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 3715922
#
내가 누군 것 같아
한준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재이는 항상 자신보다 아래였다. 물론 태어난 날은 저보다 몇 달 앞섰지만, 그 녀석이 저 보다 잘난 건 그거 딱 하나뿐이었다. 키도 몸무게도 힘도 모든 것에서 한재이는 자신과 비교가 되질 않았다. 그랬는데.
“헉. 허억. 야아아!!!”
기세 좋게 달려갔지만, 이번에도 헛손질이었다. 그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다더니 무슨 연습을 어떻게 한 건지 기를 쓰고 달려가 후려치려고 해도 번번이 헛수고일 뿐이었다. 멱살이라도 잡아 올리려고 뛰어들어봐도 멱살은커녕 녀석의 옷자락 하나 제대로 쥘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도 전에 열 뻗쳐서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어디서 요리조리 피하는 법만 배워와서!!···헉!”
다시 간격을 벌리며 뒤로 빠지려는 녀석을 잡으려 달려드는데 녀석이 몸을 비틀어 빼며 갑자기 발을 걸어왔다. 허를 찔린 움직임에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에 걸려 바닥으로 처박혔다.
“야 이 씨!”
“왜. 무릎 꿇겠다고 해서 도와줬더니?”
흙바닥에 구른 채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며 버럭 소리치자 여유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아니 근데 저게 진짜 뭘 잘못 먹었나!
한준은 기를 쓰고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재이의 교묘한 발놀림에 번번이 땅을 굴러야 했다. 자신은 이미 흙투성이 땀범벅이었는데 저 한재이 자식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마치 밤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게 넌 대체 왜 이 밤중에 혼자 땅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느냐는 듯 무심한 눈빛이었다.
“헉 헉.. 야, 너. 딱 기다려. 이 쥐새끼 같은 놈. 너 나한테 아주. 헉 헉.”
턱 끝까지 숨이 차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는 것이 억울했다. 한준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일단 숨을 골랐다.
'한재이 개새끼 거기서 딱 기다려라, 내가 조금만 쉬고. 잠깐 숨 돌리고 다시 가서 이번에야말로 너 이 새끼 가만히 안 둔다···.'
한준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코앞으로 스윽. 그림자가 들어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한재이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곤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간단하게 멱살을 쥐어 잡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어째선지 한준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저 눈.
등골이 오싹했다.
한재이의 검은 눈동자가 캄캄한 밤 낡은 조명 밑에서 번뜩였다. 지금껏 한재이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저 소심하고 나약한 한재이 새끼가 꼭지 돈 한다이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날이 있으리라곤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머리는 믿을 수 없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본능이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했다.
“···왜···왜···”
어이없게도 말이 자꾸 헛돌았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을 그저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자칫 잘못하면 산 채로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한준.”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한준은 움찔 몸을 떨었다. 뒤늦게 자신이 한재이의 한 마디에 쫄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지금의 자신은 저 녀석을 들이받을 수도 달려들 수도 없었다.
“정도껏 하자. 응?”
한재이가 말했다.
평소 같으면 어디서 헛소리냐고 인상부터 썼을 텐데 여전히 자신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에 한준은 그야말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뭐···”
겨우 한마디 쥐어짜 낸 게 고작이었다.
“그냥 조용히 살자고.”
한재이가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나나 너. 서로 피도 안 섞인 남인데. 자꾸 얽히지 말고 각자 갈 길 가자고.”
귀찮게 하지 말고.
한재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새끼가 어디서 감히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치솟았지만 한준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후려 패 주고 싶은 마음과 달리 꾹 쥔 주먹이 덜덜 떨려왔다.
이럴 리가 없었다.
눈앞의 한재이는 자신이 아는 한재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 마디에 벌벌 떨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그 한재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모르는 누군가가 한재이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 너··· 누구야?”
겨우 쥐어짜 내어 묻자 한재이가 소리 없이 웃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웃음을 짓는 한재이의 눈동자가 어두운 밤빛 속에서 일순 번뜩였다.
“넌 내가 누군 것 같아?”
***
다음 날.
“준이 녀석이랑 한 판 하는 줄 알고 걱정했더니.”
이제는 습관이 된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던 재이는 등 뒤에서 들려온 큰형 다이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제가 앤가요. 말로 좋게 타일렀죠.”
