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믿고 맡기는 어흑재
“뭔데? 석관이 형이 왜 불렀는데?”
얼마 후 연습실로 돌아온 재이에게 엠케이가 물었다.
“비밀이야.”
재이가 쉿, 하는 제스쳐와 함께 윙크로 대답하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어우 한재이, 느끼해, 저리 가.”
“저건 그냥 화풀이네. 화풀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왔길래 우리한테 이래.”
“아 힘들어 죽겠는데 한재이 때문에 의욕 꺾임. 잠깐 누워야겠어.”
“남궁찬, 핑계 대지 말고 일어나, 재이 왔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맞춰 본다.”
“어휴 귀신. 알았어, 알았다고. 끄응.”
인혁의 지적에 슬그머니 바닥에 주저앉던 남궁찬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나 섰다.
“공연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출연진들 사이에서 갈려 나가기 싫으면 빡세게 달리자고.”
인혁의 말에 느슨해져 있던 멤버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아왔다.
며칠 후로 다가온 공영 방송 KBC의 [열린 콘서트]는 지금까지 출연했던 음악방송과는 궤를 달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음악적 포맷을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주목적인 만큼 아이돌로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는 것은 기회인 동시에 모험이기도 했다.
주 시청자층과 관객 연령대가 아이돌 위주의 음악 방송과는 전혀 다르므로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들만 중간에 붕 떠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회차는 헌혈에 대한 의식 고취와 참여 유도가 프로그램의 테마가 될 예정이었다. 매 회차 다른 주제와 컨셉으로 진행되는 공연 중에서도 공익적인 측면이 확실히 도드라지는 무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그와 동시에 공연의 테마와 너무 동떨어진 무대를 하면 채널 잘못 돌린 줄 알았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라는 점에서 무대 구성을 고심하게 되는 공연이기도 했다.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된 내부 회의 끝에 후속곡 [룬룬룬]과 재이의 솔로곡인 [산들바람의 속삭임]을 믹스한 버전으로 무대를 꾸미는 것은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데뷔곡 [Like a Tutorial]이 일반인에게 살짝 난해할 수 있는 곡풍이었다면 [룬룬룬]은 현실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이 특징이었다.
[산들바람의 속삭임]과의 상성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에 추가 작업이 시작되었고 덕분에 재이, 이환, 은규의 보컬 라인 세 명은 안무 연습에 더해 AR팀과 함께 추가 녹음과 믹스 작업을 틈틈이 병행해야 했다.
“아이고 이제 정말 죽겠다. 잠깐만 쉬자.”
한동안 잡담 없이 변형한 안무와 노래를 맞춰 보는 작업을 집중해서 진행하던 중 은규가 도저히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듯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남궁찬 때와는 달리 이번엔 별말 없이 드러누운 은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인혁의 허락에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씩 바닥에 주저앉거나 널브러졌다. 연습실 한쪽에 놓인 생수병을 은규에게 건네며 재이가 물었다.
“경연에 낼 곡은 완성했냐?”
재이를 제외하면 현재 파티에서 유일하게 자작곡을 보유한 은규는 이번 무대의 추가 작업뿐 아니라 이환과 참가하고 있는 경연 예능의 곡 준비도 함께 하고 있었다. 지금 멤버들 중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업무량이었다.
“아니. 막혔어. 망한 듯.”
자신이 건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은규가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재이가 말했다.
“뭐. 기한 내에 못 내서 광탈하면 그건 그것대로 재밌는 그림 되는 거 아니냐.”
“저건 위로인 걸까, 멕이는 걸까.”
“멕이는 거지. 심은규 표정 봐라, 저기서 조금만 더 하면 울 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이와 은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엠케이와 남궁찬이 쑥덕거렸다. 그런 그들을 한 번 흘겨본 재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무대에 이우연 선배님도 오시잖아?”
“아… 그러게.”
“정 어려우면 막힌 부분만 이우연 선배님한테 좀 봐 달라고 해도 되지 않아?”
“그런 소릴 어떻게 해. 내가 너도 아닌데.”
은규의 대답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삐- 정답! 내가 너처럼 얼굴에 철판 깐 것도 아닌데 오래간만에 뵙는 대선배님께 어떻게 다짜고짜 부탁을 드리냐?”
“삐- 정답! 이우연 선배님이 예뻐한 건 내가 아니라 넌데 어떻게 내가 눈치 없이 선배님께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리냐?”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찬과 엠케이가 득달같이 끼어들며 외쳐 대는 말에 재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심은규 네가 결정해라. 대답에 따라 저것들 둘 중 하나는 확실히 끝장내 주지.”
재이가 나직이 중얼거린 말에 엠케이와 남궁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으, 은규야, 설마 날 버리진 않겠지? 우리 그래도 옆자리 타는 사이잖아.”
“세상에 남궁찬, 얼마나 얄팍하면 내세울 게 자동차 좌석 배치밖에 없어.”
“조용히 해, 엠케이. 넌 그나마도 없는 주제에.”
다급하게 내뱉는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로 은규의 목소리의 자신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지도 모르잖ㅇ…….”
“하.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은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이가 싸늘하게 내뱉은 말에 연습실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야.”
“한재이, 말이 좀… 그렇다?”
조금 전까지 분위기를 장난스럽게 띄우고 있던 남궁찬과 엠케이가 은규의 눈치를 보며 재이를 말렸다. 이환과 인혁까지 모두가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이가 말을 이었다.
