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42화 (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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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없는 가족 상봉

“진짜로 재이가 동생한테 그렇게 잡혀 살았어요?”

단도직입적인 그 물음에 큰 덩치가 움찔했다.

“사실 그게 제일 믿기지 않아서요.”

“그러니까요. 한재이 그게 어디 가서 남을 패면 팼지 얻어맞고 다닐 놈이 아닌데.”

“그래서 처음 그 글 올라온 거 봤을 때도 다들 주작이라고.”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믿기지는 않는데요.”

“동생분 덩치 보고 좀 이해가 가긴 했는데.”

“아니 그래도 한재이 그 자식 성격에 덩치 차이 좀 난다고 물어뜯지 않았을 리가···”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냈다. 그 말을 하나씩 듣고 있던 태이가 말했다.

“재이가 집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했거든. 아니 얌전했다기보단. 음···.”

좀 더 맞는 표현이 없을까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을 고른 태이가 이어 말했다.

“보다시피 형제가 많은 집안이라. 재이랑 준이 위로는 나 포함해서 다들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편이라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신 것도 있고. 여기 일이란 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손이 많이 가서 항상 바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알아서 크게 뒀다는 말씀이시네요?”

길게 늘어지는 태이의 말을 인혁이 끊어냈다. 눈앞의 이 형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딱히 길게 듣고 싶은 내용도 아니었다.

결국 나이 차 많이 나는 형님들은 하나둘 독립해서 나가고 부모님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방관하는 동안 그 개차반 동생 놈에게 시달리다 못한 재이가 제 발로 집을 박차고 나왔다는 얘기였다.

집에 돌아가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던 재이의 태도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굳고 분위기가 싸해지자 은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재이 입버릇이 각자도생이었구나.”

그러자 녀석들이 눈치껏 한마디씩 보탰다.

“납득. 나 아니면 적인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이해해. 나도 혼자 컸거든.”

“이환 넌 그냥 외동인 거고.”

“시끄럽다, 남궁찬. 너같이 둥기둥가 받고 자란 고깃집 자식은 헝그리가 뭔지 몰라.”

“나도 굽기만 했지 배 터지게 먹은 건 어제가 처음이거든. 고깃집 자식의 진짜 헝그리가 뭔지 네가 알기나 하냐, 어?”

어느샌가 저희끼리 투닥거리기 시작한 녀석들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한태이가 말했다.

“그래도 방송 보니까 재밌게 지내는 것 같아 보여 다행이더라.”

아... 형님 진심이십니까.

엠케이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스텝 업 열혈 시청자 쪽이 한재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겠네.’

문득 한재이 성격이 저 정도 어긋나고 만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게 다 형님네 거예요?”

남궁찬의 물음에 엠케이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게 펼쳐진 과수원과 그 옆에 자리한 비닐하우스까지. 이 정도면 거의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우와 부럽.”

“일만 많지 뭐.”

“그래도 과일은 실컷 드실 것 같은데요.”

“과일 먹어봐야 배도 안 차는데. 고기면 몰라도.”

“한재이 식성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재이가 고기 좋아한대?”

“없어서 못 먹는다던데요.”

“아 그래?”

왠지 여기서 더 캐봐야 고구마만 줄기줄기 나올 것 같은 예감에 엠케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침 낯익은 차 한 대가 산 아래 과수원 어귀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어? 저거 석관이 형 차잖아?”

“뭐? 어디 어디?”

아이들이 앞다퉈 고개를 빼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공터에 멈춰 선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확인한 이환이 말했다.

“뭐야 쟤 왜 석관이 형이랑 와?”

“이건 냄새가 나는데. 단독 스케줄의 냄새다.”

“네가 고기 냄새 말고도 잘 맡는 게 있다니 놀랍다 남궁찬.”

“아니 근데 그래서 이번엔 왜 또 혼자 갔냐고. 나도 좀 데리고 가지!”

엠케이가 분통 터진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재이랑 같이 출발할걸. 그럼 나도 묻어갈 수 있었을지도.”

“아서라, 너만 먼저 여기로 오는 상황이 발생했을 수도 있어.”

“아 그건 좀.”

“야 한재이 너 뭐 하다가 이제 와!”

