네. 얘네 우리 프로그램 들어가는 거로 이미 언플 많이 하던데.”
“괜찮아. 무대에서 싸그리 씹어먹으면 되니까.”
애초에 그럴 계획이었잖아?
재이의 태연한 말에 다른 녀석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걸 말이라고.”
“내가 이빨 많이 갈아놨다.”
“근데 이거 진짜 이대로 둬도 되는건가? 이거 봐, 이환이 사진 같이 찍자고 하는 거 편집 좀 쎄하잖아?”
“그러게 아무리 이환이가 사심 충만한 상태였다고 해도 그렇지. 하필 클로즈업 해도 저 타이밍이냐고.”
화면엔 이환이 제 손바닥을 쓱쓱 옷에 문질러 하얀 머리색의 황재민에게 다시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물론 대놓고 얼굴이 나오진 않았지만, 오히려 흐릿하게 뭉개놓은 얼굴이 왠지 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편집이었다. 남궁찬의 지적에 엠케이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앗 잠깐. 이거 여기, 그 핑크 머리가 한재이 물고 늘어지는 것도.”
화면에는 [냉랭한 반응에도 꾸준히 말을 걸며 분위기를 돋우려 노력하는 핵인싸 화빈]이라는 자막이 깔려 있었다.
“와 이것이 바로 올려치기를 위한 후려치기.”
“이거 우리 쪽이랑 사전협의 된 건가? 석관이형 어디 계셔?”
“방송국까지 들어와서 찍은 거 보면 이미 얘기된 사항 같은데?”
“와 우리한테도 좀 미리 알려주시지. 그러면 안 저랬을 텐데.”
이환이 못내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황재민에게 굽신거리는 것처럼 편집된 것보다 프라이버시를 핑계로 얼굴을 사정없이 뭉개버린 편집이 더 열 받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런대로 또 싸가지 없다고 까였을걸? 한재이처럼.”
“아우으, 열받아!”
엠케이의 말에 분을 삭이지 못한 이환이 발을 굴렀다.
“근데 이쯤 되면 진짜 대놓고 싸우자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가만히 있는 거야?”
“회사에서 별말 없는 이상 도리 없지 않냐?”
“와 진짜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끌려 나와서 뺨 맞은 기분이야.”
“뭐지 이것도 뭔가 우리가 모르는 대표님의 빅픽쳐인가?”
심은규의 말에 차인혁이 대꾸했다.
“이까짓 걸로 대표님 보고까지 들어갈 것 같냐. 대표님 입장에서 보면 끽해봐야 아직 돈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서 난 잡음일 텐데.”
“아, 뭐야. 왜, 그래도 우리한테 돈 많이 쏟았다며. 이러다 본전도 못 뽑으시면 어쩌려고.”
“못 뽑으면 다른 데서 뽑으면 되지. 회사에 연예인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애초에 우리가 회사 라인업에 들어가기나 하냐.
냉정한 인혁의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흐려졌다.
“뭘 이까짓 걸로 세상 무너진 것 같은 표정 짓고 있냐?”
그간 잠자코 있던 재이의 목소리에 녀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오 어그로전문 한재이 등장.”
“이까짓 거라고 하고 넘어가기엔 좀 너무하잖아. 이건 신의 성실의 원칙 위반이라고.”
“이 바닥에서 신의 성실을 찾다니. 이환 보기보다 순진하네?”
엠케이의 말에 이환이 씩씩대며 대답했다.
“아니 뭐가 어쨌건 나는 얼결에 뺨 맞은 값은 좀 받아내야겠어.”
“네 뺨인지 아무도 모를 텐데? 얼굴 다 뭉개져서 나왔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뭉개진 건 얼굴뿐만이 아니라고. 그 편집은 내 자존심도 같이 뭉개버렸어.”
평소 같았으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이를 시작했을 녀석들이 말없이 이환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닫았다. 다들 말은 안 해도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뭐. 사전영상 풀어도 문제없는 거면 우리도 하면 되잖아?”
재이의 말에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어떻게? 계정이야 이참에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된다 쳐도 우린 찍어놓은 것도 없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어제 그쪽 영상 좀 찍어둘걸.
이환이 씩씩대며 중얼거렸다.
“방송국에 어제 영상 좀 달라고 하는 건 ··· NG인갑네.”
힐끔 VJ 쪽을 바라봤지만, 담당 VJ가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은규가 중얼거렸다.
“걔네 영상이 왜 필요해? 우리 나오기도 바쁜 마당에.”
