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370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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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어젯 밤 늦게까지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원 없이 고기로 배를 채운 뒤, 재이는 프로그램 종료 후 신세 지고 있던 남궁찬의 집에서 새벽같이 출발해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금의환향이라면 금의환향일 수 있는 귀성길이었지만 사실 그다지 신나는 기분은 아니었다.
- 진짜 갈 거니까 부모님께 말씀 잘 드려 놔
- 너 형 많다며? 형들 방에서 자면 되잖아?
- 안되면 그냥 낑겨자면 되지 뭘
- 아니면 네 동생분 보고 어디 딴 데 가서 좀 주무시라고 해
- 다들 자연스럽게 자고 올 생각인 거냐고
말린다고 들을 녀석들도 아니긴 했지만, 의견이 한쪽으로 우르르 쏠리자 아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부모님께 말씀 드릴 테니 좀 기다리라고 해 봤지만 막무가내였다.
집 나갔던 아들놈이 돌아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이따 오후쯤 다섯 명 더 와서 자고 갈 테니까 그렇게들 아세요.’ 일 거라니.
재이는 골치가 아팠다.
차창을 때리며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부르르르-
부모님 댁에 내려간다고 했더니 가져가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신 남궁찬의 어머니 덕에 묵직해진 가방을 고쳐매며 밖으로 나서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김석관이었다.
“형. 웬일이세요?”
전화를 받자 다급한 목소리의 석관이 말했다.
- 재이야 너 지금 어딨니? 버스에서 내렸어?
“네. 지금 막 내려서 아직 터미널인데요.
- 잘됐다. 잠깐 거기서 기다려. 나 다 와 간다···.
“···네?”
- 도착해서 얘기할 테니까 일단 거기서 기다리라고.
“네에···.”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끊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이른 시간인 데다 날까지 궂어서 그런지 저 말고는 오가는 사람도 없이 조용했다. 인적 드문 시골 터미널,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 낡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조용한 대합실 너머로 빗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와 이러고 있으니 나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 같아.’
사실은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말이지.
재이는 혼자 중얼거리곤 피식 웃었다.
잠시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니 눈에 익은 차량이 터미널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석관의 차였다.
“많이 기다렸냐? 얼른 타라, 젖을라.”
조수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오는 재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석관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예요?”
“어. 그게 말이지. 너 오늘 시간 좀 있냐?”
“네?”
대뜸 묻는 석관의 말에 재이가 반문했다.
“맹 팀장님한테서 몇 시간 전에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말이다. 그쪽 촬영 인원 중 하나에 문제가 생겨서 급하게 대타를 좀 찾고 있다더라고. 아, 그 상혁이 들어간 드라마 말이야.
오늘 하필 다른 작품 로케촬영하고 겹쳐서 액션 팀 쪽에서도 당장 인원 충원하기가 힘들다는데 그때 너 그 상혁이랑 황 선생님이랑 승마 챌린지 했을 때 본 무술 감독님이 혹시 너 시간 되냐고 물어보셨다더라고. 마침 너희 집하고 촬영장, 가깝기도 하고.”
석관의 말을 들은 재이가 말했다.
“저 시간 없으면 어쩌시려고.”
“그러면 너희 부모님 뵙고 무릎이라도 꿇고 허락 맡아서 끌고 가려고 왔지.”
“저 부모님 말씀 듣기 싫어서 가출한 놈인데.”
“집 나왔다가 제 발로 다시 들어가는 모범 청소년이지. 우리 한재이가.”
“형이 이렇게 달변가인줄 지금껏 왜 몰랐죠?”
“맹 팀장님이 어떻게든 너 데려오라고 하셨거든.”
“저 말고도 전문 배우분들 많이 계실 텐데.”
“우리 쪽 사람 한 명이라도 더 꽂을 기회인데 그걸 놓치겠니.”
석관이 대답과 함께 차를 출발시켰다.
“어? 형? 저 아직 한다고 안 했는데?”
“이미 탔으면 끝난 거야. 촬영 금방 끝난다니까 곱게 모셔다드릴게.”
“이거 완전 미성년자 납치잖아요?”
“얼른 집에 전화 드려라. 부모님 기다리실라.”
“음. 사실 오늘 간다고도 아직 말씀 안 드렸는데.”
“너 진짜. 후. 이거 끝나면 나랑 같이 가자.”