은규와 이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옆에서 인혁이 버럭 소리쳤다. 그 외침에 석관과 함께 오르막길을 올라오고 있던 재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너희들 누가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쳐들어오래!”

지지 않고 짱짱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모여있던 다섯이 움찔했다.

“···뭐래! 오늘 간다고 얘기했잖아! 어디 있다가 늦게 온 거야!”

“맞아! 왜 쟤랑 같이 와요! 석관이 형 대답해요!”

이환이 지지 않고 받아치자 엠케이가 덩달아 석관에게 외쳤다.

“가서 얘기해, 가서!”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찬 석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새를 못 기다리고 우르르 두 사람이 올라오고 있는 길을 거꾸로 내려갔다.

몇몇은 재이의 목에 태클을 걸고 발길질을 하려다가 도로 얻어맞으면서도 뭐라 뭐라 투닥거리고 몇몇은 그와 함께 길을 올라오던 석관을 둘러싸고 떠들어 대는 통에 조용했던 시골길이 금세 와글와글 시끌벅적해졌다.

얼결에 혼자 남겨진 한태이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거의 나, 보고 있냐.’

엠케이는 후회했다.

핸드폰 꺼내 놓을걸. 지금에라도 좀 찍겠다고 할까. 앞자리 말고 뒷자리 앉을걸. 괜히 앞자리 맨 앞줄 고집했다가 눈치만 보이잖아. 차인혁 남궁찬 저 자식들이 나만큼 눈치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이환아 은규야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냐. 용기 있게 손들고 좀 찍겠다고 하면 안 되겠니. 하긴 그래 너희들도 목숨은 하나인데 한재이가 무섭긴 하겠지. 아아 그렇지만 이 절호의 찬스를 이대로 놓치다니. 아까워 아깝다고오.

엠케이는 치밀어오르는 맹렬한 후회에 괜스레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마룻바닥에 앉은 익숙지 않은 자세에 무릎 아래로 이미 감각이 둔했다.

이대로라면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 지옥을 맛보겠지. 지금에라도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일어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자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놓칠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녹화가 물 건너간 이 상황에 라이브까지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게 분명했다.

눈앞에선 막장의 냄새가 나는 한씨 집안의 본격적인 가족 상봉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과수원을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들어오자 시내에 나가셨다는 아버지가 소문의 큰형님과 함께 돌아와 계셨다. 부모님께도 내려간단 말을 안 한 재이가 큰형님께는 미리 알려뒀던 모양인지 큰형님도 휴가를 내고 내려오신 참이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 큰형님 앞에 공손히 앉아있는 한재이라니. 이건 진짜 사진이라도 찍어 둬야 하는 건데.

그 개차반 동생 놈은 셋째 형님이 이미 눈치껏 끌고 나간 뒤였다. 셋째 형님이 물렁하긴 해도 대가족 중간서열의 짬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이런 상황에서의 눈치 하나는 끝내줬다.

물론 그런 눈치 따위 애초에 챙겨오지도 않은 자신을 포함한 외부인 다섯은 아버지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핑계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세기의 가족 상봉을 실시간 감상 중이었다.

“잘 지낸 모양이구나.”

오, 아버지. 집 나갔다가 근 2년 만에 처음 들어온다는 아들 녀석에게 건네는 인사말치곤 투머치 건조합니다만. 아들이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있으면 그중 하나쯤 들락날락하는 건 보이지도 않게 되는 건가요.

“네.”

나 저런 단답형 한재이 처음 봐. 거기서 왜 들이받지 않지? 너 그렇게 얌전한 애 아니잖아. 힐끔 옆에 앉은 이환과 은규의 표정을 살피니 그들 또한 자신의 생각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이 아니었으면 소식도 모르고 살 뻔했잖니. 어쩜 이렇게 매정해.”

“형님이 말씀드렸겠지 했죠.”

어머니의 잔소리에 무심하게 내뱉는 말투가 낯설었다. 한재이 말투가 원래 재수없는 편이긴 하지만 자신들에게 툭툭 던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건조했다.

엠케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살다 보니 한재이의 신기한 모습을 다 본다는 방정맞은 감상 대신 어느새 불편한 무언가가 가슴께를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연락을 한 번 안 하니.”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으셨을 것 같아서.

