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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이돌계 상황 - 그 후.gif
“액션형 TRPG?”
장 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TRPG라니, 직업적 특성상 동년배보다 젊은 세대의 유행에 민감한 편인 그에게도 생소한 단어였다.
“네. 풀어 말하면 테이블에서 얘기하면서 하는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건데. 뭐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직접 플레이하면서 진행하는 RPG 게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모여서 직접 자기가 맡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렇죠. 스토리는 게임 마스터 (GM)가 진행하고 액션에 대한 판정, 음 그러니까 예를 들어 눈앞의 적에게 파이어볼을 날렸습니다, 했을 때 그게 크리티컬 히트인지 오폭인지 판정하는 건 주사위를 굴려서 결정하게 되고요.”
“말하자면 역할극을 끼얹은 주사위 게임이라는 거네?”
“뭐 그렇게 볼 수 있죠.”
윤효민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장 이사가 물었다.
“흠···. 하고 많은 컨텐츠들 중 굳이 이걸 고른 이유는?”
‘여기가 승부처로군.’
장 이사의 입에서 기다렸던 질문이 나오자 윤효민 실장이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큰 장점은 팀의 세계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음악적 코드에 세계관을 부여하는 방식은 그중 제일 보편화한 장치죠. 이번 컨텐츠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팬덤은 물론이고 대중들에게도 파티의 세계관에 대해 조금 더 폭넓은 상상의 자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요점만 간단히.”
장 이사의 말에 윤효민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첫째, 파티의 특색을 잘 살릴 수 있고, 둘째, 세계관에 대한 직접적인 홍보가 될 수 있으며, 셋째.”
잠시 뜸을 들인 윤효민이 말을 이었다.
“재밌을걸요. 아마도.”
***
멤버들과 함께 촬영용 스튜디오에 모여 있던 재이는 윤효민 실장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노트를 받아 들었다.
[PART.Y의 액션형 TRPG: 어느 날 차에서 내렸더니]
타이틀을 확인한 엠케이가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오, 우리 TRPG 해요? 나 이런 거 완전 좋아!”
남궁찬과 은규가 뒤를 이어 말했다.
“와 이거, 시나리오 우리 오리지널인가봐.”
“근데 TRPG면 TRPG지 액션형은 뭐야?”
재이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한 귀로 흘리며 시나리오 북을 펼쳐 보았다.
[배경소개]
PART.Y의 멤버 인혁, 재이, 남궁찬, 엠케이, 이환, 은규는 스케줄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이었다. 차가 멈춰 선 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여섯 멤버의 눈앞에는 그러나,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과연 멤버들은 미션을 완수하고 무사히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게임의 프롤로그 같은 배경소개를 읽은 재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자기가 맡은 포지션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맞아. 인혁이는 검사, 재이 너는 음유시인, 남궁찬은 격투가, 엠케이 씨프, 은규 힐러, 그리고 이환은 마법사. 원래라면 테이블 둘러싸고 앉아서 주사위 던지고 그 결과에 따라 지문 읽어가며 진행하는 형식이겠지만, 우리는 액션형이니까 주사위 던지고 직접 상황 연기 들어갈 거야. 몹이나 배경 같은 건 너희들 촬영한 뒤에 따로 애니메이션 작업할 거고.”
윤효민의 설명에 멤버들이 술렁였다.
“훗. 이렇게 내 연기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오는 것인가.”
“이환아, 안심해라. 지금처럼만 하면 드라마 섭외 오는 일은 절대 없겠다.”
“그러게. 완벽하게 훌륭한 책 읽기.”
“이잇, 남궁찬, 엠케이! 너희는 얼마나 잘하나 내가 두고 볼 거야!”
서로를 갈구며 투닥대던 녀석들은 윤효민이 멤버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한 물건들을 받아들곤
“···. 이 이건 또 뭐예요?”
“기본 아이템.”
남궁찬의 질문에 윤효민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미션 수행해서 포인트 쌓이면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거야.”
윤효민이 덧붙이는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대놓고 FFF 급이잖아요.”
“원래 게임 시작할 때 받는 기본템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재이의 불만 섞인 말에 윤효민이 대답하자 다른 녀석들이 하나둘 끼어들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전 처음부터 풀 세팅하고 시작하는데요.”
“쩔 해주는 만렙캐도 등장시켜 주시면 인정할게요.”
“진짜, 이거 쥐여주고 필드 나가라고 등 떠미는 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죠.”
“실장님, 요새 기본템 이렇게 허접하면 게임 아무도 안 잡아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아이들의 아우성을 태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윤효민이 입을 열었다.
“자 할 말들 다 했으면 시작해 볼까. 참고로 게임 진행은 내가 맡는다.”
“으엉 이건 소속사의 횡포야.”
“GM은 공격 안 되나.”
“FFF급이라 타격 없을 듯.”
“제길 억울하다.”
“얼른 렙업해서 타도하자 GM.”
