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러게 애초에 내기를 왜 해요
“이야, 드디어 왔구나, 우리 일꾼들.”
뭐야, 이 사람.
재이는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TV에서 종종 보던 작곡가이자 래퍼, 아니, 예능인 스크류박과 충무로 액션 블루칩 이근우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과 남궁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꾼 아니라면서?’
힐끔 그 옆에 선 이근우를 바라보자 자신의 눈빛에 담긴 뜻을 읽었는지 그가 어깨를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어휴. 형은 어떻게 지금 막 내려온 애들을 굴릴 생각부터 하세요? 우리 그런 프로 아니잖아요. 명색이 힐링이 테마인 프로그램에서 살벌하게.”
애써 수습해 보려고 하는 이근우의 노력이 무색하게 스크류박이 말했다.
“우선은 그 힐링이란 게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배워야지, 안 그래?”
눈치 없는 스크류박의 대답에 이근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으러 온 줄 알겠어.’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파티의 한재이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룹 파티에서 랩과 댄스를 맡고 있는 남궁찬입니다. 아, 파티할 때 랩댄스를 한단 얘기가 아니고. 저희 그룹명이 파티예요. 굉장하죠? 아. 하. 하.”
말릴 새도 없이 와다다 대본에 있던 대사를 그대로 쏟아 내며 덩달아 폴더 인사를 하는 남궁찬의 모습에 재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둘을 보고 있던 스크류박이 와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하다 보면 차차 익숙해질 거야.”
“네, 선배님. 기대되네요.”
친한 척 다가와 자신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은근한 미소를 짓는 스크류박에게 재이는 예의 바른 표정으로 웃으며 반듯하게 대꾸했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그 미소에 남궁찬과 이근우가 동시에 움찔 몸을 떨었다.
피디와 작가, 촬영 스태프들과 인사를 마치자 곧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GOLDEN LEAF FARM], 줄여서 골프의 연출을 맡은 권유승 PD가 간단하게 오늘 촬영의 플로우를 설명했다.
“오전 촬영은 2인 1조로 진행하겠습니다. 스크류박 씨는 재이 씨와, 근우 씨는 남궁찬 씨와 함께 농장을 둘러봐 주세요. 언제나 그랬듯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팀원과 상의해서 적절하게 나누어서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팀이 발표되자 이근우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이상해 보일까 봐 자제하고 싶었으나 한 번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려 주변을 둘러보다 아까 자신을 남궁찬이라고 소개한 한재이네 그룹 멤버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돌치고는 꽤 커 보이는 키도, 서글서글한 인상도, 조금 긴장한 듯 아직 좀 어색해 보이는 표정도, 다 마음에 쏙 들었다. 백 점 만점에 백이십 점이었다. 그럼 그럼. 얘가 내 동아줄인데. 마음에 들고말고.
이근우는 한재이와 떨어졌다는 생각에 자꾸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깨물어 참으며 속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옆에 서 있던 스크류박이 이런 자신의 반응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만 아니면 돼.’
이근우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권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신기하네…….’
권 PD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렇게?”
“아뇨. 선배님 그렇게 촘촘하게 심어선 애들이 자라나질 못하죠. 누가 선배님 발을 계속 밟은 채로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짜증 나죠? 얘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어… 그럼 이렇겐가?”
“하아, 선배님, 이거 진짜 해 보신 거 맞아요?”
숙소 한쪽 마당에 마련되어 있던 텃밭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종삽을 들고 쭈그리고 앉아 작업에 열중인 스크류박과 그 옆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런 스크류박에게 중간중간 잔소리 섞인 조언을 던지고 있는 한재이가 있었다. 원래 모두가 예상했던 것은 농장 생활 선배인 스크류박이 한재이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참이 쓸 만한지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어째선지 막상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예상과는 정반대의 그림이었다.
‘근데 또 그게 묘하게 설득력 있단 말이지.’
이젠 아예 삽 쥐는 법부터 새로 가르치고 있는지 스크류박이 쥐고 있는 모종삽의 손잡이를 대신 잡아 보이며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하고 있는 재이의 얼굴을 모니터 너머로 확인하며 권 PD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위아래 따지기 좋아하는 스크류박이 한마디 토 달 엄두도 못 내고 신참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기선제압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기선제압을 당해 버리셨네.
권 PD가 빙긋 웃었다.
‘재밌잖아. 이거.’
“야, 안 되겠다, 조금만 쉬었다가 하자.”
