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너희들 보기보다 되게 끈끈하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재이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쪽 동네에서 자신이 꿈꾸던 삶이란 이런 게 아니었다.
손때 묻은 류트 하나 등에 짊어지고 풀피리 꺾어 불면서 느긋하고 여유롭게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자유로운 삶.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부르며 이 한 몸 배부르고 등 따습다고 느낄 정도로만 벌어먹는 욕심 없는 삶.
더러운 정치질도 비열한 수작질도 피 냄새와 원한 섞인 울부짖음도, 모든 인생사의 아비규환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관조하는 그런 고고하고 여유로운 삶을 원했다.
그랬는데.
‘하아, 난장판.’
재이는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함께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에서는 이미지 게임이 한창이었다.
오늘의 MC를 맡은 선겸과 재민 중 재민이 차인혁의 등 뒤에서 제시어가 적힌 패널을 들어 올리면 맞은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멤버들이 차인혁에게 그것에 대한 설명을 내놓고 그것을 토대로 차인혁이 정답을 유추해 내는 방식이었다.
“아앗!! 리더야!! 그거 그거!! 한재이가 맨날 입버릇처럼 하는 말!!”
제시어를 보자마자 남궁찬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늦잠 잔 놈 밥 없다?”
“아니 그거 말고!”
“네 글자! 네 글자!”
“우리 막 각자 알아서 살라고. 네 인생 책임지는 건 결국 너 자신이라고 맨날 막 그러잖아!”
“스텝 업 때부터 이어져 온 스피리뜨!”
멤버들이 제각각 아우성쳤다.
“아아, 각자도생?”
딩-동-댕!
다른 편 떨어진 곳에 있는 MC석에 앉은 선겸이 실로폰을 울렸다.
“정답입니다. 그럼 다음 제시어 주세요!”
선겸의 지시에 재민이 곧바로 다음 제시어가 표시된 패널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 아까 거, 그 각자도생의 반대말!”
“우리 팀에 없는 거!”
“서로 막 밀고 돕고 하는 그거!”
“이것도 네 글자야 네 글자!”
“…음.”
차인혁이 고민에 빠진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자 다급해진 이환과 남궁찬이 앞다투어 외쳤다.
“내 위로 부모님, 그 위로 조상님!”
“쌍으로 부려 먹고 쌍으로 조리돌려!”
“…뭐?”
차인혁이 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엠케이와 은규가 소리쳤다.
“야 이거 우리하고 너무 안 어울려서 차 리더가 감도 못 잡는 듯!”
“아 패스해 패스!”
“패스요! 재민 씨 다음 문제 주세요!”
다급한 패스 사인에 재민이 다음 제시어를 꺼내 들었다. 제시어를 본 남궁찬이 말했다.
“야 이건 그거다. 리더야, 한재이랑 홈트하고 다음 날 근육통 와서 파스 붙인 엠케이한테 네가 뭐라고 했었지?”
남궁찬의 말에 이환이 거들었다.
“남궁찬이 밤에 혼자 몰래 초콜릿 왕창 까먹고 다음 날 얼굴에 여드름 나서 혼났을 때 우리가 해줬던 말!”
이환의 말에 차인혁이 감 잡았다는 듯 외쳤다.
“아! 자업자득!”
딩-동-댕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실로폰을 두드리며 게임의 종료를 알리는 선겸의 목소리에 녀석들이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흐, 아까 그걸 맞춰야 했는데!”
“아쉽다, 근데 그건 사실 너무 어려웠어.”
“그치. 차 리더가 모를 만도 해. 우리 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고.”
“더 할 수 있었는데 거기서 시간 너무 오래 끌어서 망했어.”
그걸 보고 있던 선겸이 허리를 굽혀 웃어가며 물었다.
“중간에 부모님 위에 조상님 외친 분 누구셨죠?”
“아… 저요.”
“쌍으로 부려 먹고 조리돌린다고 하신 분은요?”
“전… 데요.”
이환과 남궁찬이 조심조심 손을 들었다.
“제시어가 뭐였는지 시청자 여러분들께도 알려 주시겠어요?”
선겸이 웃으며 한 말에 이환이 머뭇대다 대답했다.
“…제시어는 ‘상부상조’였습니다.”
“아하하하하.”
선겸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제시어 카드를 들고 있던 재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머지 두 개는 맞췄잖아요.”
“맞아. 세 개 중에 두 개나 맞췄으니 이 정도면 완전 잘한 거죠.”
“살아가는 데는 역시 긍정적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저희 파티가 좀 많이 포지티브 하죠.”
