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41화 (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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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꿈이라고 해 줘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는 깊은 산속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긴 머리의 청년이 말머리를 뒤로 돌려 끈질기게 따라붙던 추격자들을 마주 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검은 무복과 복면으로 정체를 숨긴 추격자들이 천천히 간격을 좁혀 왔다.

스릉

청년이 검을 뽑아 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 창백한 검신이 번뜩였다.

“컷.”

송 피디의 사인이 떨어졌다. 그와 함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하던 현장이 다시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측으로 한 번 더 갑니다. 한 번에 끝내죠.”

송 피디의 말과 함께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를 뒤로 물리며 화면을 조정했다.

큐사인과 함께 전방 원거리에서 찍은 조금 전 샷과 달리 이번엔 후측 근거리에서부터 카메라가 따라붙는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서로를 마주 본 그 찰나의 순간.

우웅

하얀 궤적이 젖은 공기를 갈랐다.

“컷.”

송 피디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지금 거.’

지금 뭔갈 놓친 것 같은데.

이 바닥 짬 수십 년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송 피디는 지금껏 찍은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살펴 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카메라 감독과 조연출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이게 이렇게 보이지?”

송 피디는 영상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쉴새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속

추격자들에게 포위당한 청년이 내려친 검이 하얗게 빗줄기를 갈랐다.

“최 감독님, 이거 나한테만 튀게 보이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조명 감독이 다가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이상하네. 딱히 거기에 힘 안 줬는데.”

청년이 내리친 검 주변이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다.

“한재이씨 여기 잠깐 좀 와 봐요.”

천막 아래서 액션 팀들과 함께 수건으로 머리를 덮고 있던 앳된 얼굴의 소년이 한달음에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미안한데 잠깐 밖에 서서 아까 한 것처럼 다시 검 좀 내려쳐 볼 수 있어요?”

송 피디의 주문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따로 발검 자세를 잡지도 않았음에도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 감독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저거 진짜 물건이네. 탐난다, 탐나.”

“으음···. 김 감독님, 재이씨 옆에서 같은 동작 한 번만 해 봐 주실래요?”

송 피디의 뜬금없는 말에 김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왜? 나보고 저 비를 맞으라고?”

“재미없는 농담 그만하시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송 피디의 말에 김 감독이 툴툴거리며 팀원 중 하나가 건넨 검을 들고 재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럼 두 분 제가 사인하면 동시에 휘둘러 주세요. 3, 2, 1-”

우웅-

“어?”

“와아”

“호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같이 시작한 동작임에도 재이의 검은 김 감독의 그것보다 훨씬 빨리 땅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송 피디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빗속에서 저 정도 속도로 내리치니 빛 반사가 예상보다 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재이씨 진짜 검도 같은 거 배워본 적 없는 거 맞아요?”

“어···예. 딱히···.”

송 피디는 자신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는 재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김 감독에게 말했다.

“김 감독님 전력 다 한 거 맞아요? 어떻게 한쪽은 빨리 감기인데 한쪽은 느리게 감기야?”

“와 나 억울하네? 야, 재이야 한 번만 더 하자, 어?”

“아···예···”

“됐고. 시간 없으니까. 촬영 다시 하죠. 최 감독님, 내 생각엔 좀 튀긴 해도 이대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조명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그리고. 기왕 온 김에 우리 좀 더 찍고 가죠, 재이씨. 시간 되죠?”

송 피디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째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고.”

재이는 중얼거렸다.

시간은 이미 오후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촬영은 송 피디의 세세한 주문에 맞춰가는 사이 예상했던 것보다 길게 이어졌다. 겨우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다음 촬영으로 넘어가기 위해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석관이 눈치껏 조연출에게 이제 가도 된다는 확인을 받아왔다.

“어서 갈아입고 나와. 감기 걸리겠다.”

이미 다음 촬영 준비로 바쁜 김 감독과 액션 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온 재이에게 커다란 수건을 덮어주며 석관이 말했다. 옆에서 대기 중이던 분장팀 스태프가 능숙하게 가발을 수거해 갔다. 비에 푹 젖은 의상을 반납하고 석관과 둘이 주차장으로 돌아오면서 그제야 재이는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원래 드라마 촬영은 이렇게 정신없는 거예요?”

