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44화 (4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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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고 싶던 것

“··· 이상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구축해 놓은 이미지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컨셉으로 로드맵을 구축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기획팀의 의견입니다.”

“효율성만을 따지는 것이 과연 이상적인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상만을 추구하다 현실감을 잃게 되는 것보다는 낫죠”

“단기적인 성과와 효율이 꼭 장기적 수익창출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겠지?”

“low hanging fruits의 회수도 안 되는 계획으로는 장기적인 수익 창출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심 팀장, 우리가 물건을 파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데이터만 들이밀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물건이 아니기에 더더욱 데이터에 기반한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사님 말씀대로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을 때 폐기하면 그만인 물건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아이들 여섯의 인생이 걸린 일입니다.”

“자네들과 나의 커리어도 달려있고 말이지.”

‘와, 불꽃 튀네···’

재이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구경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획본부 장태우 이사의 주재로 열리고 있는 런칭프로젝트 컨셉회의에서는 장 이사와 신인기획팀 심진우 팀장 간에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코라는 별명답게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을 가장 믿는 장 이사와 달리 심 팀장과 그 팀원들은 제 상사의 ‘감’보다는 눈에 보이는 데이터를 신뢰하는 듯했다.

‘장 이사님도 재밌는 분이시네. 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밑의 직원들은 분석가들만 모아두셨다니.’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아시는구만···

덕분에 회의만 난항이었다.

신인기획팀이 올린 컨셉들이 너무 무난하고 수동적이라는 것이 장 이사의 견해였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 대박은커녕 결과는 쪽박일 거라는 장 이사의 코멘트에 심 팀장은 장 이사의 감만 믿다가 망한 케이스들을 열거하며 반박했다. 상사와 부하라는 관계를 떠난 난장 토론에 회의장 구석에서 참관하고 있던 여섯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야, 아무리 그래도 직속 상사인데. 체면이고 뭐고 없이 받아버리네.”

“심 팀장님 아무래도 한두 번 들이받아 본 솜씨가 아닌데?”

“나도 좀 배우고 싶다. 저 스킬.”

“배워서 뭐 하려고?”

“한재이 들이받고 싶을 때 좀 쓰게.”

“왜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내 눈엔 하나같이 너무 무난한 것 같은데.”

수세에 몰린 장 이사가 회의실 한쪽에 앉아있던 AR1 팀의 장세은 팀장과 비주얼 디렉터 윤효민 실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케이엠의 간판스타 차상혁의 곡 전반을 담당하며 회사의 음악적 기조를 아우르는 실세 중 한 명인 장세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아무리 시장에서 검증된 컨셉이라곤 해도 이미 트렌드에 들었던 컨셉을 다시 차용하는건 실패리스크가 좀 커보이네요.”

장 이사가 보란 듯이 팀원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장세은이 이어 말했다.

“근데 장 이사님이 생각하신 그 컨셉은 또 너무 나간 것 같고요.”

세계평화 아이돌이 뭐냐고요.

그런 거 요새 애기들도 안 먹어요.

“윤 실장 보기엔 어때?”

장 이사가 물었다.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스텝 업에서 쌓아온 이미지를 살리는 건 찬성이에요. 그러자고 투자한 거잖아요? 근데 기획팀 제안들이 좀 식상한 것도 사실은 사실이예요. 사골국이란 게 잘 뽑으면 맛있다지만 그렇게 따지면야 잘 뽑으면 뭐든 안 맛있겠냐고요.”

잠시 말을 멈춘 윤효민이 문득 회의실을 돌아보고 물었다.

“본인들 생각은 어떤지 좀 물어볼까요?”

여기서 이렇게 던지시나.

재이를 비롯한 여섯 명이 갑자기 쏠린 시선에 자세를 바로 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어차피 결정은 사장님이 하실 거니까. 그냥 아이스브레이킹 한다고 생각하면 돼.”

아이들의 얼굴에 서린 긴장감을 읽은 심진우가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

“그래. 이대로 있다간 이사님하고 심 팀장님 멱살 잡고 싸울 것 같으니까 잠깐 쉬어가자고. 생각했던 거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돼.”

장세은이 이어 말했다. 옆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던 윤효민이 덧붙였다.

“혹시 아냐? 비제이처럼 자기가 던진 아이디어로 데뷔하게 될지.”

