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아이돌 체육 대회 (1)
아이돌 체육 대회
팬도, 아이돌도, 제작진도 질색하지만 매년 명절마다 죽지도 않고 또 오는 누군가처럼 찾아오는 단골 프로그램.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만큼 보는 사람도 많아 장수하고 있는 LBC의 명절 간판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 절대, 네버, 메달 같은 거에 집착하지 말고 적당히 열심히 해라. 너희 지금 상승세라 제작진도 머리가 있는 이상 알아서 잡을 테니까 카메라에 잡히려고 미련하게 용쓰지 말고 눈치껏 하라고. 다른 녀석들 같으면 내가 이런 말 일부러 안 해도 눈치껏 하고 올 놈들이라 괜찮은데 너희는 영 미덥지가 않아서.
명심해라. 거기 가서 얻어 와야 하는 건 메달이 아니라 온전한 몸뚱이야. 엄하게 다치기라도 하면 손해 막심이니까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하라고. 아니 그렇다고 설렁설렁하라는 말은 아니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어휴 내가 진짜 마음 같아선 그냥 안 내보낸다고 배 째라고 하고 싶은 거 홍보팀 박 이사가 죽는소리해서 나가는 거니까, 나중에 박 이사 보면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해.
아체대 출연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에 세부 사항을 조율하러 실무진들과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인 회의실에서,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들렀다는 기획본부 장 이사는 멤버들을 붙들고 신신당부를 거듭했다. 소속 가수들의 아체대 참가 여부는 케이엠 내부에서도 매년 도마 위에 오르는 핫토픽이었지만 올해도 결국 전면 보이콧이라는 장 이사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치지 않고 메달도 따면 되잖아?’
장 이사가 들었으면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냐며 뒷목 잡았을 생각을 하며 재이는 멤버들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 * *
“가볍게 하고 와.”
“그래, 가볍게 하고 와. 최대한 가볍게 뛰고 오면 성적도 잘 나올 거야.”
육상 2종(멀리뛰기, 높이뛰기) 예선에 출전하기 위해 일어서는 이환과 은규를 향해 차인혁과 엠케이가 말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라, 나 멀리뛰기라곤 체육 시간에 뛰어 본 게 다라고.”
“나도. 높이뛰기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다고.”
이환과 은규가 자신 없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엠케이가 물었다.
“아니 왜. 우리 특훈했잖아 특훈. 그때는 올림픽 신기록이라도 세울 기세더니 환심이들, 어째서 지금 이렇게 약한 소리인 거죠?”
아체대의 일정이 잡히기가 무섭게 멤버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 각자 출전할 종목에 대한 연습에 들어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 나쁠 것이 없었다. 대충 구색만 맞추다가 와도 된다고 사실상의 태업을 허락한 장 이사와 기획팀도 그거랑은 별개로 카메라 앞에서 폼이 죽으면 안 된다며 각 종목에 대한 코치를 따로 붙여 줬을 정도였다.
“그거 몇 번 연습한 거 가지고 되겠냐. 아무튼, 긴장돼 죽겠으니까 말 시키지 마.”
“오 심은규 긴장했어? 리더야, 은규 긴장했단다.”
“묵찌빠 해?”
은규가 긴장했다는 소리에 엠케이가 인혁을 부르자 인혁이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아 됐어. 저리 가, 정신 사나워.”
“역시 심은규, 한재이표 음식이 걸리지 않은 묵찌빠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거네.”
은규를 놀리는 엠케이를 바라보던 남궁찬이 이때다 싶은 듯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그럼 기왕에 하는 거 우리 메달 따 오는 사람은 한재이한테 요리해 달라고 할까?”
그 말에 출전 선수 대기 장소로 걸음을 옮기려던 이환과 은규가 멈칫하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못 따면?”
“못 먹는 거지 뭐.”
“남궁찬 자신 있나 봐.”
“내가 좀.”
“좋아, 그 승부 받아들이지.”
“아니 근데 너희는 꼭 나 필요한 얘기를 나 빼고 하더라?”
멤버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듣고 있던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투덜거리자 엠케이가 그를 돌아보고 말했다.
“너에겐 누가 메달을 따건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건데?”
“그거 개꿀.”
“진짜, 한재이 거저먹네.”
“한재이한테만 상냥한 세상.”
다른 녀석들이 한마디씩 보태는 것을 보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왜 자꾸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인 거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안 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 재이에 그럼 결정이라는 듯 멤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서로 먹고 싶은 메뉴를 나열하며 점점 승부욕이 돋는지 메달을 싹 쓸어 올 기세로 들썩이는 녀석들을 보고 인혁이 재이에게 말했다.
“장 이사님 당부는 물 건너갔군.”
“그런 게 애당초 가능한 녀석들이긴 하고? 저것들 단순해서 대충하거나 열심히 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못 한다고. 중간이 되는 녀석들이면 장 이사님도 걱정을 안 하셨겠지.”
