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직접 부딪쳐 봐야 깨닫게 되는 일
- 그러니까.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하지만… 나 좀 도와줘라.
- …예에?
‘거 참… 이 형 의외로 뒤끝 없는 타입이었네.’
아니면 그만큼 급했거나.
뜬금없이 연락해 온 이근우와의 통화를 떠올리며 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음방 1위 공약 이벤트로 진행한 파티 도시락 프로젝트는 다행히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VD실 윤효민 실장은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비하인드 영상과 당일 이벤트 현장의 모습, 촬영에 동의한 팬들의 인터뷰 영상 등을 편집해 파티 공식 채널에 업로드했고,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했던 팬들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혜자스러운 파티 도시락에 대한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런 와중에 예전 [생존의 법칙]에서 공연했던 이근우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재이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 서로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의 메시지가 분명한 인사를 나누었던 사이 아니었던가. 승마 챌린지를 할 때도 상혁이 형과 황민석 선생님이 연락하지 않았다면 딱히 참여하지 않았을 게 분명한 사람이었다. 아 아니다, 그건 자기 이미지 어필할 기회이긴 했으니 참여는 해 줬으려나.
‘아무튼, 의외긴 했지.’
재이는 어색한 듯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본론을 털어놓았던 이근우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너 내가 ZTBC에서 예능 하는 거 알고 있…을 리는 없고. 그게 내가 ZTBC에서 예능을 하나 하고 있는데…….
- 아, 알아요. 그거 골든… 그거죠? 농장 알바 예능.
- 어? 어어. 농장 알바 아니고 농장 가꾸기. 근데 어떻게 알아? 본 적 있어?
- 아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요. 근데 그건 왜요?
- 어. 그게 말이지. …너 혹시 시간 좀 되냐?
이근우의 용건은 간단했다.
자기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할 의향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자신에게까지 연락하게 된 건지 궁금해 조금 더 캐묻자 이근우가 곤란하다는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 뉴스 봐서 알지도 모르겠지만 같이 출연하던 사람 중 하나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갑자기 하차하게 됐거든. 여론도 그렇고 피디가 이런 쪽으로는 칼 같은 사람이라 찍어 뒀던 미방영분 싹 밀어 버리고 새로 찍는다는데. 문제는 이게 시즌 중반 넘어간 마당에 적당한 사람 구해 넣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
그리고 이근우는 말의 물꼬가 트이자 속사포처럼 쏟아 내기 시작했다.
- 요새 비슷한 컨셉의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 우리 프로그램 자체가 그다지 시청률이나 화제성에서 주목받고 있던 편이 아니기도 해서. 잘못하면 이대로 프로그램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다는데 그건 절대 안 되지. 시청률이 소소하긴 했어도 이렇게 어이없이 망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고. 게다가 나 아직 차기작 확정된 것도 없는데 이대로 붕 떠 버리면 이미지에 타격 와서 안 돼. 내가 어떻게 키워 온 필모인데. 어떻게든 시즌 하나는 채워야 안 쪽팔릴 거 아니냐고.
전지적 본인 시점에서의 상황 설명을 마친 이근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 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내가 진짜 오죽하면 너한테까지 연락했겠냐. 생법 때 우리가, 아니 내가 처음에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잖아? 승마 챌린지 할 때도 연락 오자마자 바로 도와줬고. 아니 아니, 내가 지금 그거 해 줬다고 생색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 어쨌거나 재이 너 시골 출신이라 이런 거 익숙할 거 아니야. 아니, 아니 일 잘하게 생겨서 부르려는 건 절대 아니고. 너 요새 보니까 되게 잘 나가던데, 이참에 프로그램 하나 먹는 셈 치고 와서 얼굴도장 잘 찍고 가면…….
제작진과는 얼마나 얘기가 된 사항이냐고 묻자, 우리가 그렇게 친하진 않지만 인생 길게 보고 딱 한 번만 같이 가자는 말을 혼잣말처럼 늘어놓고 있던 이근우가 급 자신감을 회복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야, 네 얘기했더니 제작진이 얼마나 좋아했는 줄 아냐? 피디님이랑 작가님이 너 이번에 찍은 그 유치원 애들 나오는 거? 그 예능 덕에 너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시더라고. 아무래도 우리 프로그램하고 키워드가 좀 겹치니까 모니터링할 겸 보셨다나 봐. 작가님은 네 그 자장가 완전 좋다고 너 꼭 불러서 우리 프로그램 엔딩곡도 좀 쓰라고 하자 시더라. 나 참. 하긴 근데 나도 그 자장가 좋긴 하더라. 요새 차 안에서 자주 듣는다고. 잠 진짜 잘 와.
