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아이돌 체육 대회 (3)
“저게 뭐 하는 거지?”
김은지는 망원경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니, 맨눈으로 멤버들의 행동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으니 정확히는 거리상의 문제가 아니고 음…….
“…춤인가?”
역시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팬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김은지 또한 어, 혹시? 싶은 생각에 다시 자세히 눈앞의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옆집 리더 청년이 우리 집 메보랑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막대풍선을 하나씩 들고 마주 보고 선 모양새가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무대에서 익숙하게 보던 그거였다.
“옆집 리더 무슨 일이래.”
두 그룹의 멤버들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구경하고 있었다. 서로 막대풍선을 겨눈 채 상대방을 주시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것은 옆집 청년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안쪽으로 파고들듯 뛰어드는 기세에 구경 중이던 팬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오오…… 어?
“어?”
김은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황재민의 막대풍선이 재이의 풍선에 닿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재이가 황재민 쪽으로 휘릭 돌아 나가며 스텝을 밟아 어느새 그의 뒤편에서 풍선을 겨누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등 뒤쪽을 잡힌 재민의 뒤통수를 재이의 풍선이 겨누고 있었다.
“오오오오, 재재님 잘한다!!!”
누군가가 외쳤다. 김은지 또한 응원봉을 흔들며 소리쳤다. 차 리더도 못 이기는 재재님인데 어디서 덤비니.
그 뒤로도 번번이 재이의 그림자 밟기를 하듯 한 박자 뒤처진 움직임으로 연패를 쌓아 가는 황재민의 모습을 여유로운 기분으로 구경하던 김은지는 뭔가 이상한 낌새에 미간을 좁혔다. 휴식 시간인지 이제 그만할 생각인지, 멈춰 서서 물을 마시고 있는 재이의 뒤편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황재민에게 인혁과 엠케이가 슬금슬금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설마??’
RS6랑 화해한 거 아니었어!?
팬들 다 보는 앞에서 옆집 리더를 해치우려는 건 아니겠지??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에 김은지는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주시했다.
* * *
‘완전 괴물…….’
황재민은 자신의 눈앞에 선 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정신 수양과 운동에 좋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줄곧 검도를 배워 온 황재민은 파티의 데뷔 무대 안무를 봤을 때 혼자 속으로 불타올랐었다. 경쟁 그룹 분석이라는 핑계로 파티의 데뷔곡 무대를 모조리 챙겨 보고 안무 연습 영상까지 따로 찾아봤을 정도였다.
가물에 콩 나듯 한 번씩 이기는 차인혁을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던가. 나라면 저기서 저렇게 할 텐데, 아니 저걸 저렇게 잡히나. 한 번은 위아리 촬영을 위해 만난 차인혁에게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때 차인혁이 했던 말을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
- 한재이요? 괴물이죠.
괜히 덤볐다가 뼈도 못 추리게 생겼다. 그래도 1승은 챙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했다. 더 분한 건 저쪽도 이쪽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막대풍선이니 맞아봐야 잠깐 아프고 말 터였는데 그조차도 필요 없다는 듯 귀신같이 마지막 순간에 멈춰 얻어맞았다는 명분조차 내세울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대기실 구석에서 할 걸 괜히 나와서 해서…….’
팬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응원하러 와 준 팬들에게 미안해서 팬석 쪽은 차마 쳐다볼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떨궜다. 한순간의 흥에 취해 섣불리 대련 안무 따위를 해 보겠다고 나섰던 과거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민 씨.”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차인혁과 엠케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하얗게 불태웠다고, 이건 내 껍질이고 나의 영혼은 이미 탈곡되어 먼지처럼 흩날렸으니 날 찾지 말아 줘…….
재민이 흐느적거리며 고개를 들자 엠케이가 재빨리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린 뒤에서부터 들어가죠. 다른 녀석들이 앞쪽을 맡을 겁니다.”
예? 뭐라고요?
재민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비장한 눈빛의 차인혁이 네 맘 다 안다는 듯 재민의 어깨를 한 번 꾹 잡더니 등을 돌려 목표를 바라보았다.
에? 어? 뭐?
재민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주변에서 와아악- 하는 함성과 함께 여럿의 그림자가 한 사람에게로 몰려들었다.
