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52화 (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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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재님이 쏘아올린 공

음방 위주 스케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스케줄이 비는 시간은 안무 연습과 개인 콘텐츠, SNS 관리 등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다행스럽게도 음원과 음반 지표는 상당히 순조로웠다. 이대로라면 다음 컴백때는 안정적인 상위권도 노려볼 만했다.

빠르게 불어나는 팬덤과 상승 추이의 지표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5승 326패!”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엠케이는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 위에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의 숫자를 갱신하며 외쳤다. 남궁찬이 말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는 차인혁의 뒷모습을 찍어 자신들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 올리며 중얼거렸다.

“오늘로 3일 연속 승점 없이 지나가는구나.”

“한재이, 인간적으로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닫힌 방문을 쳐다보던 은규가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가.”

“아무리 그래도 진짜 시합도 아닌데. 좀 살살하지.”

“많이 살살한 건데?”

“아니 그럼 기왕에 살살 할 거 좀 더 져 줘도.”

은규의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지금 그 말 차인혁이 들으면 너 그거 감당할 수 있어?”

“어··· 음···”

“다섯 판 져 준 것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재이가 은규에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있던 나머지 세 명이 수군거렸다.

“역시 져 준 거였냐.”

“그럼 그렇지.”

“저럴 거면 차라리 완승 해버리는 게 낫지 않냐.”

“대체 져 줄 때의 기준은 뭔지 궁금하다.”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냥 한재이 마음이지.”

“쯧쯧. 불쌍한 차인혁. 난 절대 한재이랑 붙지 말아야지.”

차인혁 동정론으로 흐르던 화제의 중심은 자신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옮겨갔다.

“다음엔 누가 저런 안무 구상해 오면 절대 못 한다고 하자.”

“말이라고. 원래 안무 아이디어란 두 번 쓰면 안 되는 거야. 이런 건 역시 한 번으로 족하지.”

“그래, 우리 커리어에 다시는 대련안무 같은 거 없다.”

“아 진짜, 이환. 그런 말은 좀 안 하면 안 되냐. 불길하다고.”

이환의 말에 엠케이가 버럭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재이가 성큼 걸어 들어가 닫힌 방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야 차인혁! 잘 거면 씻고 자! 더러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머지 멤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어휴 저 잔소리.”

“레알 우리 엄마보다 더 심함.”

“손 씻어라, 먹었으면 치워라, 옷 아무 데나 벗어두지 말아라, 방 청소 좀 해라, 또 뭐 있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재이의 잔소리 퍼레이드를 세던 엠케이에 나머지 녀석들이 이어 말했다.

“먹으면 바로 설거지, 빨래 쌓아두지 말아라, 소파에서 뭐 먹지 말아라?”

“일찍 자라, 일찍 일어나라?”

“진짜 엄마냐고.”

“너네들도 수다 떨 시간 있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 내일 아침에 또 못 일어나지 말고.”

“저것도 있었네. 발 닦고 자라.”

재이의 말에 이제 손가락이 없다고 키득대던 엠케이가 자신을 노려보는 재이의 시선을 느끼곤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다.

“나 먼저 씻는다!”

“엠케이 비겁해 그건 아니지! 가위바위보 해야지 어디가!”

다른 녀석들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엠케이를 잡느라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한밤중의 숙소에 울려 퍼졌다.

“아 뛰지 좀 마! 니들이 애들이냐고!! 숙소 쫓겨나고 싶어?!”

그리고 재이의 잔소리가 그 뒤를 쫓았다.

***

“안녕 친구들! 재재님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화면 속 재이가 특유의 그 쿨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나쁜 마법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게. 잘 들어봐.”

말과 함께 재이는 용사 인형과 지팡이를 쥔 털북숭이 인형을 꺼내 놓았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재이의 눈이 한껏 진지해졌다.

이제부터는 진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자 여기서 일단 우리 지난번에 배운 거 한 번 복습해 볼까요? 드래곤이 말을 안 들을땐 어떻게 했었죠?”

테이블 아래에서 드래곤 인형을 꺼내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용사 인형을 집어 든 재이가 말했다.

“드래곤! 내가 집 잘 지키고 있으랬지! 누가 이렇게 멋대로 나와서 사람들을 괴롭히래!”

“크오아앙 와아앙 끄와앙!”

“답답했다고?! 그래도 집에 얌전히 있기로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돼, 안돼?”

“크와아앙 아아앙 우아앙!”

“반성은커녕 또 사람들을 괴롭힐 생각만 하다니. 너 역시 혼 좀 나야겠구나!”

“푹팍팍 푹팍팍”

입으로 효과음까지 내 가며 드래곤을 찰지게 때려 물리치곤 용사 인형을 들어 올리며 재이가 말했다.

“못된 드래곤을 혼내준 용사님 덕분에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졌어요. 그런데.”

덤덤하게 이야기하던 재이가 말을 끊었다.