대체 뭘 어떻게 찍고 계신 건지 감도 안 잡히던데요.

중얼거리는 재이에게 석관이 대답했다.

“대본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면 조금 더 이해가 갔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오늘 우린 그냥 잠깐 대타 뛰러 온 거니까. 그래도 지금 눈도장 찍어 뒀으니 혹시 아냐? 나중에 다른 작품 들어갈 때 너한테도 오디션 보라는 연락 올지.”

“어, 저 정말 대표님이 아이돌 아니고 배우로 노선 변경하래요?”

아이돌 하라고 표 끊어 주신 지 얼마나 됐다고?

재이의 말에 석관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 가능성이나 열어 두잔 얘기지. 요새 많잖아. 겸업.”

“본업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겸업으로 굴릴 생각이신 거냐고요···”

중얼거리는 재이에게 석관이 말했다.

“설마. 당장은 티저에 네 얼굴 한 번만 제대로 비춰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라고.”

“복면 쓰고 있어서 눈밖에 안 나올 텐데요.”

“그래 그럼 네 눈.”

“눈에 힘 빡 줘 볼 걸 그랬나.”

“아서라. 어설프게 덤볐다간 건질 장면도 편집 당한다.”

“그럴 것 같아서 아예 시도도 안 했어요.”

“그래 잘했다.”

칭찬인데 왜 썩 기분이 좋질 않지···

석관의 말에 중얼거린 재이가 조수석에 앉으며 툴툴거렸다.

“완전 손해 본 기분인데요.”

“뭐가?”

“결국 상혁이 형도 못 뵙고.”

“아, 그거.”

차를 출발시키며 석관이 말했다.

“촬영이 밀렸으니 어쩔 수 없지. 상혁이 촬영하는 것도 보고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공부도 할 겸. 시간이 없으니···”

“으악! 맞다!”

석관의 말에 재이가 잊고 있었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내 들곤 전원을 켰다.

“아 제발 누가 이건 꿈이라고 좀 해 줘.”

재이는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속엔 과수원 입구를 배경으로 다섯 명의 얼굴이 들쭉날쭉 찍혀있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

‘진심 과거의 나를 패주고 싶다.’

엠케이는 후회했다.

그냥 심은규랑 이환 꼬셔서 노래방이나 갈걸. 아니면 남궁찬이랑 피시방. 그것도 아니면 건전하게 운동이나 하러 가서 땀이나 뺄 것을. 미쳤다고 한재이네 쳐들어가자고, 기왕 가는 거 빨리 가자고 애들을 닦달했을까.

평소엔 오후 다섯 시나 되어야 눈 뜨는 주제에 오늘 같은 날은 왜 아침 아홉 시도 되기 전에 눈이 떠진 걸까. 어제 먹은 고기에 속이 부대꼈나? 소갈비를 먹어야 했는데 눈치 본다고 돼지갈비를 먹어서 그런가? 대체 뭐가 문제였지 과거의 나?

맹렬한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일단 엎질러진 물, 수습이 먼저였다.

엠케이는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자신들 다섯의 맞은편에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재이의 어머니, 재이의 셋째 형, 그리고 재이의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하하. 재이가 말 안 했다고요.”

한재이 이 자식 중간에 샐 거면 미리 얘길 해 주던가. 서울에서 여기 내려오는데 부산 찍고 오는 것도 아니고 왜 아직도 안 와. 랄까, 보통은 집에 가면 간다고 먼저 얘기부터 하지 않냐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삭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인혁이 대신 말을 이었다.

“중간에 어딜 들렀다 오나 보네요. 저희한텐 오늘 본가에 내려가서 부모님 뵐 거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러면 이참에 모두 다 함께 한 번 놀러 가자는 얘기가 돼서. 근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갑자기 불쑥 찾아뵙게 된 모양새가 돼서 죄송합니다.”

‘와, 차인혁 쉬는 동안 무슨 학원이라도 다닌 거 아님? 언변 쩌네.’