“너도 포함해서?”
“난 대충 해도 메달권이니 난 빼고.”
“어휴 왜 요새 잠잠하나 했다, 그 입.”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인혁에게 비죽 웃어 보인 재이는 이제 아예 동그랗게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짜고 있는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야, 일단 예선 통과나 하고 와. 뭐야, 이 메뉴. 무슨 출장 뷔페 주문했냐 너네? 좀 작작 좀 해 제발 좀.”
재이의 잔소리에 녀석들이 와글바글 떠드는 것을 보며 인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허어…….”
“어떻게 보십니까, 한재이 해설 위원.”
육상 2종의 남자부 예선이 벌어지고 있는 경기장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내뱉은 감탄사에 엠케이가 물었다.
“환심이가 낄 자리가 없어 보이는군요.”
“그 말씀은.”
“예선 탈락에 걸어 봅니다.”
“같은 팀 멤버에게 가차 없으시군요.”
“제가 좀,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잠시 실눈을 뜨고 재이를 흘겨본 엠케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승 후보도 점쳐 주시죠.”
“저기 RS6의 이화빈 씨랑 최열 씨에 걸겠습니다.”
“…진심입니까?”
엠케이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 끝에는 긴장한 얼굴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핑크 머리와 노랑머리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대회 MVP 팀이 같은 종목에 출전 중인 건 알고 계시죠?”
“원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죠.”
“냉정하시네요. 중계석에서는 이변은 없을 거라고 하던데요? 기록이 워낙 넘사벽이라.”
“저 두 분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제 감은 틀린 적이 없지요.”
“확실히 한재이 씨의 감이 좀 예사롭지 않긴 합니다만, 과연 아체대에서도 통할까요! 아무튼, 여기서 저희한테 중요한 사실은 파티의 환심이는 예선 탈락 할 것이라 보신다는 점이겠네요.”
“그렇죠. 어찌 됐건 저 녀석들에게 메뉴 선택의 기회가 올 것 같진 않네요.”
“지금까지 파티 중계석에서 단호박 해설 위원과 함께 엠씨더케이였습니다.”
엠케이와 재이의 주거니 받거니를 듣고 있던 남궁찬과 차인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 * *
“저런.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군요.”
재이의 예상대로 환심이가 나란히 예선 탈락의 기록을 내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엠케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가볍게 뛰고 오라는 차 리더의 당부를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죠.”
“리더십의 부재가 부른 참사로군요.”
“그리고 단호박 한재이 선생께서 예상하신 대로 환심이의 메뉴 선택의 기회는 날아갔네요.”
“쯧쯧. 안타깝습니다.”
재이와 엠케이, 남궁찬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예선전이 중계되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던 인혁이 감탄을 내뱉었다.
“와. 저걸 뛰네.”
스크린에는 그림 같은 동작으로 높이뛰기의 허들을 넘어 매트리스에 몸을 묻고 있는 이화빈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멀리뛰기에서 최열이 맨눈으로 봐도 평균보다 훨씬 멀리 뛴 것을 본 RS6의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래야 아이돌이지.”
“그림 좋네.”
“편집 잘 받으면 반응 좋겠는데?”
작년 MVP 팀이 세웠던 최고 기록을 가볍게 경신한 두 사람의 모습이 스크린에 잡히는 것을 보며 멤버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결선 또 할 필요 있나?”
“그러게. 이걸로 갈음하고 그냥 메달 수여해도 될 것 같은데.”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옆집 멤버들 뒤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오고 있는 이환과 은규를 본 엠케이가 소리쳤다.
“메달 따 오겠다더니, 예선 광탈이 뭐냐고.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으이구.”
대기석으로 돌아오는 이환과 심은규의 등짝을 장난스럽게 두드리며 엠케이가 잔소리를 퍼붓자 이환과 은규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다들 완전 경력자라고. 그 최열 씨는 아예 육상 선수 출신이라는데!”
“그러니까. 너희들이 여기서 봐서 그렇지 완전 만렙들만 우글거리는데 우리 둘만 뉴비였다니까?”
“시끄럽다,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야.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엠케이의 말에 이환과 은규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 슬그머니 구석으로 가서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그것을 본 주위의 다른 팀 멤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여자부 예선 경기가 시작되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경기를 관전 중인 듯하던 엠케이가 문득 중얼거렸다.
“…역시 환심이 녀석들한테 선봉을 맡긴 건 전략상의 실책이었어.”
“뭐야 경기 보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남궁찬이 되묻는 말에 시선은 여전히 경기에 고정한 채 엠케이가 말을 이었다.
“보고는 있지. 오, 스페이스걸스 분들 완전 날아다니시네. 역시 소문대로 무중력 그룹인 건가.”
“진짜, 우승 후보답다. 근데 전략상의 실책이란 말은 뭐야.”