“오후에 애들도 오기로 했는데요.”
“누구? 걔들?”
“네.”
“근데 부모님은 아직 너 오는 것도 모르시고?”
“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촬영장으로 가고 있고?”
“그렇죠.”
“왜 일이 꼬이는 것 같지?”
“제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부모님께 연락 먼저 드려라.”
석관의 말에 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차상혁: 오고 있냐?]
“어? 여기 귀신 한 분 계시네.”
재이의 중얼거림에 석관이 그를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누군데?”
“상혁이 형이요. 지금 문자 왔어요. 오고 있냐고.”
“걔도 참. 제 촬영도 바쁠 텐데.”
“그러게요.”
이런 까마득한 후배까지 직접 챙기시고. 진짜 무한한 인기만큼이나 커다란 그 아량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가 있지. 진심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슈퍼스타답다 정말.
달랑 문자 한 줄 받아놓고 찬송가 한 곡을 부르고 있는 한재이를 힐끔 쳐다본 석관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 네 지금 갑니다!
장황한 혼잣말과는 달리 매우 간결하게 답 문자를 보낸 재이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울비치곤 제법 굵어진 빗줄기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 맞다 부모님.”
눈썹을 모으고 잠시 고민하던 재이가 전화 대신 문자 메시지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중충하게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찬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눈이 낫지. 이 추운 날씨에 웬 비란 말인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가족들과 그 다섯이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했다. 이 타이밍에 번개라니. 연출 지리네.
“···하, 인생.”
석관이 힐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인생이 왜?”
“너무 스펙터클 한 것 같아서요.”
“누구는 기를 쓰고 오디션을 보러 다녀도 올까 말까 한 기회가 툭툭 터지니, 그건 그렇지.”
“그 얘기가 아닌데···”
“그럼 뭔데?”
“인생이 생각한 대로 안 풀려서요.”
“허.”
석관이 혀 차는 소리에 재이가 웃으며 물었다.
“왜요. 보세요. 잘하면 본업보다 먼저 배우로 뜨게 생겼잖아요.”
“티저에 실루엣만 잠깐 나오는 엑스트라라고 내가 말 안 했던가?”
“에이 형, 그러다가 제가 이걸로 진짜 빵 뜨면 어쩌시려고.”
“아서라, 김칫국도 그렇게 들이키면 탈 난다.”
“와 꿈도 못 꾸게 하시네.”
“꿈은 나중에 잘 때 혼자 꾸도록 하고.”
“애들한테 말해줘야지. 석관이 형이 말로 사람 후려패더라고.”
구불구불한 오프로드를 따라올라 도착한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고즈넉한 사찰이었다. 촬영 차량이 늘어선 주차장 너머 숲 안쪽에서는 이미 촬영이 진행 중인지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환한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면 대개 있던 촬영도 중단하지 않나?”
“대개는 그렇지. 근데 이게 작감이 첫 촬영 때부터 날짜 세어 가면서 기다리고 있던 날씨라서 말이다.”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가 아니라, 이걸 기다리셨다고요?”
재이는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차상혁의 매니저 맹주찬에게 인사하며 되물었다.
“그래. 티저에 비 오는 거 배경으로 액션씬이 들어갈 예정이거든. 살수차로 뿌려도 되긴 하는데 아무래도 진짜 비 맞으며 찍은 거랑은 분위기가 다르니까. 예보 보고 최대한 일정 맞춰놓긴 했다지만 이 겨울 날씨에 이렇게 제대로 비가 오긴 또 쉽지가 않은데. 여하튼 덕분에 작감은 신났지.”
작감만 신나서 문제지만.
맹주찬이 중얼거렸다.
그냥 야외로케도 힘든데 거기에 비까지 온다. 맹주찬은 제가 그 비를 맞는 것도 아닌데 벌써 뼈마디가 쑤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아직 사전 촬영 단계이니 스케줄을 다시 맞추려면 맞출 수야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단역 하나 빠졌다고 전체 스케줄을 손보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제작진의 고민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티저에 잠깐 나올 단역이긴 한데 그게 주인공의 과거를 함축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나 쓰자니 티저의 퀄리티가 걸리고 이제 와서 빼자니 사후 조율이 골치 아팠다.
“뭐, 덕분에 너는 얻어걸리게 생기지 않았냐.”