재이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그쪽 신경 끄고 우리 연습 영상 같은 거나 올리자는 말이야?”
“안 돼. 그 정도로는 내 뭉개진 자존심을 위로할 수 없어.”
“그러게. 그런 정도면 그냥 하나 마나 한 것 같은데?”
녀석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대꾸했다.
“누가 그냥 넘어간대?”
“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말해두지만 폭력은 안 된다.”
“욕도 NG야 알지?”
다른 아이들의 재촉에 재이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려 비죽 웃으며 말했다.
“일단 누가 문구점 좀 다녀와라.”
***
다음 날
“후훗. 생각보다 잘 나왔네.”
“그러게요. 케이엠으로선 약 좀 오르겠는데요.”
“TVM쪽에선 연락 없지?”
“네. 이게 딱히 그쪽에 책잡힐 내용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어쨌거나 후딱 작업해서 올린 보람은 있어. 조회수 추이도 좋고."
태영기획 매니지먼트 5팀 방용훈 팀장은 유튜브 데뷔조 채널에 업로드한 최신영상을 확인하며 스태프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신규 남자 아이돌의 데뷔 프로젝트는 사내에서도 꽤나 주목받는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진골이라 불리는 배우 라인을 제외하곤 자신과 같은 타사 출신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TVM과 케이엠의 합작 프로그램에 한 발 걸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표들 간의 인맥 덕분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가는 순전히 자신의 역량에 달린 것이었다. 여기서 미리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데뷔조 런칭이 눈에 띄게 순조로워질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방용훈은 삼자 합동 회의 스케쥴이 잡히자마자 피디와 케이엠 쪽 홍보 담당자를 구슬려 촬영 동의를 받아냈다. 조건은 프로그램의 스포일러를 하지 않는 것, 케이엠 쪽 연습생들의 초상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용훈에게 그 정도의 제약쯤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영상은 어디까지나 자사 아이돌 데뷔조의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것일 뿐 타사 연습생의 인권을 침해하지도 않았고 아직 방영되지 않은 프로그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지도 않았다.
“제약 조건을 이렇게나 성실하게 지키는 파트너도 드물지. 그럼.”
자화자찬하며 영상 확인을 마친 방용훈은 녹화일까지의 스케줄과 데뷔 준비상황을 하나하나 다시 꼼꼼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스탭의 목소리가 왠지 미묘함을 느끼고 방용훈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무슨 일인데?”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스태프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건네며 말했다. 태블릿에는 유튜브 영상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케이엠 시한부 데뷔조] 팀플에 필요한 건 뭐다?
“뭐야 이게?”
“케이엠 쪽 채널에 올라온 영상인데. 스텝업 애들 거더라고요.”
“걔네 쪽 카메라 들어온 거 없었잖아. 우리 애들 얼굴 나왔어?”
그럼 가만히 안 있지.
방용훈이 잘 걸렸다는 듯 눈을 빛내자 스태프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뇨. 팀장님. 우리 애들 얼굴은 안 나왔는데요.”
“그럼 뭐가 문제야. 저들끼리 찧고 빻는 거야 얼마든지 하라고 해.”
“그게··· 일단 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스태프가 설명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재촉하는 것에 방용훈이 못마땅하다는 듯 영상을 재생했다.
- 여러분 안녕하세요. 드디어! 저희도! 유튜브에 영상 업로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조건부이긴 하지만요.
- 그쵸 여러분도 보이시죠? 여기 시한부라고 써 있는 거.
- 아무리 그래도 시한부가 뭐냐고요. 불길하게.
- 그러니까요! 뭔가 좀 더 산뜻하고 긍정적인 단어 없냐고요.
여섯 명의 녀석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것에 방용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없군.”
영상을 건너뛰며 확인하려던 방용훈이 멈칫했다.
- 자 그럼 오늘의 하이라이트 [트위스터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변 녀석들 보다 작은 체구의 녀석이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다.
트위스터 게임.
룰렛을 돌려서 나온 색과 손발의 조합에 맞춰 바닥에 놓인 색깔 마크를 짚어나가는 게임으로 밸런스를 잡지 못하고 무너지면 지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다만 그 색과 손발의 조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체력싸움의 헬게이트가 열릴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보컬 팀 vs 댄스팀]
디폴트 이펙트로 대충 때려 박은 자막이 지나가고 카메라가 나름 비장해 보이는 네 명의 얼굴을 훑었다.