선겸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없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가운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고한 삶 어디 갔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은 물 건너간 것 같다는 생각에 재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제작진의 사인과 함께 카메라의 불이 꺼졌다. 대기실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한재이, 괜찮냐?”
인혁이었다.
“뭐가?”
“아니, 오늘 컨디션 안 좋은가 해서.”
인혁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뒤따라 오던 엠케이가 거들었다.
“그러게. 오늘 좀 이상하네. 어디 아파?”
그 한마디에 뒤따라오던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마디씩 보탰다.
“왜, 뭔데? 한재이 아프대?”
“어디가? 얼마나? 석관이 형 부를까?”
“어쩐지. 아까 촬영할 때도 답잖게 조용하더라.”
“아니, 아니. 아픈 거 아니거든.”
재이가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대답하자 다섯 쌍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그에게로 쏠렸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재이의 대답에 멤버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불길해. 한재이가 생각할 게 있다니.”
“새로운 데스노트라도 작성 중인가?”
“야, 남궁찬. 쟤 골프 촬영 가서 누구랑 싸웠냐?”
은규와 주거니 받거니 하던 이환이 남궁찬에게 물었다.
“아니, 딱히 뭐 없었는데? 아 혹시 엠케이가 근육통 난 거로 한재이 탓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게다가 탓이라니? 난 그냥 운동은 똑같이 했는데 한재이 혼자 멀쩡한 거 부럽다고 했을 뿐인데!”
남궁찬이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자 엠케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뭔가 좀 예전에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많이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문득 들어서.”
관조적인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고 싶었던 과거의 자신은 이 시끄럽고 복잡한 녀석들과 이미 있는 대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재이의 말에 멤버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가?”
“파티가.”
재이의 대답에 이번엔 멤버들의 표정이 한껏 심각해졌다.
“뭐지? 한재이의 상상 속 파티라니. 왠지 무섭잖아.”
“뭘 상상했건 지금보다 뭔가 엄청날 것 같아.”
“근데 그럼 혹시 우리 지금 까이고 있는 거야?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야! 네 이놈들, 더 잘하지 못할까!! 뭐 이런?”
“윽. 리얼하게 일리 있어서 무섭다.”
“야, 한재이 천천히 가자 천천히. 우리 이제 막 데뷔했는데.”
마지막 차인혁의 말에 멤버들이 인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와 리더가 간만에 리더하네.”
“그러게. 지금 건 좀 멋있었어.”
“그래 한재이. 우리 데뷔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뭘 그렇게 급해. 네가 무슨 상상을 했건 천천히 만들어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다 같이.
은규가 말했다.
‘다 같이.’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리온에게도 재이에게도 ‘다 같이’라는 건 꽤나 생소하고 어색한 단어였다. 왠지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분을 가만히 곱씹고 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엠케이가 짐짓 커다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 뭔데. 이런 감동 모먼트는 좀 제대로 된 데서 하면 안 되냐고.”
“그러게 꼭 이렇게 사람들 다 오가는 방송국 복도에서 갑작스럽게 이래야 하냐.”
남궁찬이 냉큼 거들었다.
“내 말이. 기왕 할 거면 라이브앱 켜고 대대적으로 중계라도 해야 맨날 우리가 싸우기만 하는 줄 알고 걱정하는 팬분들께도 체면이 좀 서지. 이게 뭐야. 진짜 간만에 잡은 찬스를 이렇게 허무하게.”
“갑자기 분위기 잡은 한재이가 잘못했네. 앞으로 이런 건 진짜 사전에 좀 의논하고 하자고.”
이환과 은규가 투덜거렸다.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해. 우리가 언제까지나 네 백업을 해 줄 거라고 믿으면 안 된다고 한재이. 각자도생, 알지?”
인혁이 재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뭐! 가만히 있는 사람 괜히 찔러보고 지들끼리 온갖 설레발은 다 쳐 놓고선 나한테 왜 덤터기야.”
“오구오구 그래쪄요. 우디 재이가 억울해쪄요. 형아들이 계속 쭉 같이 놀아 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네네.”
“…엠케이, 1절만 하자?”
“…어. 그래.”
정색하고 노려보는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머쓱한 듯 목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어? 뭐야, 왜들 여기서 이렇게 심각해? 무슨 일이야?”
마침 지나가던 선겸이 복도 어중간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파티 멤버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아, 한재이가.”
“재이가.”
“아 저희 메보가.”
당황한 듯 우르르 같은 말을 쏟아내는 녀석들을 보고 선겸이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너희 뭐야. 어미 닭 쫓는 병아리들같이. 그래, 재이가 뭐?”
“아 흠. 음. 재이가 저래 봬도 섬세하거든요. 저게 정기적으로 우쭈쭈가 필요한 녀석이라.”