선배 아이돌 그룹 네버로스의 리더 비제이의 이야기에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윤효민이 웃으며 말했다.

“데뷔부터 컨셉회의에 당사자들 부르는 건 케이엠 전통이라. 너희들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신인인 경우엔 대부분은 그냥 참관형식이긴 한데, 개중에는 진짜 본인들이 낸 아이디어가 채택돼서 쓰인 적도 꽤 있어. 비제이처럼.”

“그럼 그 소문이 진짜예요? 그룹명 보고드렸을 때 사장님이 마음에 들어서 비제이 선배님한테 금일봉 주셨다는 거.”

“아 그거? 진짜긴 해. 조금 오해가 있긴 했지만.”

비제이가 제안한 그룹명 네버로스를 문선일 대표가 마음에 들어 해서 그 자리에서 보너스를 줬다는 것은 이쪽에선 꽤 유명한 일화였다. 비제이로서는 단 한 명의 멤버도, 단 하나의 팬도 잃지 않겠다는 나름 비장한 각오를 담아 제안한 이름이었지만 문 대표는 절대로 손실은 보지 않겠다는 금전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좋아했다는 풍문이었다.

“본인들 데뷔 컨셉으로 생각해 봤던 것 있어?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 뭐 그런 정도여도 좋은데.”

심진우가 재촉했다. 그로서는 마음이 바빴다. 어서 결재받아 사장단 회의까지 통과시켜야 구체적인 업무가 돌아갈 터였다. 초반부터 장 이사와의 기 싸움에 진을 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저 말씀 드려도 됩니까.”

재이가 손을 들었다. 회의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재이에게 쏠렸다.

“말해봐. 말해봐.”

장세은의 재촉에 재이가 입을 열었다.

“세계평화 아이돌 같은 거 저는 좋은 것 같은데요.”

“그렇지, 한재이. 역시 너는 내 과 일줄 알았다.”

멀찍이 회의실 상석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장 이사가 옳다구나 하고 맞장구를 쳤다.

“하아. 이사님 라인이 하나 더 추가되다니.”

“재이야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더 얘기해 볼래?”

심진우의 한탄을 한 귀로 흘리며 장세은이 물었다.

“어차피 베이스는 심 팀장님 말씀대로 갈 거잖아요. 그 위에 잡을 특이점을 뭐로 하느냐가 문제라면 결국 기발함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말씀이고요.”

“그렇지. 그리고 거기서 부딪치게 되는 것이 바로 소재 고갈의 벽인 거지.”

윤효민이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아이돌 시장이 괜히 레드오션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그룹 중 살아남는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 그마저도 5년을 넘기기 힘들었다. 그 수많은 그룹이 이제껏 낸 아이디어가 한둘이었겠는가.

그룹 본연의 실력이야 당연한 이야기이고 독창적인 기획력, 그것을 시장에서 선도시킬 수 있는 자금력, 거기에 운까지 받쳐줘야 겨우 승부를 걸어볼 기회가 보이는 게 이 바닥이었다.

특히 대중적 관심이 다른 장르로 많이 분산된 최근의 시장 상황에서 대중성 잡겠다고 무작정 무난한 코드로 나갔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엎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엔 초반 어그로를 확 끌어올려 코어팬덤을 구축하는 쪽이 오히려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 때 대중이 외면한 아이돌이 홀로 장수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어느 타이밍에서건 타협은 필요하겠지만 최초 화력을 끌어모아야 할 때 눈 딱 감고 어그로를 끌어보는 것은 하나의 전략이긴 했다.

물론 삐끗하면 영락없는 쪽박 신세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계평화는 너무 무 뜬금···”

“그러게. 무슨 UN 홍보대사도 아니고···”

“너무 멀리 나가서 배웅도 힘들다 야.”

“스토리텔링만 잘하면 괜찮지 않아?”

“그게 잘하기가 힘드니까 문제잖아. 그거 성공한 그룹이 몇이나 된다고.”

“없는 건 아니잖아.”

“많지도 않지. 그거 들고 뛰어들기엔 위험부담이···”

“다른 건 위험부담 없을 것 같고?”

“아니 솔직히 난 그냥 그 세계평화 컨셉이 좀 벅차···.”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재이가 그런 그들을 힐끔 쳐다보곤 다시 말했다.

