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51화 (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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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팬 사인회

김은지는 감개무량했다.

직장인 2년 차.

김은지는 슬슬 월급이란 회사가 자신의 열정과 체력을 가져가는 대가로 던져주는 값싼 위로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취업이라는 높은 벽을 넘었다는 기쁨도 잠시, 뒤돌아보니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이 먹고살기 위한 노동에 먹혀 있었다. 퇴근 후엔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 소리를 배경으로 핸드폰이나 좀 들여다보다가 잠드는 삶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대충 살다가 나이 들면 죽겠지 싶은 생각이 들면 서른도 되지 않은 물리적 나이와는 별개로 심리적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 중임을 새삼 깨닫게 되곤 했다.

그랬는데.

누가 알았겠는가.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이젠 쉰 떡밥 소리를 듣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뒤늦게 꽂힐 줄. 그래도 그때만 해도 생각했다. 끽해봐야 방구석 1열 예약일 거라고. 몸으로 뛰는 덕질은 졸업한 지 오래라고. 돌아가기엔 지나온 길이 멀기도 했거니와 돌아가기 위한 체력도 열정도 이미 모두 회사에 저당 잡힌 몸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누가 그랬지. 인생 모르는 거라고.’

김은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신인 아이돌 PART.Y의 첫 번째 팬 사인회 현장에 와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조카가 보고 있던 유튜브 영상이었다. 세상 심각한 얼굴로 ‘크오아앙 으와아앙’ 포효하며 용사가 드래곤을 때려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이돌 연습생을 봤을 때 김은지는 결심했다.

저 녀석을 데뷔시켜서 팬싸에서 라이브로 저걸 꼭 봐야겠다고.

인간, 목표가 생기면 달라지는 법.

이대로 살다 언젠간 죽겠지 싶던 마음은 죽을 때 죽더라도 애들 데뷔는 보고 죽어야겠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기왕 데뷔까지 했는데 제대로 꽃길 걷는지 확인은 해야지 싶은 생각으로 이어졌다. 회사는 여전히 바쁘고 삶은 변함없이 건조했지만 죽어있던 마음은 조금 살아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섯 멤버들의 실물 크기 패널이 세워져 있는 팬 사인회 회장 입구에 선 김은지는 자신의 삶이 새로운 챕터로 들어섰음을 직감했다.

“안녕하세요!”

붙임성 좋아 보이는 웃음과 함께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엠케이였다. 사인회 순서는 엠케이, 남궁찬, 차인혁, 이환, 심은규, 그리고 한재이로 이어졌다.

‘와 진짜 아이돌 상’

가까이에서 본 엠케이는 정석적인 아이돌의 얼굴이었다. 동글동글한 눈이 반짝이는 것이 꼭 다섯 살짜리 말썽꾸러기 제 조카랑 닮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김은지요.”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으음···. 은지 씨?”

“에이 너무 거리 느껴지는데. 은지야.. 는 너무 선 넘나?”

제가 말하고도 이쪽 눈치를 보는 것이 주인 눈치 보는 멍뭉이 같은 느낌에 김은지는 푸핫 웃어버렸다.

“그냥 이름 써 주세요.”

“와 철벽이시네요.”

“그런가요, 아하하.”

엠케이가 질문이 담긴 포스트잇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쓱쓱 대답을 쓰더니 대뜸 손을 뻗었다.

“누나 잠깐만요.”

“네?”

거기 쇼핑백 좀 줘보세요.

엠케이의 말에 김은지가 얼결에 아까 단상에 오를 때 스태프가 건넨 쇼핑백을 내밀었다. 엠케이가 제 자리 아래쪽에서 주섬주섬 뭔갈 꺼내 집어넣곤 김은지에게 다시 내밀었다. 팬 사인회에서 선물을 줬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거꾸로 아이돌에게 직접 선물을 받아봤단 소리는 못 들어본 김은지가 당황하는 사이 ‘이동하실게요’라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얼결에 인사하고 옆자리 남궁찬의 앞으로 자리를 옮기자 남궁찬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직접 골라 준비한 거예요. 이것도 받으세요.”

아, 그래서 단상 올라가기 전에 빈 쇼핑백을 나눠줬구나.

김은지는 멤버들이 앉아있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 팬들에게 쇼핑백을 나눠주던 스태프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쇼핑백에 제 선물을 넣어 돌려준 남궁찬이 김은지가 올려놓은 질문 포스트잇을 확인하고는 킥킥 웃었다.

