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45화 (4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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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없으면 안 돌아간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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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칼질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요. 신이시여 듣고 계십니까. 제 능력은 이제 다음 용사에게 물려 주시면 안 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역 기간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리온은 신전에 마련된 기도용 제단에 대충 꿇어앉아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아 물론 이 짓 그만둬도 꼬박꼬박 기도는 올리겠습니다. 이참에 권능을 찬양하는 노래라도 만들어 불러 드릴까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부르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또 좀 더 듣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제 예전 같지 않은지 비 오는 날이면 무릎이 쑤신다는 둥 혼자 너무 다 해 처먹는다고 교단에서도 원성이 빗발친다는 둥 이 말 저 말 주절거리고 있던 리온에게 신전의 사제가 급하게 뛰어와 말했다.

“세리엘 경. 신성한 기도를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급보가.”

“무슨 일입니까.”

리온은 자신에게 다가온 사제를 돌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기도인지 투정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던 조금 전의 모습 대신 잘 벼린 검과 같이 날카로운 기도를 뿜어내는 대륙의 영웅이 서 있었다.

“멜라노르 평원에 레드 드래곤이 또다시 출몰한다는 소식이.”

“하. 이 용 새끼 기어 나오지 말라니까. 이번엔 진짜 끝장을 내야하나.”

성큼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 리온의 뒤를 따르며 사제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조심하십시오. 그가 대마도사 샤리프와 손을 잡았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그럴 리가. 두 놈 다 기본적으로 자기 말고는 아무도 안 믿는 성격 파탄자들일 텐데.”

“세리엘 경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다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겠죠.”

리온은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 오던 사제를 돌아보았다. 리온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사제가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 어디까지나 첩보이니까요.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충고 새겨듣지요.”

***

‘그때 그 말을 진짜 새겨들었어야 하는 건데.’

재이는 자신에게 충고하던 사제의 선량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지, 결과적으론 그 덕에 강제 전직하게 되었으니 신께서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건가.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재이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대박과 쪽박 사이의 역대급 외줄 타기라는 평을 들으며 컨셉회의를 통과한 일명 파티 컨셉은 사장단 회의에서 어느 정도 조율을 거쳐 최종적으로 승인이 났다. 굳이 진입장벽이 높은 세계관적 접근법을 써야 하느냐는 반대 의견이 끝까지 따라붙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성공하면 정답이요 실패하면 오답인 게 이 바닥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성공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재이의 눈앞에서는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스텝 업 종료 이후 데뷔까지의 공백기는 절대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골든타임이었다. 프로그램으로 유입된 라이트 팬을 그대로 데뷔 조의 확실한 팬덤으로 이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책들이 강구되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유튜브를 통한 정기적인 콘텐츠 업데이트였다.

“이거 이렇게까지 따도 괜찮은 건가요?”

연습실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모니터 속 영상을 들여다보던 남궁찬이 말했다.

“게임사 쪽 하고는 조율 끝났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늘은 우선 다들 편하게 각자 맡은 직업 스킬들을 재현해 보는 거로 하자고. 동작은 나중에 게임사에서 받아온 액션 모드 베이스로 김 선생이 포인트 안무 뽑아둔 거로 맞춰보면 되니까. 우선은 인트로 장면 딴다는 느낌으로 편하게 가자고.”

영상의 테마는 게임 스킬의 실사 카피였다. 본인들의 능력과 비슷한 게임 스킬을 실제로 구현해 보는 멤버들의 모습을 키치하게 그려 시장 반응을 알아보자는 의도였다.

VD실 실장 윤효민은 컨셉이 확정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리 추려뒀던 게임사에 컨택 해 소스로 쓸 수 있는 스킬을 추려 영상 촬영 일정을 잡았다. 콘텐츠기획팀에 콘티를 발주하고 동시에 이펙트 구현을 위해 따로 외주업체의 일정까지 확보해 놓은 덕에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추진력이었다.

“인혁이부터 가 볼까.”