“꼭 세계평화가 아니더라도 뭐. 있잖습니까. 게임에 나오는 파티라던가 길드라던가.”

“파티?”

“길드?”

심드렁하던 장세은과 심진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윤효민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네. 뭐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파티.”

“와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하지?”

“나 소름 돋았잖아.”

“그거 재밌는데? 조금 더 해 봐.”

장 이사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당겨 앉으며 말했다.

“예를 들면··· 저기 남궁찬은 생긴 것부터 딱 탱커삘 나니까 격투가 포지션이라고 치면, 차인혁은 근딜 검사, 이환은 원딜 마법사, 심은규는 원딜겸 힐러, 그리고 엠케이는.”

“나는? 나는??”

엠케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재촉했다.

“음. 씨프?”

“···도둑이냐.”

“탱커 하나에 근딜 둘, 원딜 하나, 힐러 하나. 딱이네 딱이야.”

“그럼 너는 뭔데?”

인혁이 묻는 말에 재이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음유시인?”

“흑막이 더 잘 어울리는데.”

“나중에 파티원들 등에 칼 꽂는?”

“와 근데 그거 너무 꿈도 희망도 없잖아?”

“요새는 피폐가 대세래.”

“음유시인보다 잘 어울리는 건 인정.”

아이들이 신나서 웅성거렸다.

“신선한데? 다들 어때?”

장 이사가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좀 병맛···. 흠. 매니악 한 것 같긴 한데···. 이쪽으로 가면 대중성은 아예 포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진우의 말에 윤효민이 대답했다.

“흥미 돋긴 하는데요? 게임 모티브라고 생각하면 요새 드라마나 서브컬쳐 쪽에서도 다루기 시작한 소재이니 예전보다 대중적 수용성이 많이 떨어질 것 같지도 않고요. 잘만 살리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장 팀장님 생각은 어때요?”

윤효민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장세은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컨셉을 그렇게 확 코어로 잡아버리면 곡도 그쪽으로 완전히 틀지 않는 이상 밸런스 잡기가 되게 힘든데. 잘못하면 그대로 망테크라고.”

“그렇다고 곡까지 코어타겟으로 틀어버리면 아이돌 런칭이 아니라 게임 런칭 하는 줄 알 테죠.”

“곡과 비주얼 모두 밸런스를 어디에 맞추느냐가 관건이겠네요.”

팀장급들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에 들어간 것을 보며 엠케이가 재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닥였다.

“야 한재이, 나 바꿔줘. 나 도둑 하기 싫어.”

“왜?”

“난 탱커 아니면 안 잡는다고.”

엠케이의 말에 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하긴 엠케이가 저렇게 보여도 우리 중에서 근력 제일 좋을걸.”

“그럼 뭐 탱커포지션 씨프.”

“푸핫. 어떻게 해도 엠케이는 씨프 고정이냐고.”

“아니 근데 애초에 내가 왜 한재이한테 포지션 상담을 하고 있어.”

“그러게, 그것도 게임 포지션을. 한재이 게임 안 하잖아.”

“난 시청 전문이긴 하지.”

어깨를 으쓱하는 재이를 쳐다본 은규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의 엠케이를 힐끔 하곤 말했다.

“시작도 안 했는데 쟤 과몰입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내 말이. 저러다가 진짜 컨셉 이걸로 컨펌나면.”

“그 전에 내 컨셉은 좀 바꾸고 가자고.”

“그러나 어차피 도둑이겠지.”

"어도둑 엠케이."

“심은규 닥쳐라.”

셋의 수다를 듣고 있던 나머지 녀석들이 하나둘 끼어들었다.

“나도 기왕 마법사 할 거면 흑마법사.”

“난 격투가 보단 소환사 같은 게 좋은데.”

“남궁찬 이게 지금 진짜 게임인 줄 아냐.”

“소환사면 뭐 소환수랑 같이 무대 뛰는 거야?”

“차라리 한재이가 소환사에 남궁찬 네가 소환수를 하는 게 낫겠다.”

“야 그거 신박한데. 개쎄보이잖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영양가 없는 수다를 재미있다는 듯 듣고 있던 윤효민이 문득 재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한재이는 왜 하필 음유시인이야? 보통 검사나 마법사 같은 거 하고 싶어 하지 않나?”

윤효민의 질문에 재이가 말했다.

“예전부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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