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긴장하지 않는 법
글로벌 장난감 회사 [블럭] 한국 지사 사장단 회의
“올해 한정판 프로젝트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 테마 선정 작업 중입니다. 최종적으로 후보가 정리되면 정례회의 때 보고 올릴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김 전무님, 요새 그거 보셨습니까?”
“…예?”
사장의 뜬금없는 질문에 보고하고 있던 임원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 전무님 자제분들은 이미 장성하셔서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음. 오 부장님, 아이가 아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지 않았던가요?”
부하들 자식 나이까지 꿰고 있는 사장이라니. 업계 특성상 어쩔 수 없다지만 참 피곤한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주니어완구사업부 오 부장이 대답했다.
“예, 이번에 초등학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건 왜…….”
“저희 아이랑 동갑이네요. 혹시 그거 안 보던가요?”
“무슨…….”
“재재님이요.”
“아…….”
오 부장은 며칠 전부터 재재님의 늑대 인형을 사 달라고 조르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곤 짧게 내뱉었다. 엄마는 장난감 회사 다닌다면서 왜 늑대 왕도 못 데려오냐고 울고불고하는 통에 달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을 떠올리곤 사장의 얼굴을 새삼 다시 바라보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록 장난감 회사인 [블럭]의 젊은 CEO는 본사에서 파견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외국계 회사 특유의 전문 경영인 코스를 밟고 40대 초반에 아시아 중요 마켓의 지사장으로 부임한 이 엘리트는 가족과의 시간을 중시하는 소위 말하는 ‘요즘’ 아빠였다.
‘하긴, 사장님 정도면 재재님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오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에 모인 다른 임원들의 얼굴을 슬쩍 훑었다. 이미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을 나이대의 임원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반대로 회의실 뒤쪽에 각 임원의 서포트를 위해 모여 있던 비교적 젊은 나이대의 실무진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자 그럼, 여기 모이신 분들 중 재재님 아시는 분은 손 들어 볼까요?”
임원들이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뒤로 실무진 중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오 부장이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렇게 하면 불공평하니 ‘파티가 몇 명인지 아시는 분’도 손 들어 보라고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임원들 중 몇몇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고, 나머지 몇몇은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사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파티가 몇 명이라는 게 무슨 뜻이죠?”
“저런. 사장님 요새 TV 잘 안 보시는군요. 파티가 몇 명인 줄도 모르시고. 파티는 여섯이죠, 여섯.”
저희 집 둘째가 요새 푹 빠져 있거든요.
살짝 무안했던 조금 전의 상황을 갚아 주기라도 하려는 듯 김 전무가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재재님 본업이 아이돌인 건 모르셨나봐요. 이번에 새로 데뷔한 따끈따끈한 신인 아이돌이에요.”
오 부장이 적절하게 끼어들어 설명했다.
“이야, 한 방 맞았는데요. 어쩐지. 재재님 영상 보는데 자꾸 아이돌 영상이 추천으로 뜨더라니.”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풀어졌던 분위기를 당기며 말을 이었다.
“저는 올해 프로젝트 재재님하고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어떠세요?”
사장이 던진 한마디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재재님 영상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거기 등장하는 용사, 드래곤, 마법사, 늑대 왕으로 캐릭터를 잡으면 재밌을 것 같은데. 지금 딱 화제성 좋기도 하고 이대로 어린이날까지만 끌어 주면 올해 로컬 마켓 오리지널 한정판으로는 참신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떤가요?”
“일단 스토리의 원작자가 재재님 본인인지 확인은 해야겠지만, 스토리가 본인 거라는 전제하에 생각하면 매력적이긴 하네요. 주 고객층뿐 아니라 아이돌 팬덤 쪽에도 소구할 수 있다는 것도 메리트일 테고요. 적어도 재고 때문에 골치 썩일 일은 줄겠네요.”
오 부장이 거들었다. 듣고 있던 김 전무가 말했다.
“시장분석팀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하긴 하겠습니다만. 아이돌이 스토리텔러라니, 확실히 색다르긴 하군요. 혹시라도 나중에 이 친구들이 확 뜨기라도 하면 저희 쪽도 반사 이익 좀 얻겠는데요? 아, 이건 너무 나갔나요.”
“선제 투자라는 관점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게다가 어차피 K-LE 라인은 당장 수익을 보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김 전무의 말에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블럭]에서 매년 어린이날을 겨냥해 출시하는 K-LE(K-Limited Edition) 라인은 국내 사업부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상품 구성이었다.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나 유행을 담은 라인업으로 한 해 한정판으로 생산되는 만큼 아마추어와의 협업이나 수익기부 등을 통해 기업 이미지 쇄신을 도모하기 위한 미끼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취미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블럭의 인기가 재조명되면서 요새는 전 세계의 LLE(Local Limited Edition)만을 모으는 마니아층이 생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럼 프로젝트팀과 협의해서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
.