어쩐지 재이가 하지 않은 뒷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엠케이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보세요. 재이 포기 안 할 거라고 했잖습니까.”

그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큰형님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아버지가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본 큰형님이 이어 말했다.

“그래도 네가 먼저 집에 들러 준 건 고맙다.”

“계약해야 돼서요.”

“고얀 녀석. 저 필요할 때만 찾는 거냐.”

재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는 아버지의 모습에 엠케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한재이 어그로 실력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설마 아버지였나. 제가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엠케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하십니까. 케이엠 엔터테인먼트 김석관이라고 합니다. 큰형님과는 몇 번 연락 주고받았는데 이렇게 부모님을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진작에 찾아뵈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타이밍 좋게 재이의 옆에 앉아있던 석관이 끼어들었다.

“재이가 신세 지고 있다고요. 쟤가 숫기도 없고 마음도 약한 편이라.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크흠. 흠. 아. 네. 네.”

어머니의 말씀에 석관이 당황해 말을 더듬는 것과 동시에 엠케이를 포함한 다섯 명이 들썩거렸다. 의아한 표정의 어머니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니요, 어머니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숫기 없고 심약한 댁의 넷째 아드님에게 움쩍달싹 못 하고 콱 잡혀 산 저희가 어디 인간이겠습니까. 저희는 그냥 이산화 탄소 뿜는 관엽수라고 생각하시고 나누던 말씀 마저 하세요.

“친구들도 와 있는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아니요. 아버지 저흰 괜찮으니까 그냥 지금 다 하세요. 이걸 뭘 또 따로 더 해요. 그러다 애 숨 막혀 죽겠어요.

엠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붙임성있게 웃어 보였다.

“저희는 정말 괜찮은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국이라고 했죠? 말하는 게 어쩜 하나같이 그렇게 싹싹하니 예쁠까. 우리 아들 중엔 그런 녀석이 없어서. 재이가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네요.”

훗. 이건 좀.

들었냐.

한재이 들었냐고!

싹싹하고 예쁘게 말하는 법 좀 배우라신다!

엠케이가 의기양양하게 재이를 쳐다보는데 그 눈빛을 무심히 넘긴 재이가 다른 녀석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민국이가 누구야?”

그 말에 엠케이 옆에 있던 녀석들이 태연한 얼굴로 하나둘 말을 보탰다.

“그러게. 민국이가 누구냐?”

“글쎄. 남궁찬 너 혹시 알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성이 김 씨면 웃기겠다야. 케이엠케이. 무슨 회사 공식봇 같잖아.”

“개노잼. 노린 것 치곤 평타도 안 나오겠는데?”

이것들이 진짜.

엠케이가 분통을 터뜨리려는데 큰형 한다이가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지?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못 먹어서야 말이 안 되지. 아버지, 제가 이 친구들 데리고 나가서 저녁 좀 먹여서 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거라.”

“매니저님도 같이 가시죠?”

“아, 예. 감사합니다.”

“나가면서 태이랑 준이도 챙겨 가고.”

“걔네는 알아서 먹으라고 하세요. 저희끼리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가 덧붙인 말에 큰형님이 간결하게 딱 잘라 말했다. 큰형님 나이스 단호박. 셋째 형님은 그렇다 쳐도 그쪽 개차반 씨랑 같이 밥 먹다간 백 퍼센트 체할 각이었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이 형님 감사합니다! 저흰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특히 고기를 잘 먹습니다.”

“참고로 어젠 돼지갈비를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또 먹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제 고기를 먹었더니 오늘 고기를 안 먹으면 배탈이 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녀석들이 기다렸다는 듯 앞다퉈 말을 보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럼 고기 먹으러 가자.”

“오오오!! 만세!”

“큰형님 대인배!!”

“미리 잘 먹겠습니다!”

한 다이의 흔쾌한 대답에 녀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일어났다. 재이 또한 석관과 함께 부모님께 꾸벅 인사하곤 일행을 따라나섰다.

***

“그래서, 나보고 지금 너한테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하라는 얘기야?”

“그것도 좋은데? 그럼 일단 꿇어 봐.”

“이게 진짜!”

야심한 시각.

어둠이 내려앉은 공터에서 재이를 노려보며 이를 갈듯 내뱉은 한준은 태연한 목소리로 자신을 도발하는 재이의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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