그런 재이의 말에 다이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이 말로 좋게 타이른다고 들을 놈이었으면.”
애초에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다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재이가 웃었다.
“그래도 그동안 형이 신경 써 주신 덕에 사람 좀 된 것 같던데요?”
“어떻게 클수록 저런 망종이 돼서는. 너한테는 정말 면목이 없다.”
“괜찮아요. 앞으론 별일 없을 거예요.”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말에 다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 있어 보이는데.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길래?”
“그냥요. 알아듣게 잘 얘기했죠. 원래 진실한 마음의 대화는 통하는 법이라잖아요.”
“···뭐, 일단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다만. 무슨 일 있으면 쌓아두지 말고 나한테 바로 얘기해라.”
자신에게 씩 웃어 보이는 재이의 웃음에 그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이가 그래도 못 미더운지 당부의 말을 했다.
“일은 할 만하냐? 네 그 팀 녀석들하고 사이는 괜찮고?”
다이가 화제를 바꿨다.
염려 섞인 그 말투에 재이가 짧게 웃었다.
“그럭저럭요. 저 없으면 안 굴러가는지라.”
“···하.”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는 듯 다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재이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한준이도 그 말 하던데. 제가 그렇게 다른 사람 같아요?”
재이가 되물었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재이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다이가 대답했다.
“어.”
재이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런데.”
그 얼굴을 바라보며 다이가 이어 말했다.
“나쁘지 않아. 내가 아는 한재이도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기도 했고. 방송 보고 사실 생각이 많았다.”
다이가 짧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쭉 원하는 대로 살아 봐. 한재이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다.”
집 신경 쓰지 말고.
다이의 말에 재이가 웃었다. 어딘지 후련한 듯 환한 웃음이었다.
“근데 다른 녀석들은 다들 어딜 간 거야?”
다이의 물음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같이 조깅 하겠다더니 태이 형이 비닐하우스 손보러 간단 말에 거기 몰려갔어요. 딸기라도 얻어먹으러 갔겠죠.”
안 봐도 뻔하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재이에게 다이가 말했다.
“넌 안 가 봐도 돼?”
“딱히. 거기 가 봐야 일밖에 더하나요.”
“하긴.”
과일 따위 관심도 환상도 없는 과수원 집 아들 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나 재이의 예상과는 달리 그 ‘다른 녀석들’은 과수원 체험 대신 다른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
엠케이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물었다.
애당초 여기까지 내려온 게 저 개차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과 형님들 앞에서 마지못해 붙여주고 있던 존칭도 갖다 던져버렸다. 자신의 경험상 저런 종류의 인간들 하곤 사실 말 섞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그렇지만 상대는 한재이의 호적상 동생.
그동안 한재이에게 얻어먹은 밥을 생각하면 잠시의 시간 낭비는 묵과할 정도의 아량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저 개차반 같은 놈이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면 이참에 미리 싹을 잘라두는 것이 좋았다.
등 뒤에 서 있는 차인혁과 남궁찬의 키가 오늘만큼 든든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양옆에 서 있는 이환과 심은규 또한 여차하면 방패막이로 쓸 작정이었다.
“그 새···. 아니 한재이가 좀 이상하지 않더냐고.”
‘···뭐? 아침부터 뭘 잘못 먹고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엠케이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이환이 대답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야.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정확하게 물어봐. 어물거리지 말고. 우리가 니네 가족들처럼 니가 병신같이 지껄여도 알아듣고 우쭈쭈 해줄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이환, 그래. 한재이에 가려있지만, 너도 사실 한 주둥이 한다는 걸 내가 깜박하고 있었다. 엠케이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눈앞에 선 개차반이 발끈하다가 등 뒤의 차인혁과 남궁찬을 힐끔하곤 나직이 한숨을 내뱉는 것이 보였다.
“에이 씨. 너희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걔가 그런 애가 아니라고. 사람이 확 뒤바뀐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뭐에 씌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뭐 그런 느낌, 너희들은 못 느꼈냐고.”
개차반 놈의 말에 이번엔 다른 쪽에 서 있던 은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뭐라는 거야. 지금 하다못해 영혼체인지 뭐 이런 썰 밀어보려고 하는 거야?”