리더 포지션 노리는 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옆을 힐끔 쳐다보자 심은규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감탄과 의혹 섞인 눈초리로 인혁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ㅅ···. 걔랑 연락 안 돼요? 아니 얜 오기로 했으면 후딱 올 것이지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래, 네가 걔구나.’

퉁명스럽게 말하는 곱슬머리를 바라본 엠케이가 눈을 빛냈다. 좀 서늘한 느낌에 힐끔 옆을 바라보니 차인혁이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로 입꼬리만 당겨 웃고 있었다. 왠지 섬뜩한 기분이었다.

“그쪽이 한준 씨군요? 재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걔가요?”

재이랑 하나도 안 닮은 투박한 얼굴의 동생이 얼굴을 콱 찌푸렸다. 덩치로는 어디 가서 누구한테 안 밀리는 인혁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네. 재밌는 분이라고.”

어휴. 두 번 재밌다간 살인 나겠어.

엠케이는 웃는 얼굴과 달리 서늘하게 깔리는 인혁의 목소리에 더 못 참고 끼어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저희 정식으로 인사부터 드릴게요. 어머니도 처음 뵙는 거고 그··· 형제분들도 처음이니까. 원랜 한재이 그 자시···. 재이가 있었으면 이게 더 좀 음. 수월했을 텐데. 상황이 상황이니 뭐 어쩔 수 없죠. 우선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김민국이라고 하는데요. 다들 그냥 엠케이라고 부르거든요. 그러니까 엠케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와 나 엠케이 이름 처음 들어.”

“김민국이 누구야?”

“엠케이가 김민국이래.”

“난 또 미카엘이니 마이크니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평범하잖아.”

나란히 선 녀석들이 일제히 수군거렸다. 아 진짜 정신 사나운 것들.

“그리고 저기 저 왼쪽 끝부터 덩치 제일 큰 녀석이 남궁찬, 그 옆이 이환, 심은규, 그리고 여기 이 잘생긴 놈이 차인혁이라고 합니다.”

엠케이의 재빠른 소개에 아이들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요. 어쨌거나 다들 이렇게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들 했어요.”

어머니의 말씀에 엠케이가 고개를 꾸벅하며 붙임성 좋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이런 곳 처음이라 신기하고 좋은걸요.”

“뭐야. 지금 우리 집이 시골 촌구석이라고 돌려 까는 건가?”

저거구나. 터진 입.

엠케이는 어머니 옆에서 이죽대고 있는 한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준 넌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나가 있어.”

옆에 있던 재이의 셋째 형이 한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미안 얘가 아직 정신을 덜 차려서. 아버지는 지금 시내에 가셔서 저녁에야 오실 테니 괜찮으면 내가 이 주변 구경 좀 시켜줄까 하는데 어때?”

‘어흑 그래도 말 통하는 분이 한 분 계셔서 다행이야.’

엠케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저희야 좋죠. 형님.”

“어머니 그럼 제가 이 친구들 데리고 주변 한 바퀴 돌고 올게요. 집에만 있으면 어색할 테니.”

자신을 태이라고 소개한 셋째 형이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준이 녀석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쟤가 좀.”

“걱정 마세요. 저희도 대충 알고 왔어요, 형님.”

엠케이가 웃으며 대답하자 조금 편해진 표정의 태이가 말했다.

“그때 그 일로 큰형이 내려와서 제대로 잡기는 했는데. 평생 저러고 커서 그런지 쉽게 변하진 않더라고. 그래도 예전보단 나은 편이니까. 그 뒤론 형도 자주 내려와서 보기도 하고.”

이분 덩칫값 못하는 분인가 보네.

생긴 건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이 생기셔서 왜 이렇게 말랑말랑해.

엠케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인혁이 대꾸했다.

“재이가 벼르고 있던데요.”

“재이가?”

“네.”

“···희한하네.”

묘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는 태이의 모습에 엠케이가 물었다.

“진짜로 재이가 동생한테 그렇게 잡혀 살았어요?”

단도직입적인 그 물음에 큰 덩치가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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