비닐 덮개를 만들어 둔 숙소 옆 텃밭에서 배추와 상추의 모종을 옮겨 심고 있던 스크류박이 더는 안 되겠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이가 대답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기운 내시죠.”
“힘들어, 못 하겠어, 나 죽어.”
“에이,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이거 다 하면 축사에서 동물 구경시켜 주신다면서요. 저 완전 기대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점심 먹기 전에 보러 못 갈 것 같은데요.”
“그럼 나 대신 네가 하던가.”
“그건 아니죠. 아까 선배님이 먼저 시범 보여 주신다고 전 여기 딱 서서 가만히 보고나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땐…….”
스크류박이 말문이 막힌 듯 어물거렸다. 그땐 설마 네가 이렇게 빠삭할 줄 몰라서 한 말이니 지금이라도 빨리 좀 도우라고 하기엔 아직 다 내려놓지 못한 선배로서의 체면이 발목을 잡았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 내기하지 않을래?”
“내기요?”
스크류박이 던진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래 내기. 이거 모종 남은 거 누가 빨리 심나 내기해서 진 사람이 저기 저 사료 축사 쪽으로 옮기기, 어때? 추운 날씨에 몸풀기로는 딱이지 않냐?”
너도 왔는데 나도 좀 쉬어야지.
뒷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스크류박이 물었다.
“그럼 기왕 하는 거, 저 사료 축사 쪽으로 옮기고 그 김에 축사 청소도 하는 건 어때요? 아까 근우 형 얘기 들어보니 청소할 때 됐다고 하시던데.”
“재이 너… 보기보다 의욕 넘치는구나?”
자신의 내기를 받은 것도 모자라 하나 얹어 역제안하는 재이의 말에 스크류박이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가 좀. 이런 건 할 때 화끈하게 해야 한다고 배워서.”
“좋아 신인이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 그럼 어디 한번 해 볼까? 너 어리다고 내가 안 봐준다?”
“제가 연필보다 호미를 먼저 잡고 큰 농가의 자식인 걸 모르시는구나. 저야말로 선배님 사정 안 봐 드립니다?”
나중에 후회하셔도 몰라요.
재이가 느긋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 *
남궁찬은 당황스러웠다.
“그럼 한재이가 연습생 때 진짜 퇴출 1호가 별명이었다고? 언플하려고 플롯 짠 게 아니고?”
눈을 빛내며 묻는 이근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론 그래요. 원랜 진짜 존재감 없었던 녀석이었다고요. 근데 뭐 저도 연습생 시절 때 한재이랑 친했던 게 아니라 건너 건너 들었을 뿐이니 진짜 그랬는지 어쨌는지까진 잘 모르겠지만요.”
자신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이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숙소에서도 요리하고 그러냐? 나 생법 때 잠깐 먹은 것도 잊혀지지가 않아서 요새도 가끔 생각나고 그러는데. 그게 내가 추억보정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 그 자식이 요리를 잘해서 그랬던 건지 잘 모르겠다고. 니네 그 서바이벌 했던 거 보니까 막 숙소에서 맨날 파티하던데. 진짜 그렇게 맛있어?”
“재이가 요리 진짜 잘하긴 하죠. 사실 서바이벌하면서 그렇게까지 다들 친해지기 쉽지 않은데.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맨날 다 같이 모여서 밥 먹다가 정들고 그랬던 것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형 저희 나온 거 다 챙겨 보신 거예요?”
자신의 물음에 이근우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 둘러대듯 대답했다.
“어? 아, 어. 내가 요새 휴식기라 시간이 좀 비거든. TV 돌리다 보니까 니네 나왔던 프로그램 그거 재방송하더라고. 그래서 몇 번 봤지. 챙겨보긴 뭘. 내가 그렇게까지 막 한가하고 그런 사람 아니라고.”
“아… 예…….”
“근데, 한재이 그 자식이 원래 작곡도 했었어? 전에 어디서 인터뷰한 거 보니까 이번에 자작곡 내면서 작곡 처음 손댄 거라던데. 그게 첫 자작곡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는 퀄이잖아. 천재나 뭐 그런 거 아닌 이상?”
“…….”
남궁찬은 대답 대신 이근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 듯 어느새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이근우의 멀쩡한 옆얼굴을 쳐다보던 남궁찬은 오늘 반나절 내내 고민하고 있던 것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팬이네.’
저게 말로만 듣던 업계 팬이구나. 그것도 남팬.
이야 한재이 능력 쩌네.
