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아시죠 저희가 밥에 진심인 거
김은지는 당황했다.
행사가 진행될 아트홀 주변은 선착순으로 배부될 예정인 정리권을 받으러 온 사람들로 아침 일찍부터 붐비고 있었다. 정리권 배부 예정 시각인 오전 9시보다 세 시간쯤 전에 현장에 도착하면 나름 한 자릿수 번대일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와, 대박.’
이미 늘어서기 시작한 줄의 뒤편으로 서둘러 뛰어가 서며 김은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 앞으로 이미 한 열댓 명은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선 뒤로도 빠르게 불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아하니 9시는커녕 7시도 되기 전에 커트라인인 100은 여유로 넘길 것 같았다.
김은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는 이미 월드 클래스 슈퍼스타이지만 대외적으론 아직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인 데다 기껏해야 나눠 준 도시락 영상 보면서 까먹으면 끝날 행사에 사람이 몰려 봐야 얼마나 몰리겠냐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안정권 내에 줄을 서는 데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커트라인 아슬아슬했거나 혹시라도 도착했는데 이미 커트라인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면 스스로 용서가 안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덕분에 회사도 쉬고. 너희가 내 워라밸 지킴이다.’
김은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행사가 평일에 진행된 탓에 당연하게도 회사에는 연차를 내야 했다. 예전엔 쉬겠다는 말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아 아주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결국 그냥 출근하곤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누가 쉰다고 딱히 그렇게 아주 노골적으로 눈치 주는 직장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알아서 기었는지 모를 기분이었다.
“야 우리는 팬 미팅 언제쯤 할까.”
“그러게 덜렁 팬덤 이름만 지어놓고 팬 미팅 일정도 안 잡고. 케이엠 일 제대로 안 하네?”
“내 친구 본진은 데뷔하면서 연간 스케줄 한꺼번에 쭉 공지했다던데.”
“근데 그랬다가 예상보다 못 뜨면 은근슬쩍 스케줄 변경하거나 취소돼서 괜히 마상만 입는 거 아니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귀에 이어폰을 꽂긴 했지만, 그냥 혼자 서 있기 뻘쭘해서 쓴 위장용이었던지라 뒤쪽에 선 팬들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이 그대로 들려왔다.
“애들 팬 미팅 때 그거 해 줬으면 좋겠다. TRPG 라이브.”
“남궁찬 꼭 냥 장갑 끼고 나와라.”
“재재님 탬버린 라이브로 들어야지.”
“나는 히든트랙 라이브.”
“야 그거는 난이도 헬인데?”
“라이브 힘들면 그냥 즉흥으로 해도 되는데.”
“근데 그러면 그냥 평범한 디스전 될 것 같은 스멜이잖아?”
“아하하,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난 재이 자장가.”
“왠지 팬미팅 중 단체 낮잠 기현상으로 신문 사회면 데뷔할 각.”
“하하핳 그거 인지도 떡상루트네.”
마음 같아선 당장 귀에 꽂은 이어폰 빼고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데 그러자니 얼굴에 깐 철판이 모자라고, 이대로 그냥 모르는 척 듣고 있자니 이미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이 반쯤 실패한 듯한 느낌에 김은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외투 자락만 쥐어뜯었다.
“어? 애들 짹짹이 올라왔다?”
한 팬의 중얼거림에 주변의 모든 팬이 일제히 핸드폰을 찾아 뒤적거리는지 주위가 일제히 부산스러워졌다. 그래 몰래 듣기 하고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어. 김은지는 가슴 깊이 느껴지는 동질감에 안도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오늘은 저희가 포션 여러분께 힐 드리는 날! 기대하세요! 두둥!
#PART.Y_POTION #음방1위축하 #팬감사이벤트 #아시죠_저희가_밥에_진심인거
“어떡해 밥에 진심이래. 대체 뭘 얼마나 주려고. 으흨흨흨”
“난 오늘 도시락 가져가려고 내 도시락 따로 싸 왔는데.”
“나도. 애들 도시락은 아까워서 못 먹을 것 같아서 이따 편의점에서 따로 뭐 좀 사려고 했는데. 근데 도시락 받아 보고 먹고 싶어지면 어쩌지.”
“여기 인혁이 손가락에 반창고 붙어 있는 거 맞지? 도시락 그까이꺼 사서 하지 뭐하러 직접 시켜.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 애들한테.”