- 참고로 저는 사회 진행을 맡고 여기 한재이씨는 룰렛을 맡아주시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녀석의 설명에 돌림판을 들고 옆에 서 있던 녀석이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 자 그럼 보컬 팀 갑니다.
핑그르르
- 핑크 가즈아. 핑크!!!
- 아무나 다 오라고 해. 싹 다 밟아주겠어!!!
시작부터 왠지 과열된 듯한 분위기에 방용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룰렛의 화살표가 핑크+왼발에서 멈췄다.
- 오오!! 핑크!!
- 이환 뭉개진 자존심을 달래주고 와!
얄상한 눈매의 녀석이 바닥에 붙어있던 다섯 개의 핑크 동그라미 중 하나를 콱 짓밟았다. 평소 핑크색에 안 좋은 감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핑크 동그라미를 꾹꾹 눌러 밟는 것이 왠지 뭔가 꺼림칙했다.
핑그르르
화살표가 한 바퀴 돌아 이번엔 핑크+왼손에 멈춰 섰다.
- 야아아 핑크 인기 폭발이네!
- 차인혁 가랏!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의 훤칠한 녀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은 네 개의 핑크 동그라미 중 하나를 주먹으로 콱 내리찍었다.
- 어후 저 녀석 진심이야.
- 이상하다 왜 내 두개골이 뻐근한 느낌이지
다른 녀석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도 룰렛은 돌았다.
- 핑크+왼손!
- 또 핑크야?
- 내가 저럴 줄 알았어.
- 한재이한테 룰렛 맡겼을 때부터 예상했어야지.
관전 중인 녀석들의 수군거림을 배경으로 이환이 왼발을 핑크에 고정한 채 남은 두 개의 핑크 중 하나에 왼손을 찹 하고 뻗었다. 손바닥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묘하게 찰지게 울려 퍼졌다.
핑그르르
- 이번에도 핑크일 듯
- 봤냐 지금? 손가락에 힘 조절하는 거.
- 역시 뒤끝 하면 한재이지.
- 이럴 거면 그냥 다 핑크로 깔지 다른 색은 왜 깔았대
- 기왕 하는거 차근차근 다 조져야지 무슨 소리야.
- 핑크+오른발!!!
아이들의 예견처럼 룰렛은 또다시 핑크에 가 멈췄다. 다섯 개의 핑크 중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은 동그라미를 번갈아 바라보던 차인혁이 다리를 쭉 뻗어 가장 먼 곳에 있는 핑크를 콱 짓밟았다.
- 이야 다리 길이 실화냐
- 이환이 자존심 다시 뭉개지는 소리 들리는데
- 이번엔 회복이 힘들겠어.
- 쯧쯧 나무아미타불
- 이환 씨 차인혁 씨 그대로 그 위에서 버티세요! 오오. 두 분 다 생각보다 유연하시네요.
- 엠케이 시끄럽고 빨리 진행!
사회를 맡은 녀석이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도중 한 손 한 발로 힘들게 밸런스를 잡고 있던 이환이 버럭 소리쳤다.
- 아이고 네네. 자 그럼 이제 남궁찬 심은규 합세합니다.
핑그르르
- 노란색+오른발이로군요! 심은규 씨 가세요!
콱.
소심하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인정사정없는 발자국이 노란색 동그라미 위에 내리꽂혔다.
- 이야 골 울리겠다 살살해라
- 그래 그러다가 머리통 깨지겠어.
- 에이 뭘 그냥 종이 동그라미인데.
- 아하하 맞네! 그렇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유쾌하게 웃는 녀석들의 목소리에 방용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내가 뭔갈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뭐지.’
옆에서 방용훈의 표정을 살피던 스태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이 게임 원래 디폴트 색이 빨노초파인데요. 얘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건 핑크, 노랑, 파랑, 주황, 녹색, 흰색이거든요.”
그중에서도 핑크랑 노랑만 중점적으로 조지···아니 깔아 뭉개고 있죠.
스태프가 중얼거렸다.
“그게 뭐 어쨌다고? 색깔 바꿔서 하는 거야 지들 마음···.”
말꼬리를 흐리는 스태프를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내뱉던 방용훈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한번 영상을 살폈다.
“핑크, 노랑, 파랑, 주황, 녹색, 흰색.”
방용훈이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테스트 컷으로 찍어 뒀던 차기 데뷔조 여섯 명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각자의 이미지에 맞게 화려하고 강렬한 색으로 염색한 각기 다른 머리 색깔이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이 건방진 것들.”
방용훈이 이를 갈듯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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