“결국 이렇게 게임으로 몰아가는 윤 실장님의 빅 픽쳐.”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윤 실장의 지시에 따라 스튜디오 바닥에 표시된 제 자리를 찾아 섰다.
***
[PART.Y의 액션형 TRPG: 어느 날 차에서 내렸더니]
EP1: 초보자용 필드에 와 있었다.
미션: 다가오는 몹들을 해치우며 차원 게이트를 찾아 탈출하라.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에 파티 멤버 여섯이 서 있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멤버들은 갑자기 울려 퍼진 목소리에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 안녕하세요. [PART.Y의 액션형 TRPG: 어느 날 차에서 내렸더니] 의 진행을 맡게 된 윤 GM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퇴근하고 차에서 내린 여러분은 익숙한 숙소가 아닌 낯선 어떤 곳에 와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각자 맡은 직업과 스킬을 이용해 주사위를 굴려 나온 경우의 수에 맞춰 움직여 난관을 극복하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게이트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 판정은 10면체 주사위 두 개를 사용해서 0-100 사이의 숫자로 진행됩니다. 주사위의 숫자가 자신의 능력치보다 낮으면 성공, 높으면 실패를 의미합니다. 성공 시에는 각자가 가진 스킬을 쓸 수 있지만 실패했을 경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윤 GM의 설명이 끝나자 차인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탈출하려면 그 차원 게이트를 찾아야 한다는 거네?”
“그렇지. 근데 그게 어딨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
옆에서 엠케이의 대답을 듣고 있던 이환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탐색 마법 쓸 수 있나요?”
- 생각하신 주문을 영창하고 주사위를 던져 주세요. 이환의 마법 능력 수치인 80보다 작은 수가 나오면 성공입니다.
“···주문이요? 그냥 주사위 던지는 거 아니었어?”
이환이 머뭇거리자 남궁찬과 엠케이, 은규가 재밌다는 듯 끼어들었다.
“마법사가 주문도 없이 마법 시전 하는 거 봤냐. 얼른 주문 외워봐!”
“법사님! 어서 탐색 주문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세요!”
“너의 중2력을 보여줘!”
“너희들, 정신 사납게 좀 굴지 말고 조용히 좀 해.”
차인혁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환이 고맙다는 듯 그쪽을 돌아보자 인혁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법사님이 어떤 주문을 외우시나 다들 잘 들어보자고.”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이환이 눈을 흘기는 동안 다른 멤버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이환에게 집중되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듯 이환이 눈을 질끈 감곤 양팔을 위로 뻗으며 외쳤다.
“여기서 명하노니, 나를 둘러싼 삼라면탕의 기운을 빠짐없이 알려다오!”
“삼라만상이겠지!”
“와하하, 삼라면탕 뭐야!”
“아하하하하 갑분중화요리집!”
“사장님 여기 삼라면탕 하나 주세요!”
멤버들이 와락 웃는 소리에 이환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으아악, 지금 건 편집이요 편집!! 말이 잘못 나왔어요!!”
- 법사님, 주사위 굴려 주세요.
쿨한 윤 GM의 진행에 울상이 된 이환이 주사위를 던졌다.
결과는 73.
숫자가 0이면 크리티컬 히트, 숫자가 80에 가까울수록 하타, 숫자가 능력치인 80을 넘어가면 실패임을 감안하면, 그냥 평범한 하타치였다.
- 마법사는 정면 열 걸음 이내에 수상한 물체가 있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윤 GM의 진행에 멤버들이 수군댔다.
“주문이 장황했던 거에 비하면 효과가 영···”
“열 걸음 이내면 눈으로도 보이겠는데.”
“역시 삼라면탕으론 무리였나 보네.”
- 그 수상한 물체가 이쪽의 기운을 읽었습니다. 몹의 어그로를 끈 사람은.
윤 GM이 잠시 뜸을 들이자 탱커 포지션의 차인혁, 엠케이, 남궁찬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 음유시인. 몹이 음유시인의 탬버린 소리에 반응한 모양입니다.
“기본템이 후진 것도 모자라 어글까지 튀다니. 너무 한 거 아니냐고요.”
재이가 투덜거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제가 쓸 수 있는 공격스킬이··· 아. 이거로 갈게요. [모방]”
- [모방]은 멤버들 중 한 명의 스킬을 카피해서 시전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능력치 20. 이것보다 적은 수가 나와야 성공, 높으면 실패인데 정말 쓰시겠습니까?
0부터 100까지의 숫자 중 20보다 작은 수가 나와야 성공할 수 있는 꽤 고난도의 스킬. 그러나 재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근데 법사야, 몹은 어딨냐?”
“어? 어어 저기 네 쪽으로 뛰어오고 있어!!”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묻는 재이에게 당황하면서도 이환이 그럴싸하게 대사를 쳤다.