“근데 저렇게 열심히들 했는데 우리가 도시락 열어 보지도 않고 싸 온 거 꺼내 먹으면 애들이 혹시 실망하지 않을까?”
“그건 그런데… 그렇다고 그걸 그 자리에서 홀랑 먹어 버리기도 아깝잖아. 어흑.”
팬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김은지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고쳐 멨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더니 김은지 또한 받은 도시락 대신 먹을거리를 따로 싸 들고 온 참이었다. 근데 또 아까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기껏 정성 들여 준비한 도시락을 팬들이 다들 열어 보지도 않고 들고 돌아가면 애들 입장에서는 기운 빠질 만도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정리권 배부와 입장이 시작되었다.
‘19번…….’
10번 안쪽이 대부분 무거워 보이는 장비들을 짊어지고 있는 홈마나 찍덕들, 그러니까 특수포션들인 걸 보면 아직 힐 10짜리 정도일 게 분명한 초급 포션인 자신으로서는 이 정도면 꽤 분발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팬싸 때 다짐했던 3년 후의 로드맵을 떠올린 김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원래 사람이 꿈이 커야 하는 법이지. 김은지는 정리권을 소중히 움켜쥐고 자리를 옮겼다.
- 그럼 일단 재료 손질부터 할까.
커트라인 100 아래로 안착한 부지런한 팬들이 제 번호가 포함된 섹션에 자리를 찾아 앉고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무대 쪽 조명이 꺼지고 사전 제작 된 영상이 공개되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재이였다.
- 으악!! 벌레! 벌레 나왔어! 으악!
영상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멤버들 중 이환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
- 야, 그렇다고 그걸 그렇게 던져 버리면 어떡해. 심은규 쟤 좀 진정시켜 봐.
이환이 다듬다 내던진 양상추를 주워 들며 재이가 이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은규에게 말했다.
- 이환아 일단 그거부터 내려놓고 깊게 심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옳지 잘한다.
- 소리만 들으면 이환이 아기 낳는 줄 알겠다고.
- 얼마나 세상에 원한이 깊으면 칼 들고 애를 낳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감자와 당근을 다듬고 있던 남궁찬과 엠케이가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이환과 심은규를 곁눈질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 어 그렇지. 아 그래 그 정도만 넣으면 될 듯. 이제 좀 보고 있다가 끓으면 그걸로 좀 저어 주고. 이 정도 하면 되겠죠 조리사님?
인혁과 함께 미리 계량해 둔 양념과 물을 대용량 조리 냄비에 넣고 타이머를 맞춰 조리 시간을 확인하며 재이가 옆에 선 조리사에게 확인을 구했다. 조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 진짜, 여러분 이건 아셔야 해요. 한재이 저게 집에서 뭐 만들 땐 다 대충대충이라 계량컵이나 타이머 같은 거 쓰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여러분 드릴 음식에 조금이라도 문제 있으면 안 된다고 따로 조리사랑 영양사분들까지 모셔 왔다니까요.
카메라를 바라보며 엠케이가 외쳤다. 그런 그의 뒤를 지나치며 맞받아치는 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섯 명 먹을 거 하는 거랑 100명 먹을 거 하는 게 어디 똑같은 줄 아냐. 게다가 우리 팬분들은 소중하니까.
- 뭐지 마지막 그 말 묘하게 서운한데?
- 우리도 소중하게 여겨라 한재이!
- 그렇다, 그렇다! 차별반대 차별반대!!
재이의 말에 채소를 다듬고 있던 남궁찬과 엠케이 그리고 은규가 아우성쳤다.
- 됐고. 남궁찬하고 엠케이는 그거 다 깎았으면 씻어서 좀 잘라 주고. 이환이랑 심은규는 채소 다 다듬었으면 씻어서 다른 재료들하고 섞고.
분주하게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지시하는 재이의 모습과 그런 재이의 지시에 따라 서툴지만 진지한 얼굴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를 돕는 아이들의 모습이 빨리 감기로 스쳐 지나갔다. 한참 그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훑던 화면이 점점 다시 1배속 재생으로 돌아오면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다. 했. 다…….
조리실 여기저기에 늘어진 멤버들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지만, 표정만은 밝아 보였다.
- 하얗게 불태웠어.