인혁의 말에 재이가 눈을 치켜뜨고 뭐라 하려는데 그것보다 먼저 선겸이 말했다.
“이야, 그렇다고 멤버들이 다들 복도에 멈춰서서 우쭈쭈 해 주고 있었던 거야? 너희 보기보다 되게 끈끈하다. 의외긴 한데 보기 좋네?”
우린 멤버가 열둘이나 돼서 일단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든.
선겸의 칭찬 아닌 칭찬에 멤버들의 얼굴이 제각각 일그러지며 한마디씩 뱉어 냈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저희가 끈끈한 거면 다른 팀들은 뭐 고성능 접착제급일 듯.”
“한재이 저거는 케어 안 했다가 나중에 터지는 게 더 무서워서.”
“쟤가 우리 그룹 공식 흑막이라서요.”
“원래 약을 자주 쳐 줘야 탈 없이 잘 굴러가는 법이잖아요.”
마지막에 툭 내뱉은 인혁의 말에 선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풉 웃어 버렸다.
“저희 팀 컨셉이 몰이예요. 선배님. 틈만 보이면 몰린다니까요. 선배님도 조심하세요.”
이것들은 항상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하이에나들이라고요.
재이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리며 내뱉은 말에 정신없이 웃던 선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하하핳, 그래그래. 알았어. 조심할게. 너희 대체 무슨 팟인가 했더니 몰이팟이었냐고. 크흑흑흑”
- 곧 촬영 시작합니다. 스탠바이 해 주세요.
마침 들려온 스태프의 목소리에 멤버들은 결국 대기실까지 돌아가 보지도 못한 채 다시 스튜디오로 걸음을 옮겼다.
* * *
황재민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도 백스테이지에서와 다름없는 텐션으로 와글와글 떠드느라 정신없는 파티 멤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좋겠다.’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스스로도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와 함께 MC석에서 파티 멤버들을 구경하고 있던 선겸과 눈이 마주쳤다. 선겸이 네 속을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 보이는 것에 재민은 왠지 괜히 민망해져 시선을 쓱 옆으로 돌렸다.
파티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자신이 속한 그룹 RS6는 태영 기획이 몇 년에 걸쳐 야심 차게 준비한 팀이었다. 실력 있는 멤버들의 선정, 앨범 구성과 안무, 런칭 기획 같은 기본적인 사항 이외에도 치밀하게 분석한 자료에 맞춰 멤버들 간의 관계성이라던가 멤버 개개인의 캐릭터 설정까지 세팅한, 그야말로 성공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그룹이었다.
꿈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은 바닥이지만 자신이 보기엔 결국 자본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비즈니스였다. 아역 배우로 남들보다 빨리 이 업계에 발을 들였던 재민으로서는 아이돌이라는 직업군으로 회사에 채용된 이상 회사가 자신에게 할당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자잘한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멤버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로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재민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웃어 젖히고 있는 파티 멤버 몇몇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데뷔 쇼케이스를 코앞에 두고 멤버 중 하나가 돌연 잠적해 버렸다. 자신이 꿈꿔 왔던 것과 너무 다르다는, 재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의 메모만 남긴 채였다. 출고만을 기다리고 있던 데뷔 앨범을 시작으로 이미 프리뷰가 송출된 뮤직비디오에 심지어 그룹명까지. 인제 와서 처음부터 다섯인 척하기에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회사 전체를 동원해 잠적한 멤버의 행방을 찾아냈을 땐 이미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는 외국행 비행기를 탄 뒤였다. 구체적인 소송액을 들먹이며 협박해 봐도, 본인 대신 등판한 변호사로부터 필요한 액수는 보상하겠으니 법정에서 따져 보자는 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부유한 집에서 평탄하게 자라 인성에는 문제 없을 거라던 멤버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시작한 아이돌로서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다.
데뷔가 트라우마라니.
재민은 씁쓸함이 차오르는 것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아역 배우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아이돌을 거쳐 가수 겸 배우의 루트를 타고 싶었던 재민의 야심 찬 계획은 첫 출발부터 어그러졌다. 어중이떠중이 모아 놓아 실력도 들쑥날쑥한 그룹이라고 생각했던 파티가 데뷔와 함께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이 탔다.
저 차인혁만 해도, 그냥 슈퍼스타 차상혁의 하위호환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 한재이는 그냥 케이엠과 TVM의 일회성 블러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재민은 이제 아예 바닥을 굴러다니며 웃고 있는 파티 멤버 몇몇과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차인혁과 한재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속으로 혼자 되뇌어 봐도 자꾸 차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외면하며 재민은 자신을 향한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며 활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