아무튼, 그래 사실 제작진 쪽에서 따로 니네 회사에 섭외 넣긴 할 건데 너 벌써 혼자 나온 예능이 몇 개 되는 데다 그 파일럿 고정 들어가면 예능으로 스케줄 더 안 뺄지도 모른다고 지레 걱정들 하시길래 그럼 내가 전화 한번 해 본다고 했지.
- 아아, 또 제작진한테 저만 믿으시라고 호언장담하셨구나?
‘제가 얘랑 생법 같이 찍었잖아요. 제가 말해 볼게요. 본인이 나가고 싶다면 회사 측에서도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겠어요?’
허세 빼면 시체인 이근우가 제작진 앞에서 큰소리 떵떵 쳤을 모습이 눈앞에 자동 재생 되는 것 같은 느낌에 재이가 피식 웃으며 묻자 핸드폰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호언장담이라니 그 무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거지. 그래서, 어때? 함 해 보지 않을래?
이근우와의 통화를 떠올리고 있던 재이는 생각난 김에 검색창에 ZTBC 농장 가꾸기 예능 [GOLDEN LEAF FARM]을 치고 검색을 해 봤다. 눈길을 끈 것은 역시 연관 검색어를 타고 주르륵 뜬 최신 기사들이었다.
[속보] 오준오 당분간 모든 활동 중단하고 자숙하기로.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방송가 비상
[2보] 오준오 ‘뼈를 깎는 참회와 반성의 시간 가질 것’… 출연 중이던 광고, 드라마, 예능 줄줄이 하차
[특집] 배우 오준오 활동 중단 선언. 출연 중이던 프로그램에 차질 불가피 GOLF 등 조기 종영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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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 분위기 괜찮을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궁찬이 재이가 보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힐끗 들여다보곤 말했다. 남궁찬이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준오는 작년에 찍은 영화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순식간에 톱스타의 대열에 오른 젊은 배우였다. 충무로 대세라는 언론플레이와 함께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젊은 배우라는 이미지를 어필하던 중 음주 운전 스캔들이 터진 것이었다. 게다가 조용히 묻으려다 주변인의 제보로 들통 난 경우라 죄질이 나빴다. 소속사 측에서 뒤늦게 사과 성명을 내고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싸늘해진 여론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스케줄 전면 취소와 무기한 자숙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그 여파는 고스란히 그가 출연하고 있던 광고 및 프로그램들에 이어졌다.
이근우가 출연하고 있던 ZTBC 예능 프로그램 [GOLDEN LEAF FARM]도 그중 하나였다. 10회 예정의 프로그램 중 이미 5회까지 방영, 7회분까지는 촬영도 이미 끝난 상태였다. 대박도 아니고 쪽박도 아닌 애매한 시청률이 지속되던 중 터진 메인 캐스트 오준오의 하차는 프로그램의 조기 종영을 부를 수도 있는 그야말로 대형 악재였다.
이런 상황에서 들어가는 재촬영이 달가울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한껏 다운된 현장 분위기에 뒤늦게 합류해서 촬영해야 하는 예능이라니. 예능 데뷔치고 너무 혹독한 거 아니냐고. 상상만으로도 부담감이 밀려와 속이 꽉 막히는 기분에 남궁찬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쫄 거 뭐 있어. 우리 들어갔다고 더 망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속 편하지.”
“넌 참 그 신경 하나는 진짜 타고났다. 정말. 존경한다 한재이.”
재이의 무덤덤한 말에 남궁찬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사실 재이의 예능 출연을 놓고 그 필요성에 대해 회사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팀으로서의 활동이 중요한 시점에 너무 개인 활동이 그것도 예능에 편중되어 두드러지면 이미지 구축에 안 좋을 수 있다는 의견과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라고 지금 이 시점에서 방송사 쪽에서 직접 온 컨택을 거절하는 것은 득보단 실이 많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예능 노출이 상대적으로 덜 된 멤버 중 하나인 남궁찬을 붙여 출연하는 조건으로 제작진과 교섭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담당 피디는 체면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기획사와의 쓸데없는 기 싸움에 집착하느니 요구대로 한 명 더 얹더라도 싹수 있어 보이는 신인과 관계를 쌓아 두는 편을 택했다. 피디는 최종 판단은 자신이 직접 보고 나서 하고 싶다며 작가와 함께 대뜸 멤버들이 후속곡 안무 연습에 한창인 케이엠 본사 앞까지 찾아왔다. 그리곤 한재이와 남궁찬을 만나 몇 마디 묻고는 그대로 다음 촬영 날 보자며 자리를 떴다.
“대체 피디님은 우리의 뭘 보고 결정하신 걸까?”
“대체 너는 그런 게 왜 궁금하냐?”
“보통은 궁금해하지. 말해두지만 한재이 네가 이상한 거라고.”
남궁찬의 말에 재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말해 줄까? 짠맛을 원해 단맛을 원해?”
“…다 단맛?”