PART.Y 팬 게시판
[진심 아체대 현장에서 싸움 난 줄]
점심 먹고 쉬고 있는데 애들이 옆집 분들하고 같이 나오길래 아이 뭐야 너희 이제 대놓고 사이좋기로 했어?ㅎㅎ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막대풍선 들고 있길래 뭔데 우리 응원이라도 해 주려고? 하고 있었더니 대뜸 옆집 리더 씨가 재재님하고 대련 한판 하시는 게 아니겠냐고. 처음에는 다들 오오오!! 했는데 뭔가 그게 어. 너무 일방적인 학살이라 옆집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야. 아무리 그래도 차 리더도 아니고 옆집 리더인데. 체면 좀 세워 주지 아니 갠적으론 누구에게나 평등한 재재님 좋지만 ㅋㅋ
암튼 그래서 주변 공기 좀 쎄해지려는데 재재님이 풍선 놓고 물 마시고 있는 사이에 우리 팀이랑 옆집 멤버 전원이 다 같이 달려들어 X굴쳐 버림ㅋㅋ 재재님 처음엔 뭔가 반항하시는 듯하더니 ㅋㅋㅋ 그냥 사태에 순응하시고 멤버들이 막대풍선 휘두르는 대로 다 얻어맞으시는데 ㅋㅋㅋ 초탈한 표정 넘ㅋㅋ 그 와중에도 옆집 분들은 차마 때리진 못하고 시늉만 하시는데 우리 애들만 신났다는 게 넘ㅋㅋㅋ 옆집 핑계로 재재님 한번 어떻게 해 보려는 거 넘 티 나고 ㅋㅋㅋ 너희들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ㅋㅋ
└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다ㅋㅋ 대체 누가 시작한 거야 그런 무모한 짓
└ 재재님 협공하면서 신났을 멤버들 넘 눈에 선한 것ㅋㅋ기회만 노렸을 텐데 ㅋㅋ
└ 다X엔_장사_없음.jpg
└ 엌ㅋㅋ 재재님ㅋㅋ 옆집 분들 때문에 참고 있다는 저 표정 어쩔
└ ㄹㅇ 재재님 웃고 있는데 왜 내 뒷목이 서늘하지?
└ 그 와중에 엠케이랑 남궁찬 넘 해맑게 신났엌ㅋㅋ
└ 이걸로 빼박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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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쉬는 시간이 끝나고 곧바로 재개된 스피드 클라이밍 결선에서 여유롭게 금메달을 따서 돌아온 재이가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남궁찬 머리에 두 대, 엠케이 왼쪽 어깨에 세 대, 오른쪽 옆구리에 두 대, 이환 등에 세 대, 심은규 등에 한 대, 차인혁 머리에 한 대…….”
“저거 데스노트 쓰는 중인가 본데 어떻게 좀 해 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엠케이가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나 오늘 촬영 끝나면 본가 좀 들렀다 오면 안 되냐고 석관이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야, 나도 좀 데리고 가. 나 너희 어머님 본 지 오래됐다?”
남궁찬이 중얼거린 말에 엠케이가 다급하게 매달렸다.
“RS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왜 안 때리냐고. 같이 때렸어야지.”
“팬들이 다 보고 있는데 남의 집 멤버 때렸다가 무슨 사달이 나려고. 그 와중에 이성 챙긴 재민 씨가 인격자인 거지.”
“그건 그래. 나 같았으면 이런 기회 안 놓쳤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저 살생부에 이름 올라가 있겠지.”
심은규와 이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인혁이 재이에게 말했다.
“애초에, 그렇게 악착같이 다 이길 일이냐고. 체면 좀 세워주지. 성격 나쁜 거 티 내냐고.”
“어설프게 져 줬다간 더 말 나오기 쉬운 거 모르냐. 갖고 논다, 우습게 보냐, 뭐 이런 얘기 안 나오게 하려면 초장부터 그럴 여지를 안 주는 게 맞지.”
“아무리 그래도 재밌자고 한 일인데.”
“재밌었잖아? 너희들이 제일 재밌어 보이던데?”
재이가 멤버들을 죽 훑어봤다. 차마 재이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멤버들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게라도 무마 안 했으면 말 나올 뻔했다고 진짜.”
재이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엠케이가 내뱉은 말에 재이가 비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얌전히 맞아 줬잖아.”
제일 많이 때린 게 엠케이 너던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엠케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 촬영 들어갑니다.
마침 촬영 재개를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엠케이가 십 년은 감수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멤버들 또한 별다른 바 없는 심정이었던 듯 후다닥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 * *
[아체대 중계석]
사회자는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남자부 양궁 예선이 벌어지고 있는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드디어, 아체대의 꽃, 양궁 경기가 시작되었군요. 벌써 팬들의 응원 열기도 대단한데요. 해설 위원님 이번 양궁 게임의 판도 어떻게 보십니까.”