“은지 님 예리하시네요?”

남궁찬이 건넨 말에 김은지가 웃으며 물었다.

“왜 누나라고 안 불러줘요?”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 틈에 그걸 확인한 거야? 남궁찬 눈치 무엇?

김은지는 내심 놀라며 대답했다.

“농담 한 거였는데.”

“엠케이한테 전해줄게요.”

“와 정말요?”

“어 그거 제가 아껴둔 리액션인데. 누나가 먼저 쓰시면 어떡해요.”

“아하하”

부모님 갈빗집에서 알바 많이 했다더니 TV로 보던 것보다 센스 좋은 남궁찬의 말에 웃고 있는데 스태프가 어서 이동하라고 사인을 보내왔다.

김은지는 자신이 내민 앨범에 사인을 하고 있는 인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차인혁의 얼굴은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주제에 완성도도 박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괜히 혼자 어색해진 김은지가 긴장한 것을 느낀 인혁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긴장하셨구나?”

“TV보다 실물이 백만천만 배 더 박력 있어서.”

“쟤네들 다 듣게 다시 한 번만 더 큰 소리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멤버들을 힐끔 쳐다보며 농담처럼 웃는 차인혁을 잠깐 바라본 김은지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단전에 힘을 주고는 소리쳤다.

“차리더 최고 존엄! 박력쩔어!!”

장내의 시선이 일순 이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싶어서 얼굴이 화륵 달아오른 김은지를 쳐다본 인혁이 고개를 쭉 빼고 멤버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얘들아 들었지? 앞으로 내 말 잘 들어라!”

누나가 최고라고 쌍 따봉을 만들어 보이며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쇼핑백에 넣어주는 인혁을 차마 마주 보기 민망해서 대충 챙겨 얼른 다음 자리로 이동했다. 내가 미쳤지.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시선에 김은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나 인혁이 좋아해요?”

“어, 여섯 명 다 좋아해요.”

“와 그렇구나. 그럼 저희 언제 좋아하게 되셨는데요?”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환에게 김은지가 대답했다.

“스텝 업에서 밥 먹을 때요.”

“무대 할 때가 아니네요?”

“입덕포인트란게 원래 다 그래요.”

무심코 대답하던 김은지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 당연히 무대도 좋아해요. 데뷔앨범 다 너무 좋아요.”

“누나 억지로 덧붙이지 않아도 돼요.”

“아닌데 진짠데.”

완전히 해명하지 못한 채로 스태프의 재촉에 다음 자리로 떠밀리며 김은지는 생각했다. 나 미쳤나 봐. 그냥 무난하게 무대 보고 좋아하게 됐다고 할걸.

“누나 무슨 고민 있어요?”

사인을 마치고 포스트잇에 적힌 질문에 대답까지 한 은규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김은지를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아 자작곡 모두 너무 좋아요.”

“고맙습니다. 어느 쪽이 좋았어요?”

“계란후라이와 토스트 한 조각···”

“아···”

은규의 표정이 흐릿해지는 것을 본 김은지가 오답임을 직감하고 다급히 말을 이었다.

“히든트랙도 좋았어요. 후렴구 입에 착착 감겨요.”

“계란후라이와 토스트 한 조각 우린 쩔어주는 황금비율?”

“아하하”

은규의 재치있는 즉흥 랩에 웃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순서, 재이의 앞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아. 아, 안녕.”

“긴장하셨구나. 이환도 그러는데. 걔 아까 누나 앞에서 실수 안 했죠?”

나중에 앨범에 누나 이름 제대로 썼는지 꼭 확인하세요.

싱긋 웃어 보이는 재이의 모습에 김은지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드래곤 크오와앙 해달라고 해야 하는데. 크오와앙···.

“크오와아앙···”

“···?”

사인 중이던 재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김은지를 올려다봤다.

난 망했어 이제 끝이야.

세상 따위 지금 당장 멸망해버려.

재이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친 김은지가 아직도 굴러가고 있는 세상에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는 사이 재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와 재재님 팬이셨구나. 고맙습니다.”

웃는 재이의 얼굴에 정신이 조금 돌아온 김은지가 말했다.

“다섯 살짜리 조카도 재재님 완전 좋아해요. 언제 또 볼 수 있어요?”

“조만 간요.”