“이번엔 나쁜 마법사가 나타난 거예요.”

테이블 한쪽에 올려두었던 마법사 인형을 잡아 들며 한껏 음산한 목소리로 재이가 말했다. 눈썹을 콱 찌푸리고 등까지 살짝 굽힌 채 인형에 집중한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했다.

“케케케. 이 세상은 다 내 꺼야. 내가 제일 위대하다. 내가 제일 잘났다고!”

마법사 인형의 대사를 읊던 재이가 문득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봤나요, 여러분? 이 마법사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아요. 사실 그건 나쁜 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거든요. 근데 이 마법사처럼 내가 제일 잘났으니까 다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라고 하는 건 안 좋은 거예요. 나도 잘났는데 왜 얘가 하는 말 대로만 해야 해? 그쵸?”

다시 인형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재이가 마법사 인형을 흔들며 말했다.

“케케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강력한 마법 주문으로!!”

푹팍팍 푹팍팍

마법사 인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사 인형의 발차기가 얼굴에 들이박혔다.

“마법! 윽! 주문! 악! 끄아아.”

말 사이사이마다 들어와 박히는 용사 인형의 발차기에 견디다 못한 마법사 인형이 결국 바닥에 퍽 엎어졌다.

“보셨어요 여러분? 나쁜 마법사를 대할 때 제일 중요한 건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말을 마친 재이가 잠시 뜸을 들이며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음. 근데 때리는 게 싫은 친구들도 있을 거예요. 아무리 착한 용사님이 나쁜 마법사를 혼내주는 거라고 해도 마법사는 용사님보다 힘도 없고 약해 보이는 할아버지인데?

사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돼요. 그 사람의 내면을 봐야죠. 아무튼 때리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이렇게 있다가 마법사의 강력 주문을 맞고 싶지도 않을 땐 어떻게 하냐면.”

재이가 미리 준비해 뒀던 소꿉놀이용 빵을 테이블 아래에서 꺼내 들었다.

“케케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강력한 마법 주문으!!! 으읍!!! 으으읍!!!!”

마법사 인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빵 모형을 마법사의 얼굴에 꾹꾹 야무지게 눌러주며 재이가 말했다.

“바게트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물 없이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퍽퍽하고 목이 아파요. 그러니까 친구들은 꼭 물이나 우유랑 같이 먹고 먹을 땐 조금씩 꼭꼭 씹어 먹는 거 잊으면 안 돼요, 알겠죠?”

진지한 얼굴로 화면 너머의 친구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듯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한 재이가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는 듯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자 그럼 다음 시간에 또 만나요. 그때까지 모두 안녕!”

***

“그래서. 얘를 넣자고?”

SBC 예능국 회의실.

박소라 PD는 캐스팅 담당자가 가져온 자료 화면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네. 이번에 케이엠에서 새로 런칭한 신인 아이돌인데 데뷔 전 경연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만들어서 올렸던 영상 반응이 좋아서 이번에 아예 개인 콘텐츠로 확장해서 올리는 모양이던데. 아이돌 쪽뿐 아니라 유·아동 카테고리 쪽에서도 꽤 성적이 좋더라고요. 느낌 어떠세요?”

담당자의 물음에 박소라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뜸을 들였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를 듣는 지상파 예능이지만 사실 검증되지 않은 뉴페이스를 프로그램에 넣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시청률이 보장된 탑티어가 아니면 투자사에서 먼저 난색을 표했다.

“어? 이거 재재님이잖아요? 우리 아들이 팬이에요. 재재님 컨택하셨어요?”

회의를 참관 중이던 투자사 쪽 직원이 영상 속 인물을 알아보고 호감을 표했다.

“아, 정식 섭외는 아직 안 들어갔는데. 최 작가님은 일단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피디님 컨펌만 받으면 소속사 컨택 해 보려고요.”

캐스팅 담당자가 대답과 함께 어떠냐는 눈빛으로 박소라를 쳐다보았다.

“음··· 뉴페이스 투입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구성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저 정도 스토리면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도 괜찮은 것 같고.”

“재재님 스토리 구성 혼자서 다 하던데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투자사 직원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자꾸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진짜 좋아해서요. 딱 하나 올라온 영상을 얼마나 돌려보던지. 진짜 그거 딱 하나밖에 없어서 아내랑 인터넷 커뮤니티 다 뒤져서 재재님 그 경연 프로그램 비하인드 영상까지 찾아봤다고요. 거기 보니까 시나리오 뭐 이런 거 없이 그냥 원테이크로 쭉 찍더라고요.”

“뭐. 자기 밥줄이 걸린 경연에서 애들을 상대로 한 콘텐츠를 생각해 낼 정도면 본인도 그만큼 애들을 좋아한단 거겠죠.”

박소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긍정적인 반응에 캐스팅 담당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케이엠에 컨택 넣어 볼까요?”