- 다들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
- 그러게. 막 맛없다고 남기시는 거 보면 좀 상처 입을 듯.
- 괜찮아 그래서 내가 이벤트홀에 음식물 쓰레기통 놓지 말자고 했어.
엠케이가 하는 말에 다른 녀석들이 그거 기발하다며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엠케이 말 들으셨죠?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 없으니 그냥 다 드세요.
- 저희 거 드시러 오셔서 다른 거 드시기 없기예요?
- 앗 근데 알레르기 있으신 분들은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달걀 들어갔어요. 달걀!
재이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이는 말을 듣고 있던 남궁찬이 어딘지 애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당근 많이 드세요. 당근 제가 깎았어요. 당근 먹어줘요…….
- 남궁찬이 진짜 예술혼을 불어넣어 당근을 깎았는데
- 그럼 뭐 하냐고요. 찜솥에서 쪄내니까 다 뭉개졌는데.
- 그러니 여러분 당근 드실 때마다 우리 불쌍한 찬이 좀 생각해 주세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멤버들의 수다에 카메라 너머의 스태프가 뭐라고 손짓했는지 차 리더가 황급히 마무리 멘트를 쳤다.
- 어 여러분 그동안 보내 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저희가 정성 들여 준비한 선물이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회장에서 뵐게요!
- 여러분 곧 봐요!!!
- 금방 봐요!!!
- 많이 드세요!!!
- 맛에 대한 불만은 일오팔팔 재이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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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끝나며 장내의 조명이 꺼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불빛이 돌아오는 것보다 먼저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꺼졌던 조명이 다시 밝아지며 분리되어 있던 무대가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의 일부가 되고 싶은 part of you PART.Y입니다!!!”
와아아아아—
호흡 하나 흐트러짐 없는 여섯 멤버들의 인사에 장내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제각기 다른 의상에 청색 앞치마로 통일감을 준 멤버들 앞에는 오늘의 메인 아이템인 도시락이 쌓여 있었다.
“밖에 날씨 완전 춥던데. 새벽부터 기다리셨다면서요! 저 아침에 인터넷에 기사 뜬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엠케이가 부드럽게 운을 띄웠다.
“왜 놀랐는지 아세요? 그때까지도 못 일어나고 자고 있었거든요.”
“아익 남궁찬 씨, 제 프라이버시 좀 지켜 주시죠!”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남궁찬을 째려보는 엠케이의 어깨를 툭 치며 인혁이 수습했다.
“엠케이가 늦게 일어난 건 맞는데 사실 이거 준비하느라고 새벽에야 겨우 들어와서 잠깐 눈 붙였거든요. 정성이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봐주세요!”
그러면서 살짝 눈을 찡긋해 보이는 인혁의 제스처에 여기저기서 괜찮다는 소리와 환호가 뒤섞여 들려 왔다.
“이거 식으면 맛없으니까! 얼른 오셔서 가져가세요!!”
도시락의 구성은 갈비찜, 샐러드, 볶음밥, 모둠 과일, 음료수, 스낵 한 봉지였다. 팬 사인회 때와 마찬가지로 무대에 올라가기 전 스태프가 건넨 쇼핑백에 멤버들이 건네주는 개별 포장된 음식을 받아 들고 내려오면 끝이었다. 그냥 한 팩으로 된 도시락을 상상하고 있던 팬들의 입이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밥에 진심이라더니 진짠가 봐. 이거 제작비는 나오냐.”
“케이엠 팬 이벤트 언제부터 이렇게 혜자스러웠지?”
“새벽부터 칼바람 맞고 줄 선 보람이 있다.”
“진심 팬싸보다 더 좋은 듯.”
정리권의 번호대로 줄을 서며 팬들이 수군댔다.
“근데 이런 거 계속하다간 우리 애들 거덜 나는 거 아니냐.”
“팬싸처럼 앨범 컷으로 끊는 게 맞는 듯.”
“아냐 근데 영상 보니까 애들 너무 고생한다. 이런 건 한 번만 하자.”
“그리고 그렇게 전설의 레전드가 되겠지.”
‘그래. 난 와 봤으니 이제 안 해도 될 듯. 애들 너무 힘들어 보이던데 이게 본업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지 사실.’
김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번호표를 보여 주곤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앞쪽 팬이 뭐라고 했는지 남궁찬이 허리를 꺾으면서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 했길래 저렇게 웃어?”