“근데 검 대신 뭘 쓰면 되죠?”

“아 그거? 이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인혁에게 윤효민이 건넨 것은 대걸레 자루였다.

“···클래식하네요.”

“차인혁 화법이 꽤 센스있네?”

건네받은 대걸레 자루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인혁에게 윤효민이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려 차인혁.”

“그나마 걸레는 빼 주신 거 봐. 윤 실장님 배려 돋네.”

“그러게. 휘두르기 딱 좋겠어.”

“나중에 편집에서 걸레 사진 합성하실 생각이실지도 몰라.”

“와 지금 거 스포인듯!”

아이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인혁이 연습실 가운데 섰다.

잠시 정신을 집중하는 듯 숨을 고른 그가 안정적인 자세로 검 대신 대걸레 자루를 뽑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

“어···”

“음···”

“에···”

“흠···”

그러나 꽤 안정적인 자세였음에도 아이들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반응은 미묘했다. 차인혁 본인도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지 미간을 찌푸리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음. 지금 건 게임 스킬 보단 그냥 검도하는 것 같은데.”

윤효민의 말에 아이들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스킬에 들어가는 동작들은 다 들어간 듯했는데 뭔가··· 뭔가가 부족했다.

“잠깐 도와줘도 됩니까?”

재이가 손을 들었다. 윤효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물론이지. 아이디어 있어?”

“네. 저게 저기서 저렇게 가면 시야각이 중앙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 스킬은 투로를 정방 270도로 전개 가능하다는 게 포인트라. 그래서 크리티컬 터지면 원샷 올킬도 가능한거거든요.”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재이가 인혁에게 대걸레 자루를 건네받았다.

우웅-

인혁이 했던 것처럼 대걸레 자루를 휘두르며 천천히 스텝을 밟던 재이가 일순 훅 상체를 낮춰 몸을 틀며 횡으로 깊게 베었다.

“오오”

“뭐지 지금 거?”

“분명 아까 차인혁도 비슷하게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왜 느낌이 달라?”

인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재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아까 상단 베기에서 하단으로 연계기 들어가는 부분. 다시 한 번만 해봐.”

재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조금 전 보였던 동작을 다시 해 보였다.

후웅-

대걸레 자루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구경하던 이환과 은규, 남궁찬과 엠케이가 차례대로 중얼거렸다.

“뭐 휘두르면 저런 소리가 나더라?”

“골프채.”

“야구 배트.”

“우리 엄마 등짝 스매싱.”

“원포인트 안무 필요 없겠는데요?”

카메라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선생이 윤효민에게 말했다. 윤효민이 김 선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김 선생 보기에도 그래요? 난 내가 이런 쪽으로 문외한이라 그런 줄 알았지.”

“제가 액션 모드 보고 짠 것보다 움직임이 자연스럽네요.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보고 있으면 진짜 자괴감 든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김 선생에게 짧게 웃어 보인 뒤 윤효민은 인혁을 붙잡고 동작 하나하나를 짚어주고 있는 재이를 바라보았다.

퇴출 1호 연습생에서 차기 데뷔조 센터 포지션을 노리는 핵심멤버로의 도약이라.

같은 회사의 여러 사람에게 듣지 않았다면 자신도 기획사 언플이 너무 심하다고 코웃음 치고 넘어갔을 것 같은 스토리였다. 그러나 소문의 그 연습생을 직접 본 순간 윤효민은 확신했다.

이건 뜰 주식이라고.

‘게다가 적당히 또라이 기질도 있는 것 같은 게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지.’

회사의 실세라 불리는 팀장급 멤버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담력의 열여덟이라니. 아무리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녀석들만 추리고 모은 게 데뷔 조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게다가 그 냈다는 의견이라는 게.

“한 수 배웠다고.”

나름, 이 바닥 트렌드세터라고 자부하고 있던 자신조차 살짝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컨셉을 구체화 시켜 나갈수록 점점 이게 과연 먹힐까 싶은 불안감과 간만에 대박칠지도 모르겠단 기대감이 서로 뒤엉켜 가슴이 뛰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인가.