맹주찬이 밝은 목소리로 재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예···”
얼굴도 안 나오는 단역 촬영을 위해서 지금 저 비를 다 맞게 생겼는데 어부지리라굽쇼. 아이돌은 이런 거 안 하던데.
재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맹주찬이 말을 이었다.
“왜, 네가 손해 보는 것 같아? 얘가 아직도 이 바닥을 모르네. 너 지금 이 역할도 자기가 하겠다고 손들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나 해? 김 감독님 아니었으면 너한테까지 연락도 안 갔어.”
“어휴 손해라뇨. 기억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손사래를 치며 재이가 대답했다. 좁은 바닥이었다. 아무리 본업하고 상관없대도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인성 글렀다는 소문부터 낼 순 없었다.
“그래서 전 뭘 하면 되는데요?”
재이가 물었다. 그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인 맹주찬이 대답했다.
“일단 송 피디님이랑 정 작가님한테 인사부터 하러 가자. 그다음에 김 감독님한테 들리고. 여기 대본. 너 필요한 부분만 따로 뺐으니 그것만 읽으면 돼. 딱히 대사 같은 거 없으니까 지문 읽고 동선이랑 분위기만 익혀 둬. 나머지는 감독님이 다시 설명해 주실 거다.
리허설 간단하게 마치고 분장 끝내면 아마 바로 촬영 들어갈 거야. 오늘 티저 말고도 비 오는 장면 최대한 많이 딸 것 같으니까 네 부분은 시간 그렇게 많이 안 걸릴 거다. 석관아, 따로 나 찾을 것 없이 네가 잘 챙겨서 데리고 다니다가 끝나면 눈치껏 빠져나가.”
맹주찬이 앞장서 걸으며 석관과 재이에게 당부했다.
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촬영 초반이라 그런지 이른 새벽부터 악천후에 야외촬영을 하고 있음에도 분주히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거···오전 중에 끝낼 수 있을까.’
여기서 내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렇게 된 거 후딱 끝내고 녀석들보다 먼저 집에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고 재이는 생각했다.
***
“이걸 이렇게···요?”
재이는 손에 든 검을 고쳐 쥐고 사선으로 내리그으며 물었다. 무술 감독 김수철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잘하네. 진짜 처음 맞아?”
“아··· 네. 이런 검은 처음인데요.”
재이는 손에 쥐고 있는 환도를 훑어보며 말했다. 저쪽 동네에서 주로 잡던 롱소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진검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말에 타서 아까 한 것처럼 사선으로 내리긋기만 하면 돼.”
어때, 할 수 있겠어?
김 감독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이는 들고 있던 검을 고쳐 쥐고 다시 한번 내리그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럽고 간결해진 동작이었다.
“오, 제법 그럴싸한데?”
“그런가요?”
“사실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우기려고 했는데. 이따가 말 타고도 이쯤 할 수 있으면 욕은 안 먹겠어.”
그거 다행이네요···
재이의 영혼 없는 중얼거림에 김 감독이 이어 말했다.
“그때 내가 직접 보지만 않았어도 너 여기까지 안 불렀다니까. 저기 봐라. 니가 잘 못 하면 송 피디한테 까이기 전에 우리 팀 애들이 나 잡아먹을 거라고.”
김 감독이 어깨너머로 액션 팀 사람들을 힐끗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감독님 괜히 저희한테 떠넘기지 마십쇼.”
“맞습니다. 동훈 선배 연락 받자마자 그럼 그 승마 신동 데리고 와야겠다고. 진짜 기다렸다는듯이.”
“아직 학생이라는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걔 학교 갈 때 버스 대신 말 타고 다녔을 거라고 우기시는데 나 참.”
“이참에 봐서 괜찮으면 액션 팀으로 오라고 꼬셔보자고도 하셨죠?”
“아니 멀쩡하게 제 갈 길 잘 가는 새싹을 굳이 왜 싶다니까? 아이돌 잘하게 생겼구만.”
“그건 네가 쟤 몸놀림을 못 봐서 그렇고.”
“아, 예, 예.”
가벼운 대화가 오가며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그럼 촬영 들어가기 전에 우선 동선부터 좀 확인하자.”
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에 맞춰 액션 팀 인원들도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이는 눈치껏 그들을 따라 바깥으로 이동했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빗줄기에 정신이 확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철컥
손에 쥔 검이 제법 묵직한 소리를 냈다.
왠지 좀 반가운 기분에 재이가 낮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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