사회자의 말에 해설 위원이 대본에 적힌 대로 멘트를 읽었다.
“남자부 양궁은 줄곧 더블헥사곤의 텃밭이나 다름없었죠. 이번 대회에서 그 아성을 깰 수 있는 도전자가 나올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돌계의 부처, 일명 돌부처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선겸 선수가 이끄는 더블헥사곤! 데뷔 이후 줄곧 아체대의 양궁을 책임져 온 더블헥사곤이 이번에도 양궁돌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오, 말씀드리는 순간 이번 대회 제가 개인적으로 눈여겨보고 있는 팀이 입장했는데요. P.A.R.T.Y. 파티~! 스피드 클라이밍에서 스파이더맨을 방불케 하는 실력으로 팀에 첫 금메달을 안긴 한재이 선수가 있는 팀이죠.”
사회자의 설명과 함께 세 명의 멤버가 나란히 입장했다. 엠케이, 차인혁, 한재이 순이었다. 맞붙는 팀은 재이와 스피드 클라이밍에서 맞붙었던 노노가 소속된 브릴리언트 보이즈였다.
“노노가 꼭 이기고 오라더라고. 저기 뒤에 보이지, 눈에서 불 뿜고 있는 거.”
경기 전, 선수끼리 악수를 하는데 브릴리언트 보이즈의 멤버 하나가 재이에게 말했다. 과연. 그의 등 뒤쪽에 응원하려고 와 있던 각 팀의 멤버들 사이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노노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쩌지.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과녁 앞에 선 엠케이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과녁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체대 스케줄보다 더 빡센 아체대 연습 스케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회사에서 붙여 준 국가 대표 출신 프로 코치보다 더 매서웠던 한재이의 원포인트 레슨이 하나씩 떠올랐다.
더 억울했던 건 하나도 틀린 말 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코치님의 태도였다. 저러고도 레슨비 받으셨겠지. 부럽다. 나도 재주는 한재이보고 피우라고 하고 돈만 받고 싶다. 우리 팀은 그냥 한재이 혼자 쭉 쏘면 안 되나. 아 이 말 했다가 공짜 좋아하는 거지 근성이라고 그놈의 혓바닥한테 된통 잔소리만 들었지. 하아. 인생. 어쩌다 저런 거랑 같은 팀이 되어서.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그동안의 설움 모두 담아 과녁에 꽂아 주겠어.
- 10
“뭐지 지금? 엄청 빨랐는데?”
“나 팔로스로우밖에 못 봄?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쏠 줄 몰랐던 듯 느긋하게 서 있던 브릴리언트 보이즈의 멤버가 허둥지둥 준비 자세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 8
상대편 선수의 활이 과녁에 닿기가 무섭게 준비하고 있던 엠케이가 곧바로 드로잉에 들어갔다.
- 10
“휘유, 쉴 틈을 안 주네.”
“스피드 전략인가.”
“그 와중에 두 발 다 10 챙긴 거 실화냐.”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뒤로 엠케이는 다음 차례인 인혁을 바라보았다. 예선은 한 팀당 세 사람이 2발씩 쏘고 마지막 한 명이 한 발 더 쏴서 총 7발만으로 승부를 가리게 되어 있었다.
일단 예선에서 내 몫은 했으니 다행이야.
엠케이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자신의 뒤를 이어 자리에 선 인혁을 바라보았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 옆모습이 화보라도 찍고 있는 듯 여유로웠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괜히 아체대에서 양궁이 인기 종목인 게 아닌 듯했다. 차인혁은 꼭 양궁에 넣어야 한다고 고집하던 심진우 팀장의 말이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갔다. 저 정도면 이쪽에서 부탁하지 않아도 아체대가 알아서 공홈 섬네일로 끌어다 쓸 각이었다.
‘그래 봐야 속도 없는 주먹밥인 것을.’
엠케이는 ‘잘생긴 놈들은 얼굴 빼면 시체’라던 재이의 말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었다. 자신처럼 순식간에 10에 두 발 맞히고 돌아 나오던 인혁이 왜 웃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아 마지막 주자로 자리에 선 재이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하라고 얘기해 줬냐?”
“응?”
자신이 묻는 말에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인혁을 바라보며 엠케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한재이한테 동작 제대로 하라고 얘기 안 해 줬냐고.”
“아…….”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짧게 중얼거리는 인혁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엠케이가 중얼거렸다.
“대체다 대체. 저거 날뛰면 네 책임이 반이라는 거 명심해라, 차인혁.”
엠케이와 인혁의 걱정스러운 시선 끝에는 활을 꺼내 드는 재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