촬영이 시작되고 비는 시간에 틈틈이 재이에 대해 물을 때만 해도 ‘아, 이 형이 나랑 있기 서먹해서 공통 화제를 찾느라 노력하시는구나.’ 싶어서 조금 감동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서먹함을 지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화제가 반나절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꾸준히 반복되었다. 이 정도면 눈치채지 못하는 쪽이 이상했다. 힐끔 카메라 너머를 쳐다보자 미묘한 표정의 조연출이 눈에 들어왔다.
‘PD님도 눈치채신 모양이네.’
남궁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여기 둘이 있어 봐야 재미없겠는걸.
“형, 이제 얼추 다 돌아본 것 같은데 재이 쪽이랑 합류할까요?”
“어, 어?”
‘뭐지? 저렇게 티 다 내 놓고 설마 아직 덕밍아웃 하고 싶지 않으신 거야? 특이하신 분이네. 그래도 뭐 본인이 그러시다는데, 맞춰 드려야지.’
재이 쪽으로 합류하자는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이근우의 모습을 보며 나름 추측을 끝낸 남궁찬이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재이는 걱정 안 되는데 사실 스크류박 선배님이 좀 걱정돼서.”
그 말에 이근우가 퍼뜩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게. 그 형이 아직 철이 좀 덜 들어서. 괜한 짓 해서 제 무덤 파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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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뭐야?”
제작진의 연락을 받고 재이와 스크류박이 있다는 축사 입구로 들어오던 이근우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가까스로 물었다. 그 목소리에 뒤돌아본 재이가 싱긋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어? 근우 형, 오셨어요? 남궁찬, 일 많이 배웠냐?”
평온한 어조의 인사말과 함께 싱긋 웃는 모습이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 해맑았다.
“어? 어. 근데 넌… 아니 저기 스크류박 선배님은 뭐 하시는 거야?”
남궁찬의 물음에 재이는 그때까지 구경 중이던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선 마침 스크류박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닭들을 한군데로 몰아넣고 축사를 청소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스냅백이며 의상이며 할 것 없이 여기저기 깃털과 먼지가 묻어 너저분했고 얼굴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땀투성이였다. 그에 반해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재이는 얼굴에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아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근우가 중얼거린 말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기했는데 선배님이 지셨거든요. 벌칙으로 축사 청소 중이시죠.”
태연한 재이의 말투에 이근우가 중얼거렸다.
“…저 형, 진짜 제 무덤을 파고 입장 중이었을 줄이야…….”
“선배니-임, 힘내세요! 거기만 하시면 이제 끝이에요!”
재이의 한가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결국, 세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 홀로 축사 청소를 마친 스크류박은 더는 못 버티겠다는 듯 길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고 나 죽는다. 나 죽어.”
“그러게 애초에 내기를 왜 해요.”
“그것도 한재이랑.”
스크류박의 앓는 소리에 이근우와 남궁찬이 기다렸다는 듯 타박을 주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생긴 건 딱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일 것같이 생긴 녀석이라 방심했나? 아니 근데 무슨 애가 손이 그렇게 여물어. 연필보다 호미 먼저 잡았다더니 농담 아니고 진짜였나 봐. 미쳤다고 저런 애한테 덤볐지. 저 이근우가 슬슬 피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자신을 놔둔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세 사람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스크류박이 애처롭게 외쳤다.
“얘들아, 그냥 가면 어떡해. 나 좀 데리고 가…….”
* * *
“그래서, 이걸 팔아 오라고요?”
숙소에 도착한 사람들은 PD가 내놓은 제안에 어이없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힐링이라며.”
“대체 어디가?”
재이와 남궁찬이 서로를 마주 보며 중얼거리는 말에 스크류박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청률 안 나온다고 우리 몰래 프로그램 컨셉 갈아 버린 거예요, 피디님?”
“요샌 중간에 노선 트는 거 시청자들이 별로 안 좋아하던데.”
이근우가 이어 받자 재이가 한마디 보탰다.
“하던 거나 제대로 하라는 소리 듣기 딱 좋죠?”
“근데 하던 거 하던 애가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잖아?”
“자학 개그치고 별로 안 웃겼어요. 지금 건.”
한재이의 시큰둥한 대답에 스크류박이 남궁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남궁찬 말해봐라, 한재이 쟤 혓바닥은 원래 저렇게 맵냐?”
“저 정도면 아직 순한 맛인데요.”
남궁찬의 말에 스크류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이걸 팔아서 그 돈으로 식자재를 구하라는 소리네요?”
재이의 질문에 권 PD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앞에는 지난 촬영 때 수확해 뒀던 고구마와 감자가 박스째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