윤효민은 기분이 좋았다.

“한재이, 내 것도 좀 봐 줘 봐봐.”

엠케이가 재이를 불렀다.

“이렇게 여기서 반 스텝 빼고 한 바퀴 회전해서 착지. 어때?”

엠케이가 도약으로 붙인 관성을 이용해 가볍게 공중 옆돌기 후 착지했다. 직접 팀 안무도 짜는 실력의 소유자답게 동작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다른 아이들 보다 뛰어났다.

“움직임은 좋은데 들어가는 타이밍이 안 좋아. 그 박자로 뛰면 무릎 연골 다 갈릴걸. 반 스텝 빼는 것과 동시에 회전 들어가야 돼. 그리고 착지는 회전이 부족했다 싶으면 차라리 손 짚고 무릎으로 내려온다는 느낌으로 끝내는 게 나을 거야.”

결국, 어느새 멤버들이 한재이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받는 흐름이 되어있었다. 엠케이가 생각한 동작을 본 재이가 이것저것 움직임을 지적하는 것을 보고 있던 윤효민이 재이에게 물었다.

“한재이 너 게임사에서 나온 거 아니지?”

“아하하 설마요. 이 게임 전 해 본 적도 없는걸요.”

재이의 말에 윤효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야? 근데 뭐 이렇게 스킬을 줄줄이 꿰고 있어?”

“한재이 프로시청러거든요. 게임은 하지도 않으면서 보는 건 주구장창 봐요.”

옆에 있던 엠케이가 끼어들어 말했다.

“게임 보는 거 좋아해요.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달까.”

재이의 말에 녀석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쟤 훈수 엄청 둬요.”

“한재이 옆에 있으면 신경 쓰여서 집중 안 된다니까.”

“레알. 손은 발컨인데 입은 신컨이야.”

“그치. 난 또 하도 훈수 두길래 쩔줄알았더니 시켜보니까 완전.”

그 말을 듣고 있던 윤효민이 말했다.

“게임 실력은 별론가 봐? 의외네. 한재이는 뭐든 잘할 줄 알았는데.”

“직접 하는 거랑은 또 다르더라고요.”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실장님, 근데 저희는 어떻게 진행해요?”

움직임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 흑마법사와 힐러 포지션의 이환과 은규가 윤효민에게 물었다.

“아 너희는 그린 스크린에서 찍을 거야. 이펙트 넣어야 하니까.”

“와 본격적인데요.”

“이게 뭐라고 나 떨려.”

이환과 심은규가 호들갑을 떨었다.

“설마 그냥 서서 할 생각은 아니지?”

재이의 말에 이환과 은규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응? 주문 외우면 우다닥 뭐 꽂히고 화르르 불타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어···. 나도 뭐 지팡이나 휘두르면 될 줄 알았는데.”

“너네는 게임을 그렇게 하고도 감이 안 오냐? 법사가 주문만 외우디? 힐러는 가만히 서서 힐만 때리고?”

“어··· 그건 아니지.”

“에에 그게 어떻게 하더라.”

두 사람이 다시 모니터로 뛰어가 영상을 확인했다.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재이를 보던 윤효민이 웃으며 말했다.

“능숙하네?”

그 말에 재이가 윤효민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저 없으면 안 돌아간다니까요.”

여상한 말투가 무심한 표정과 찰떡같이 어울렸다. 연습실 한쪽에선 인혁과 엠케이, 남궁찬이 각자의 움직임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다른 한쪽에선 이환과 은규가 주문 영창과 동작을 어떻게하면 자연스럽게 연계 할 수 있을지 김 선생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있었다.

“아 근데 전 아이템 뭐 써요?”

생각났다는 듯 묻는 재이에게 윤효민이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건넸다.

“넌 이거.”

“진짜 클래식하시네요.”

재이의 중얼거림에 윤효민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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