남궁찬이 고개를 갸웃하자 어느새 손 내리고 옆에 와 앉아 있던 이환이 끼어들었다.
“그것보다 우리한테 전략이란 게 존재했었어? 왜 난 몰랐지?”
“시끄럽다, 밥이 걸린 이상 없던 전략도 생기는 거야.”
“오, 그건 납득. 그래서 다음 전략은 뭔데?”
어느새 모여든 남궁찬과 이환, 은규가 쑥덕대며 물었다.
“쟤.”
짧게 대답한 엠케이가 턱짓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네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엔 마침 인혁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재이가 일어나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
“…….”
“그래, 한재이가 전략이지.”
짧은 정적을 깨고 이환이 중얼거린 말에 남궁찬이 외쳤다.
“가랏, 재이몬! 씹어 먹고 와!”
“그래 재이야, 메달 따 오면 재이가 먹고 싶은 거 해 준대!”
“명심해! 광탈루트는 우리가 이미 써먹었다는걸!”
멤버들이 앞다퉈 응원인지 뭔지 모를 말들을 내뱉었다. 그 외침들을 뒤로 재이가 참가자를 호명하는 안내 방송의 지시에 따라 참가 선수 대기석으로 자리를 옮기려 걸음을 떼었다.
“대충하고 와라. 사람들 놀랄라.”
“어. 후딱 하고 올게.”
인혁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치며 재이가 걸어 나갔다.
* * *
김은지는 정신이 혼미했다.
아이돌 팬들에게 애증의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아체대의 응원에 참여하기 위해 넷상에 돌아다니는 주옥같은 팁들을 참고로 피 같은 연차를 3일이나 쓴 참이었다. 어제는 오늘 새벽 집합 시간에 맞추기 위해 가까운 곳의 찜질방에서 숙박, 오늘을 운 좋게 버티고 나면 분명 내일은 시체겠지 싶어 미리 휴가를 내 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직 점심도 먹기 전인데 이미 비루한 몸뚱이는 나를 어서 눕히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하하 어떡해 환심이 벌선다.”
옆자리 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에 힘을 주고 정면을 주시하니 아니나 다를까 시험 망치고 돌아온 아들내미 쥐어박듯 등짝을 후려치는 엠케이한테 실컷 구박을 먹은 이환과 은규가 가수석 구석에서 얌전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갈 때만 해도 막 다 잡아먹을 것처럼 기세등등하지 않았어?”
“다 비켜 포스였는데 광탈하고 급쭈구리 된 거 귀엽잖아.”
“분명 최선을 다한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말이지.”
“아까 그 나라 잃은 표정 봤냐.”
“진짜, 왠지 본방에 들어갈 것 같은 표정.”
팬들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귀에 감겼다. 김은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미간에 힘을 빡 주고 두 눈을 부릅떠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 안 되겠다, 미안하다 얘들아 누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본능에 몸을 맡긴 김은지의 고개가 모로 꺾여 들어갈 때쯤, 몽롱한 정신을 가르고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재재님 나오나 보다.”
눈이 번쩍 떠졌다. 고개를 홱 들어 가수석 쪽을 바라보니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듯 재이가 일어서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지루한 대기 시간에 몸부림치던 팬들이 웅성대며 응원봉을 흔들자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재재님이 손 흔들어 줬어!”
“아하하 저 애교 빵점 하트 뭐냐고.”
애교 빵점이라니 그럴 리가.
김은지가 고개를 쭉 뻗어 앞을 살폈다. 재이가 자신에게 호응하는 팬들의 함성을 듣고 이쪽으로 하트를 날리고 있었다.
‘…음, 좀.’
하트라고 하기엔 어딘지 좀 부족한 손동작으로 연신 팬들에게 하트를 날린 재이가 참가 선수 대기 장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 되겠다 재이야, 나중에 다른 멤버들한테 손 하트 만드는 법 좀 다시 배우자.
김은지는 재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옮겨 그가 향하고 있는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경기장 한쪽에는 어느샌가 실내 클라이밍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클라이밍이라니.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협찬 쎄게 들어왔나 보지.”
“아무리 그래도. 초심자들한테 저건 너무 심하지 않았냐.”
“이거 참가한다고 몇 달 전부터 특훈 받은 아이돌 한 트럭은 될 거라는데 내 점심을 건다.”
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김은지는 15m 정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클라이밍 구조물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뻗은 구조물 위쪽에 버튼이 달려 있었다. 스피드 클라이밍은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맨손으로 암벽을 타고 올라가 버튼을 누를 때까지 걸린 시간을 다투는 기록경기였다.
재이가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준비 자세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팬들이 숨을 죽였다. 김은지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꼭 맞잡았다. 메달 따위 안 따도 좋으니 다치지만 말아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2, 1——!!!”
버저 음과 함께 도약한 재이가 홀드를 잡고 가볍게 뛰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