“그래. 근데 이번에 데뷔했으면 스케줄 빡빡할 텐데. 일정 안 맞는 거 아니야?”

“아이고 피디님, 안 맞으면 맞춰서라도 오겠죠. 지상파 예능으로 얼굴 알릴 기회인데.”

“아직 파일럿이지만.”

“기획은 좋으니 이대로 정규 가야죠.”

“그래야지.”

박소라는 테이블 한가득 쌓여 있는 관련 자료를 한 번 훑어보곤 손에 들고 있던 기획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새봄 유치원에서 만나요]

자신이 새로 맡게 된 예능 프로그램의 타이틀이었다.

정규편성을 받기 전 3부작 기획으로 제작될 리얼리티 예능으로 산골의 한 유치원이 배경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유치원을 섭외해 그곳에 진짜로 다니는 유치원생들이 그대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이미 유치원 측과 보호자의 동의까지 끝난 상태로 출연진 컨펌과 촬영을 위한 스케줄 조율이 한창이었다.

컨셉은 슬로우라이프 속 힐링 육아.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치는 것은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마찬가지. 고즈넉한 산골 마을 아이들의 유치원 생활을 엿보는 것으로 바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웃음과 힐링 모먼트를 선사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힐링 육아가 될지 헬 육아가 될지는 출연진들과 아이들의 케미에 달린 일이었지만.

“박대호 씨랑 송채은 씨 쪽은 컨펌 왔어?”

“아 그게. 박대호 씨는 문제없었는데 송채은 씨 쪽은 패키지로 넣어달라고···.”

“쯧. 대세라 이거구만. 어디였지? 태영인가? 거기 신인 누구 있었지?”

박대호는 3남 1녀 다둥이 가족의 가장으로 유명한 프로축구 선수 출신 예능인이었다. 어린이와 함께 나오는 예능에 몇 번 출연한 적이 있어 시청자에게도 제작진에게도 안정감 있는 선택이었다. 반면 송채은은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로 인기가 급상승한 대세 배우였다. 극 중 배역이 카리스마 철벽녀였던 탓인지 휴식기에 들어간 지금 이미지쇄신을 위해 적당히 가벼운 몸집의 예능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이쪽의 출연 제의에 조건을 걸어올 줄이야.

“신인은 신인인데. 아이돌이에요.”

“아이돌? 태영이 아이돌도 하던가?”

“피디님 대체. 아무리 몇 년 교양국에 가 계셨다고 해도 이 바닥 돌아가는 데 이렇게 관심이 없으실 줄이야. 태영이 아이돌에 투자하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됐고. 그래서 그 아이돌 멤버 중의 하나를 꽂아달라고?”

“네. 아무래도 요새 예능 판에 아이돌이 들어오기 힘들어져서 그런지.”

“그렇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끼워팔기라니, 태영도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이네. 근데 그럼 아이돌이 둘이나 되잖아. 그럴 필요 없지 않아?”

박소라의 질문에 담당자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건 그런데요. 촬영이 워낙 산골인 데다 아직 정규편성 확정이 안 난 파일럿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섭외가 의외로 쉽지 않더라는 소리를 차마 하지 못하고 담당자가 한숨을 내쉬자 대충 상황을 짐작한 박소라가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일단 송채은 씨 쪽은 그렇게 가자고.”

한발 뒤로 물러난 박소라의 대답에 흐려졌던 담당자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당장 급한 불을 어떻게든 껐다는 듯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에 박소라가 고개를 저으며 옆에 앉은 조연출에게 물었다.

“최 작가도 알고 있고?”

“그럼요. 일단 로케 먼저 가 보고 출연진 확정되는 대로 대본 작업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내일 로케팀하고 먼저 내려가서 며칠 있을 거니까 출연진 컨펌받으면 바로 연락 줘. 윤 피디는 제작팀 꾸려지는 대로 내려오고.”

박소라의 말에 캐스팅 담당자와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에게 대놓고 어깃장을 놓은 탓에 교양국으로 전출된 지 3년 만의 귀환이었다. 그때 싸웠던 국장이 물러나면서 윗선이 대거 물갈이된 덕이긴 했지만 3년이면 감을 잃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교양국에서 맡았던 일은 그것대로 보람이었지만 애초에 예능 하자고 입사한 회사였다. 그동안 종편이나 외주 프로덕션에서의 회유를 마다하고 버텼던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찍어누르기 식 인사발령에 회사를 옮기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다시 위로 올라갈 길을 트려면 크든 작든 여기서 일단 터뜨려 주는 게 중요했다.

박소라는 손에 든 기획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예능이요?”

재이의 물음에 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능. 다른 애들도 이제 슬슬 단독 스케줄 들어갈 예정이긴 한데. 네가 제일 먼저 컨펌났네.”

“뭔데요?”

“새봄 유치원에서 만나요.”

재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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