“[블록]이요?”
“그 블럭 장난감?”
“와 대박.”
석관의 말에 놀란 멤버들이 하나둘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그 블럭. 매년 출시하는 국내 오리지널 한정판을 재재님의 용사 이야기랑 진행하고 싶다고. 게다가 광고 모델은 파티 전원하고 하자고 연락이 왔어. 기왕 하는 거 주 고객인 유·아동 층뿐 아니라 너희들 이용해서 팬덤이랑 성인층 수요도 긁어 모아 보겠다는 거지.”
이어지는 석관의 설명에 멤버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야 역시 글로벌 기업은 배포가 다르네.”
“와 그럼 우리 첫 광고가 무려 블럭인 거야?”
“이럴 수가, 난 나의 첫 광고는 치킨일 줄 알았더니.”
“난 피자.”
“진짜 한재이 우리한테 고마워해라. 무려 치킨과 피자를 포기하고 가는 거야, 우리가.”
“사실은 재이한테 얹혀가…….”
“쉿 심은규. 조용히 해. 지금 혼신의 힘으로 정신 승리 중인 거 안 보이냐.”
멤버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보며 석관이 재이에게 말했다.
“재이는 따로 그쪽 사업부랑 미팅 몇 번 해야 할 거야. 상품 컨셉이랑 스토리 같은 거 세부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더라.”
“와 쩐다. 재재님 이제 잠잘 틈 없겠다. 이미 없지만.”
“으아, 이환 너 입만 웃는 거 무서워. 시기 질투를 할 거면 그냥 까놓고 해, 나처럼.”
엠케이가 이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짜 우리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다고 보는데. 나는 한재이의 어디에 재재님 같은 인격자가 숨어 있나 모르겠단 말이다. 한재이 솔직히 말해 봐, 너 쌍둥이지? 재재님 사실 네 숨겨 둔 동생 뭐 그런 거 아니냐.”
“한재이 동생 얘기는 좀 하지 마라. 나 안 좋은 기억 떠오르려고 해.”
엠케이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심은규가 눈썹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그것을 보며 남궁찬이 거들었다.
“솔직히 나도 엠케이 말 동감. 맨날 우리보고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녀석이 어떻게 재재님이랑 동일 인물이냐고. 이건 좀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멤버들한텐 거지 같으면서 아이들한텐 저세상 스윗함이라니. 왕자와 거지 혼자 찍냐고.”
“남궁찬 선 넘네.”
듣고 있던 재이가 남궁찬에게 한마디 하자 엠케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거 봐, 저거 봐. 저 눈. 와 저 눈이 어떻게 재재님 눈이냐고. 소오름.”
“엠케이 너도 인제 그만 좀 하지?”
“나왔다 어흑재! 저게 한재이지. 진짜 우리 어린이 친구들은 재재님의 본성을 좀 알 필요가 있어.”
엠케이를 타박하는 재이를 보고 있던 이환이 목소리를 높이며 거들었다.
“안 돼. 아무리 진실이 중요하대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꺾을 수는 없잖아.”
“현실이 잔인하다는 건 우리만 알고 있자. 우리 한 몸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한걸.”
“크흑. 진짜, 우리의 짐 너무 가혹하다, 그치 않냐.”
“이런 걸 바로 살신성인이라고들 하지. 하. 인생.”
아주 잘들 노네. 잘들 놀아.
이젠 서로 어깨를 다독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에 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SBC XX 동 스튜디오 [인기뮤직] 공개녹화일
“아, 나 큰일 난 듯. 어떡해.”
갑자기 들려온 한숨 소리에 재이를 비롯한 멤버들의 시선이 은규에게로 쏠렸다.
“왜, 무슨 일이야?”
“나, 손이 진정이 안 돼. 이거 어쩌지? 이따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인혁이 묻는 말에 대답과 함께 은규가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과연. 그냥 보기에도 양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헐. 심은규 우황청심환 아까 먹지 않았냐?”
“어, 아까 차 안에서 먹었는데. 아직도 이럼.”
울상을 해 보이며 엠케이에게 대답하는 은규를 보고 있던 이환이 말했다.
“대체다, 대체. 너 그래서 나중에 콘서트는 어떻게 할래.”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고. 우선 이것 좀 도와줘 제발.”
이러다 무대 망치겠어.
평소 같으면 이환의 비아냥을 받아쳤을 은규가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린 말에 멤버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늘은 후속곡 [룬룬룬]의 첫 음악방송 공개 녹화일. 곡의 도입 부분에는 은규의 피아노 독주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야, 너 어렸을 때 피아노로 국제 대회에서 상도 탔었다면서.”