이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면에 늑대를 닮은 들짐승의 애니메이션이 등장했다. 촘촘하고 뾰족하게 솟은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이쪽을 향해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이 딱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재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주사위를 던졌다.
카메라가 결과를 쫓았다.
나온 숫자는 01
“으아아아, 실화냐! 1이라니!”
“한재이 진짜 운빨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래서 누구 능력 무슨 스킬을 쓸 건데?”
흥분해서 앞다퉈 외치는 멤버들의 소리에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재이가 남궁찬을 바라봤다.
“격투가의 [후려치기]요.”
“···”
“···”
그리고 다음 순간 탬버린으로 몹을 후려패는 음유시인의 경쾌한 연주가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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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이돌계 상황 - 그 후.gif]
얘네 데뷔할 때만 반짝하고 그대로 묻힐 줄 알았더니 용케 아직도 살아있더라고. 심지어 그 세계관으로 자체 TRPG까지 만들어서 놀고 있엌ㅋㅋㅋ 소속사가 컨셉질에 진심인가봨ㅋㅋㅋ 나 좀 궁금해서 게임 로그 올라온 거 보다가 웃겨 뒤지는줄ㅋㅋㅋ 아이돌 주제에 저렇게 다 드러내도 되는 거냐고 ㅋㅋㅋ 음유 얘 데뷔 때부터 포스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탱커보다 어글 잘 끄는 딜러로 각성함ㅋㅋㅋㅋ
법사_삼라면탕. gif
음유_물리.gif
힐러_분무기.gif
나 진짜 겜덕 외길 n 년 차에 3D는 열차밖에 파 본 적 없는데 요새 얘네 때문에 진심 정체성에 혼란 오는 중 ㅋㅋㅋ ㅠㅠ
└ 또 얘네냐 ㅋㅋㅋ TRPG 로그 짠 거 보니까 소속사도 보통 덕이 아닌 모양인데
└ 그러게, 고수의 냄새가 난다..
└ 심지어 오리지널 시나리옼ㅋㅋㅋ
└ 이런 게 진짜 덕질이짘ㅋㅋㅋㅋ
└ 진짜 회사가 작정하고 컨셉질하면 이 정도 퀄이 나오는구나 ㅋㅋㅋ
└ 이거 정식 출시되면 좀 해 보고 싶은데?
└ 탐색! 삼라면탕!!! ㅋㅋㅋㅋㅋ
└ 난 기본템 너무 후져서 못할 듯ㅋㅋㅋ 검사 대걸레 뭐냐고 모양 빠지게 ㅋㅋㅋ
└ 왜 적당히 현실감 있어서 좋은데. 렙업 빡세게 하면 뭐 좋은 거 나올지도 모르잖아.
└ ㅁㅈ 어쨌거나 냥장갑인 격투가 보다 낫잖아 ㅋㅋㅋ
└ ㅇㄱㄹㅇ 기본 스킬 냥펀치냐곸ㅋㅋ 뻔한 노림수인데 현웃터짐ㅋㅋㅋㅋ
“아이씨 내 이미지 다 죽었어.”
“나만 하겠냐, 나만.”
남궁찬이 머리를 쥐어 싸매는 것을 본 이환이 투덜거렸다.
“대체 누구를 위한 컨텐츠였냐고. 상처밖에 안 남았잖아.”
“팬분들은 즐거우셨던 것 같은데.”
이환의 계속되는 투덜거림에 핸드폰으로 팬 게시판을 모니터링 하고 있던 은규가 중얼거렸다.
“하아, 그래. 내 한 몸 희생해서 팬분들이 즐거우셨다면 그걸로 된 거지.”
“이환 너만 희생했냐. 이건 우리 모두의 희생이라고.”
“저기 음유만 빼고.”
엠케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재이에게 향했다.
“그러게. 어떻게 던지는 족족 크리티컬 아니면 상타냐고.”
“내 말이. 주사위 던지기의 달인도 아니고.”
“차인혁하고 완전 반대잖아.”
은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인혁에게 쏠렸다.
“아···. 우리 리더.”
“던지는 족족 디버프 걸리던.”
“차인혁은 진짜 어디 가서 보드게임 뭐 이런 거 하면 안 됨.”
“차인혁 너 위아리에서 몸풀기 게임 뭐 그런 거 한 거 없지?”
“그래, 니가 그냥 서 있으면 분위기로는 다 씹어먹잖아. 게임 같은 거 하자고 해도 그런 거 안 한다고 거절해. 거절해.”
“했는데. 이미.”
차인혁의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
“아아, 안돼. 우리 팀 리더의 체면이···.”
“아니야. 요샌 뭐 좀 빠지는 빙구미 이런 거로도 많이 밀더라.”
“저 비주얼에 빙구미면···. 그래 그것도 어떤 의미로는 갭모에···.”
아이들의 비관적인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재이가 TV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직접 확인하면 되지. 어땠는지.”
TV에선 차인혁이 참가한 예능 [We are Leaders]의 오프닝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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