대답과 함께 한쪽 눈을 깜박하며 웃는 재이의 모습에 김은지는 심장이 옥죄듯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아, 이래서 최애영접은 목숨 걸 각오로 해야 한다고 했구나. 김은지는 덕계의 명언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잠깐만요 누나 이거 가져가야죠.”

김은지가 스태프의 유도에 비틀대며 일어서 나가려는 걸 재이가 황급히 불러세워 선물을 넣어주었다. 제멋대로 승천 중이던 넋을 가까스로 붙잡아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김은지는 자신이 어느새 대기석 제 자리로 돌아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직장 다니며 단련한 귀소본능이란 무시 못 할 것이었다. 무대에서는 아직 팬 사인회가 한창이었다. 김은지는 그제야 쇼핑백을 열고 멤버들이 넣어준 선물을 확인했다.

“엠케이 빼빼로, 남궁찬 초코파이, 차리더 팝콘, 이환이 새우깡, 은규 쿠크다스, 재이 사이다···.”

뭔데. 다 먹을 거잖아.

보통 주면 뭐 생수나 마스크팩 그런 거 주지 않나.

그 와중에 한재이 혼자 사이다 뭔데.

팬굿즈랑 별개로 받는 팬 사인회 선물이 전부 먹거리일 거란 생각은 해 보지 못해 당황하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은 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얘네 진짜 먹을 거에 진심이잖아. 이런 본진 처음이야 아하핳.”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비슷한 감상인 듯 받은 선물들을 꺼내 보며 웃고 있었다. 김은지는 무대 위에선 정신없어서 제대로 확인도 못 했던 포스트잇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엠케이

Q: 인혁이 대신 재이와 오프닝 안무를 해야 한다면?

A: 재이 대신 다른 멤 붙여달라고 함 :)

남궁찬

Q: 부모님 가게에서 알바할때 진짜 갈비 냄새만 맡았어요?

A: 그럴 리가

차인혁

Q: 활동 끝나기 전까지 예상하는 재이와의 대련 성적은 몇 승 몇 패?

A: 278승 278패

포스트잇을 확인하고 있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팬들의 사인이 끝났는지 멤버들이 퇴장하는 것이 보였다.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을 받기 위해 멤버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 속에 멤버들이 퇴장하고 스태프들이 무대를 정리하는 사이 LED 화면에 팬덤 이름이 발표되었다.

“아하핳 어떡해 병맛이야.”

옆자리 팬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은지 또한 동감이었다.

‘팬덤 이름이 포션이라니. 약 빨면서 스밍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김은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눈 딱 감고 끝까지 쭉 달리는 자가 이기는 것이 아이돌 컨셉질. 파티의 팬덤이 포션이라니 이 무슨 찰떡같은 조합이란 말인가. 이렇게 된 거 포션 중에서도 고급 포션이 되어야지. 와 입덕했더니 장래의 꿈이 생겼어. 이것이 바로 상사가 맨날 써내라고 지랄하던 3년 후 나의 모습인가.

김은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포션은 빨지도 않았는데 힐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장면이 바뀌며 이번엔 다른 공지사항이 화면에 떠올랐다.

[PART.Y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차인혁: 중간 관리자의 일상 로그

남궁찬: 피규어를 만들어 봅시다

엠케이: 엠케이와 홈트 하쉴?

이환, 심은규: 우당탕탕 환심쿡방

한재이: 재재님이 들려주는 용사의 모험 이야기

[유튜브 채널에서 비정기적 업데이트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좋아요와 조회 수를 참고로 파티어워즈에서의 시상도 고려하고 있으니 많은 시청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상에 젖어있을 새도 없이 조명이 암전하더니 무대가 시작되었다. 팬 사인회의 끝을 알리는 [Like Tutorial]의 라이브 무대였다. 어두운 무대에 조명이 켜지며 칠흑 검을 든 두 명의 멤버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검을 맞부딪치기 시작하자 회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혹시 무대 안무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투적인 인혁의 공격과 그것을 하나하나 여유롭게 받아치는 재이의 움직임이 현란하게 섞여들었다.

사악

곡의 인트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에 재이의 검이 인혁의 검을 옆으로 흘리고 그대로 인혁의 코앞에서 정지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쥐고 쳐다보고 있던 김은지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문득 자신의 포스트잇에 쓰여 있던 재이의 답이 떠올랐다.

Q: 인혁이한테 어쩌다 4번이나(?) 진 거예요?

A: 리더 체면도 세워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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