“그땐 어렸고. 게다가 비공개 콩쿠르라 심사 위원들밖에 없었다고.”
“여기도 몇 명 안 돼. 나중에 콘서트 할 걸 생각해 봐.”
“그땐 그때고. 아무튼, 지금 당장, 이 순간이 긴장된다고. 어떡해.”
엠케이의 황당하다는 말에 은규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지만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건반이나 누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 상황을 보고 있던 재이가 말했다.
“심은규, 차인혁하고 묵찌빠 열 번만 해라. 네 번 이상 지면 오늘 원하는 야식 해 줄게. 석관이 형, 괜찮죠?”
저대로 갔다가 첫 무대부터 죽 쑤는 것보단 낫잖아요.
재이가 한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걱정스레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석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오오오오오!!! 심은규!! 가라!!”
“야 근데 확률 엄청 낮은 거 아니냐. 차인혁을 상대로 어떻게 네 번이나 져.”
“차인혁 제발 눈치껏 좀 이기자 응? 여기가 위아리 촬영장이다, 심은규가 선겸 선배님이라 생각하고 뇌에 힘 좀 빡 줘 봐.”
“그거 혹시 내가 너희랑 있을 땐 뇌에 힘 풀고 산다는 얘기냐.”
남궁찬을 한 눈으로 흘기면서도 인혁이 은규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서 말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이겨 볼 테니, 너도 최선을 다해 져 보자, 할 수 있지, 심은규?”
“어? 어… 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은규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인혁이 곧장 외쳤다.
“묵. 찌. 빠!”
* * *
“쟤넨 되게 여유롭네.”
“무대 좀 서 봤다 이건가.”
게임이라도 하는지 두 명을 둘러싸듯 모여서 뭐라고 한창 웃고 떠들고 있는 파티 멤버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RS6의 이화빈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란히 서 있던 최열이 맞장구쳤다.
“그래 봐야 쟤네나 우리나 데뷔 날짜는 별로 차이 안 날 텐데. 긴장 안 하는 비법이라도 있나.”
이화빈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황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직접 좀 물어볼까?”
“에? 어? 형???”
성큼성큼 앞장서 걷는 재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화빈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어미 닭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재민의 뒤를 따랐다.
“오오오오!!! 아슬아슬했어!!!”
“아 진짜 심장 쫄깃해 죽는 줄.”
“안녕하세요.”
인혁에게서 기적의 4패를 이루어 낸 심은규를 구국의 영웅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견하게 쳐다보고 있던 멤버들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RS6의 다섯 멤버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재민이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근데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좀 여쭤보려고요.”
재민의 말에 그나마 그와 친분이 있는 인혁이 대꾸했다.
“아 뭐 죄송할 것까지야. 무슨 일이신데요?”
“그. 되게 여유로워 보이셔서. 긴장 안 하는 비법이라도 있나 해서요. 있으면 좀 가르쳐 주세요.”
보이시죠? 제 뒤에 저희 멤버들 다 바짝 언 거. 하하.
재민이 웃으며 제 뒤에 주르륵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멤버들을 가리켰다. 인혁의 어깨 너머로 RS6 멤버들의 표정을 훑은 엠케이가 끼어들었다.
“재민 씨 우리 리더랑 묵찌빠 해 본 적 있어요?”
“예?”
뜬금없는 질문에 재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엠케이 옆에 서 있던 남궁찬이 거들었다.
“와 나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차인혁 바가지 설.”
“오 그러게.”
“재민 씨 마침 잘 오셨어요. 저희 리더랑 묵찌빠 한 판만 하시죠.”
“예? 묵찌빠요? 에?”
갑자기 우르르 몰려들어 한마디씩 던지는 파티 멤버들의 반응에 황재민이 당황하는 것이 보이자 인혁이 중재에 나섰다.
“야, 야, 좀. 조용히 좀. 재민 씨 당황하셨잖아. 죄송해요. 얘네들이 좀 정신없어서.”
“아… 하하… 아뇨. 다들 사이좋으신 것 같아서 보기 좋은데요 뭘.”
재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엠케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재민 씨, 우리 다들 좀 있으면 나가야 하잖아요. 시간 없으니까 얼른 하죠. 묵찌빠. 차인혁 얼른 준비해.”
“오오오오!!! 차 리더 바가지의 비밀을 파헤칠 시간이 왔다!”
“오오. 진리의 순간!”
무슨 일에도 냉정 침착해 보이던 한재이마저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재촉하듯 쳐다보고 있는 것에 재민은 등 떠밀리듯 손을 내밀었다.
“묵. 찌.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