“신박하긴 하다, 야. 대체 그런 생각은 어떤 머리 구조를 가지면 떠올릴 수 있는 거냐? 뇌가 민무늬라도 되는 거야?”
이환이 거들었다. 발끈한 개차반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진짜라니까. 그 새끼 어제 눈 돌아가선 지 입으로 불었다고!”
“재이가 뭐랬는데?”
“그보다 너 어젯밤에 재이 불러냈냐?”
“잠이나 쳐 잘 것이지 왜 밤중에 애는 불러내?”
“걔 어제 스케줄도 뛰고 와서 피곤했을 텐데.”
“아 단독 스케줄. 그건 생각하니 열 받네.”
자신과 대치하듯 모여 서 있던 녀석들이 한꺼번에 한마디씩 쏟아내는 통에 멍하니 듣고 있던 한준이 뒤늦게 버럭 외쳤다.
“진짜라고! 제 입으로 그랬다고! 지가 한재이 몸 차지하고 들어앉은 거라고!”
“···얘 지금 뭐라니?”
“흥미로운데. 계속해봐.”
“그래서? 그 한재이한테 씌인 귀신이 뭐랬는데?”
“···자, 자기가 사람 동물 할 것 없이 수백 수천 셀 수 없이 죽여 본 인간이라고. 허튼짓하면 너도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주겠다고.”
“귀신에서 다시 인간 됐네.”
“자 다음 환자분?”
“저 정도면 소설 써도 되겠는데?”
“인정. 재능을 저렇게 썩히고 있네.”
“한재이 진짜 연기에 소질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했길래 저걸 믿지.”
“미친 소리 같지만 진짜였다고! 인간 아닌 것들도 자기한테 걸리면 곡소리도 못 내고 도망갔는데 너도 원하면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눈깔이 뒤집혀서 노려보는데···”
“인간 아닌 거 뭐. 용이라도 잡았다고 하디?”
차인혁의 물음에 한준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그 표정에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녀석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허. 거 참.”
“한재이가 잘못했네. 애를 놀려도 어떻게.”
“재재님이 좀 무적이긴 하지.”
“그래도 그렇지, 그걸 믿다니.”
“한재이 배우포텐 엉뚱한 데 쏟은 거 아니냐.”
"에이 씨발 진짜라니까!!!"
다른 녀석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실실거리고 있던 차인혁이 고개를 돌려 한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게 거짓말인 듯 딱딱하고 위압적인 시선이었다.
“그쯤 해 두지. 흉한데.”
옆에 선 엠케이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간 나면 재재님으로 유튜브 검색이나 좀 해 봐.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엠케이가 이어 말했다.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좀 그래라. 집에서 한재이만 파지 말고. 내가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고깝게 들지 말고 새겨들어, 응?”
‘어차피 믿어줄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 그 자식하고 같이 사는 놈들이 정상일 리가 없잖아.’
한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억울했는데 어디다 풀 길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말해봤자 저놈들처럼 자기만 미친놈 취급 받고 끝날 게 뻔했다.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흙바닥의 잡초만 발끝으로 짓이겨 뭉갰다.
“어? 석관이 형이잖아?”
그런 한준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은규가 한준의 등 너머로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석관을 발견하고 말했다.
“형도 아침부터 조깅이예요?”
“한참 찾았잖아. 다들 어디 가 있던 거야?”
잠시 헉헉대며 숨을 고른 석관이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이 한재이 동생분과 창의적이고 신선한 대화를 좀 나누고 있었죠.”
한준이 석관을 돌아보고는 움찔해서 고개를 꾸벅했다. 저격 글을 게시판에 올린 뒤 며칠 후 걸려온 전화에서 자신을 고소하겠다며 차분한 말투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나하나 짚어주던 그 사람이었다.
별 볼 일 없이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저 사람과 통화하고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큰형과 한재이가 뜯어말려서 대충 지나갔다는 말에 잊고 있었는데 실제로 얼굴을 보니 그때 기억이 떠올라 불편했다.
석관은 그런 한준을 힐끔 쳐다보곤 그대로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컨셉회의 일정 잡혔다. 너희들도 참가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힌 모양이니까 일단 짐 챙겨서 올라가자."
석관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본격적인 준비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