“자긴 다른 건 다 괜찮으니까 오빠가 깎은 당근만 골라 주시면 안 되느냐고.”
“헐. 찬이 좋아 죽네.”
“저런 드립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지?”
“부럽다. 나도 받고 싶다, 관심.”
‘나도…….’
김은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맛있게 드세요!”
“고 고맙습니다.”
엠케이와 남궁찬, 차인혁과 이환에 이어 심은규까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간 팬싸와 달리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실물 영접 타임에 적응 못 하고 어버버 하는 사이 김은지는 어느새 마지막 한재이의 앞까지 떠밀려 와 있었다. 이번 활동이 여러모로 타이트하긴 했는지 그러잖아도 좀 날렵한 얼굴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인상이었다. ‘바쁘더라도 밥 잘 챙겨 먹어.’라고 평범하지만 그래도 제일 해 주고 싶은 말을 전하려고 입을 여는데 마침 쇼핑백에 음식을 넣고 올려다보던 재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아! 크오와앙! 맞죠? 하하.”
“억… 어어…….”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이동하실게요’라는 스태프의 말에 등 떠밀려 정신없이 무대를 내려왔다.
크오와앙 맞죠?
크오와앙…….
크오와…….
크오…….
.
.
.
‘어쩌다 크오와앙…….’
무대 아래에서 쇼핑백을 끌어안고 멍하니 서 있는 김은지에게 뒤따라 내려오던 팬이 말을 걸어왔다.
“재재님이 먼저 기억해 줬죠? 완전 부러워요.”
“아… 아하하… 하하…….”
김은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해 보였다.
‘비록 크오와앙이지만.’
김은지는 넷상에서 쓰는 닉넴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진을 찍는 사람들 이미 먹기 시작한 사람들, 먹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은지는 여러 번 고민한 끝에 일단 갈비찜이 담긴 용기를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따뜻할 때 한 입 정도는 먹어 주는 것이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일 듯싶었다.
“…대박.”
혼자 중얼거리자 이미 대부분의 용기가 바닥을 보이는 옆자리 팬이 동의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무대 올라오기 직전에 담았다는 남궁찬의 말이 사실인 듯 용기를 열자 따뜻한 김과 함께 침샘을 자극하는 고기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조리사와 영양사가 옆에 붙어 있었다지만 어쨌거나 멤버들이 재료부터 직접 손질해 준 요리였다. 먹기가 아까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고기 대신 당근을 집어 들었다. 남궁찬 보고 있냐. 누나가 당근부터 먹어 준다. 잊지 않고 사진 먼저 찍고 한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자 잘 익은 당근의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적당히 감질나는 양념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미친. 존맛…….’
조금 전, 기껏 받은 도시락을 전투적으로 먹어 치우고 있던 옆자리의 팬을 힐끔거리며 아깝지도 않냐고 속으로 타박했던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다 먹어 버리겠다고 자꾸 손이 가는 젓가락을 억지로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니 먹을 거 따로 싸 왔다고 하던 제 뒷번호 팬도, 영구보존마법 같은 거 걸 수 없냐고 아까우니까 차라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집에 모셔 두겠다던 그 팬의 친구 팬도 다들 자기들이 했던 말을 기억이나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열심히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앞으로도 여유 있을 때 가끔 해 줬으면 좋겠다.’
한 번 했으니 다신 안 해도 되겠다던 생각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고 난 뒤였다. 한동안 애꿎은 나무젓가락 끝을 씹어 가며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던 김은지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나머지 도시락 용기도 꺼내 들었다.
* * *
“다들 고생 많았다!”
“진짜. 다시 하라고 해도 이렇게 못 할 듯!”
“근데 팬분들 진짜 잘 드시더라.”
“석관이 형한테 들었는데 정말로 음식 쓰레기 거의 안 나왔대.”
“어흑 진짜 우리 팬분들 다들 천사이신 듯.”
야심 차게 준비했던 이벤트의 반응이 좋은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는 법. 며칠 동안 그야말로 시간을 쪼개 가며 쏟아부은 정성이 결실을 본 듯한 느낌에 멤버들은 다들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어?”
핸드폰으로 팬 게시판을 둘러보고 있던 재이는 갑자기 울린 전화에 고개를 갸웃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근우]
이 형이 갑자기 웬일이지.
재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