“음, 미안. 생각해 보니 딱히 없네.”
“에잇. 그럼 짠맛은?”
“어차피 망조 든 프로그램 비슷한 값으로 두 사람 쓸 수 있으면 일단 넣어서 화면이나 채워보자는…….”
“아아악 그만해. 짠맛 원한댔지 누가 악플 달랬냐.”
“그게 그거지.”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저거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남궁찬을 힐끔 쳐다본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그런 건가. 나도 내가 한재이 덤으로 딸려 들어간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다고. 그래도, 그쪽에서 먼저 컨택 들어와서 가는 건데. 잘하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 나름 음방 1위도 찍고 올해 나온 신인 중에선 그래도 제일 잘됐다는 소리 듣는 팀인데. …물론 포션피셜이긴 하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쪼그라들어 먼지처럼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심은규의 소심병이 옮기라도 한 걸까. 남의 속도 모르고 단독 스케줄 부럽다며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던 팔자 눈썹의 멤버를 떠올리며 남궁찬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남궁찬 다리 좀 떨지 마, 정신 사나워.”
“으, 긴장된다고.”
“대체 넌 그 멘탈로 지금껏 무대는 어떻게 뛰었냐.”
“그건 연습한 만큼 거두는 거고. 이건 연습이고 뭐고 없잖아.”
“그냥 대본대로 해. 대본대로.”
재이가 던진 말에 남궁찬은 이미 여러 번 보고 또 봐서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대본을 뒤적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룹 파티에서 랩과 댄스를 맡고 있는 남궁찬입니다. 아, 파티할 때 랩댄스를 한단 얘기가 아니고. 저희 그룹명이 파티예요. 굉장하죠? 아. 하. 하.”
“…대본이 문제일까 네가 문제일까.”
“왜지? 아까보다 잘한 것 같은데? 석관이 형, 어땠어요? 지금 건 좀 괜찮지 않았어요?”
“어? 어어, 어. 지금 운전하느라 못 들었다. 미안.”
석관이 얼버무리며 핸들을 꺾었다. 남궁찬이 뭐라고 투덜거리며 대본을 뒤적이는 것을 곁눈으로 흘기며 재이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에서 내려 한가로운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 * *
‘그놈이 온다.’
이근우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촬영 준비에 한창인 피디를 비롯한 제작진들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잘못하면 멀쩡한 프로그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래도 네 덕분에 일꾼은 졸업이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스냅백을 쓴 커다란 덩치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스크류박. 예능 욕심만 빼면 멀쩡하게 잘나가는 작곡가 겸 래퍼였다. 아니 근데 지금 이 양반이 뭔가 큰일 날 소리를 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
“네가 데려왔다는 신인, 시골 출신이라며? 게다가 둘이나 오니, 이제 힘 드는 일은 젊은 애들한테 시켜도 되겠다 싶어서?”
다 알면서 뭘 묻냐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덩치에 맞지 않게 은근한 말투로 소곤대듯 이야기하는 스크류박을 이근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 줘야 이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잘 찐 고구마를 한입 가득 베어 문 것 같은 기분으로 이근우는 입을 열었다.
“그… 형, 그게 있죠. 걔들이 일꾼으로 온다는 생각은 버리시는 게…….”
“솔직히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오준오 그놈 내가 언젠간 사고 칠 줄 알았다. 인기 좀 얻었다고 어깨에 힘 빡 들어가서는 여기 와서도 궂은일은 안 하려고 슬슬 빼는 게 진짜 꼴불견이었는데.”
“허허허… 형… 그, 아무리 그래도, 듣는 귀도 있는데, 여기서 이러시면…….”
“아무튼, 패기 넘치는 신인들이 와서 분위기 좀 띄워 주면 좋겠다. 이왕이면 싹싹한 애들이면 좋겠는데, 어때?”
“싹싹… 요…….”
이근우는 ‘그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급한 마음에 부르긴 했는데 막상 또 같이 부대끼며 촬영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이. 아니 딱히 쫄았다는 건 아닌데. 기왕이면 진짜 어느 한쪽이 은퇴할 때까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어쩌겠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근우는 스멀스멀 본능처럼 차오르는 불안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걱정 마. 내가 또 가요계 선배잖냐. 예의 없이 굴면 그냥 콱.”
장난스럽게 손으로 목을 뎅겅 해 보이며 웃는 스크류박을 보며 이근우는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형… 그러다 형 목이 뎅겅 하는 수가 있다고요.’
지금이라도 그러지 마시라고 경고라도 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아니 딱히 경고를 해 주려면 자신의 흑역사부터 줄줄이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세상엔 직접 부딪쳐 봐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었다.
‘류박이 형도 이제 그런 인생의 경험을 하나쯤 쌓을 때가 된 거지.’
이근우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스크류박이 흥이 난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