“기억 못 하시면 그게 또 뭐가 어때서? 다시 인사드리고 부탁드리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 세상 사람들이 다들 너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은규가 발끈해서 재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세상 사람들이 다들 나처럼 성격이 더럽진 않지. 근데 지금 제일 아쉬운 건 너 아니야?”
재이의 말에 은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선을 내리까는 은규의 모습을 보고 있던 재이가 이어 말했다.
“잠잘 틈도 없어서 허덕이면서도 자작곡으로 승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잖아. 막힌 곳이 있으면 남의 망치를 빌려서라도 깨부수고 나갈 생각을 해야지. 거기서 그냥 서 있다가 타임아웃 하면, 네 그 알량한 자존심이 편할 것 같냐?”
“…….”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뼛속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에 은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성격 더러운 줄은 알고 있었나 봐?”
“그러게. 의왼데?”
“내 말이. 생각보다 자기 객관화가 되는 녀석이었잖아.”
“그런데도 그 성격 고칠 생각을 안 한다고?”
“고친 게 저 정도일 수도 있어.”
“와 남궁찬 천재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나 지금 소름 돋은 거 보이냐.”
엠케이와 남궁찬이 슬그머니 다시 쑥덕대는 것이 들려왔다. 덕분에 딱딱했던 분위기가 살짝 풀어지며 콱 옥죄어 있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혼자 하기 힘들면 나눠서 하라고. 그렇게 다 끌어안고 곧 죽을 얼굴 하고 있지 말고. 곡을 꼭 혼자 만들라는 법 있냐. 이환 쟤도 악보 볼 줄은 안다고.”
아니 잠자코 있는 내 머리끄덩이는 왜 잡아채는데.
구석에서 이쪽 눈치를 보고 있던 이환이 툴툴거리다가 은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재이 말이 맞아. 내가 너보다 아는 건 없어도 피드백은 해 줄 수 있다고. 이우연 선배님한테 여쭙는 거, 네가 하기 힘들면 내가 하면 되지 뭐. 그룹으로 데뷔도 했는데 까짓거 먹히기만 한다면야 한재이 이름이라도 팔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또 그런 거 잘하거든.
이환이 답지 않게 말랑하게 이야기하며 은규의 어깨를 툭 쳤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굳어있던 은규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을 확인한 인혁이 재이에게 말했다.
“한재이 잠깐 나 좀 보자.”
인혁이 재이를 밖으로 불러냈다. 순순히 자신을 따라 연습실 밖으로 나온 재이에게 인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애들 다 보는 앞에서. 할 말이 있으면 심은규만 따로 불러내서 얘기하지 그랬어. 심은규 체면도 있고 팀 분위기도 있는데.”
인혁의 말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우리 서로 잘한다는 소리만 하려고 모인 거 아니잖아. 생각하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진짜 팀이지. 서로 체면 세워 주고 눈치 보다가 할 말 못 하고 그러는 사이에 어그러지는 것보단 당장은 서로 얼굴 붉히고 욕먹더라도 할 말은 하고 지나가는 게 백 번 낫다고. 게다가 이런 얘기 했다고 속에 쌓아 둬서 앙금 만드는 성격들 아닌 것 정도는 다들 파악했잖아?”
재이의 말에 인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맞는데. 너도 너무 후려치기만 하지는 말란 말이야. 네 입이 무슨 회초리도 아니고.”
인혁의 말에 재이가 입술을 삐죽이다 말했다.
“사실 너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아까 나간 거 AR실 장세은 팀장님이 부르셔서 간 거였거든.”
재이의 말에 인혁이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며 더 자세히 얘기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곤 재이를 쳐다보았다.
“은규 좀 자극해 보라고 하시더라고.”
재이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은규가요?”
“그래.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클라이맥스 부분까지 잘 써 놓고 마지막 마무리가 안 되는 모양이야. 사실 작업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 잘해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골인 직전까지 와서 딱 막혀버리는 거지. 특히 은규같이 몇 곡 써 본 적 없는 신인들이 종종 그럴 때가 있는데, 이럴 때 제대로 멘탈 수습해서 리바운드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지거든.”
“아… 예…….”
“AR실 사람들 써서 피드백해 봐도 별 소용이 없었거든. 멤버들한테 따끔하게 한 소리 들으면 자극이 좀 될까 싶은데.”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리더 놔두고.
재이가 장세은 팀장을 바라보는 눈빛을 읽은 매니저 석관이 대신 입을 열었다.
“인혁이가 하면 아무래도 상하 관계로 변질되기 쉽잖아. 리더가 멤버 하나를 찍어 누르는 모양새여서야 팀 분위기에도 악영향일 테고. 엠케이와 남궁찬은 애초에 그런 거 할 수 있는 녀석들이 못 되고 이환은 지금 어차피 은규랑 한배를 탄 몸이니, 남는 건 너밖에 없잖냐.”
그리고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석관이 덧붙인 말에 재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냥 알아서 리바운드하게 두시면 안 돼요? 꼭 재촉해야 하나요? 심은규가 좀 느려서 그렇지, 놔둔다고 저렇게 그냥 퍼질 녀석은 절대 아닌데요.”
재이의 물음에 장세은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둘 텐데, 경연 일정이 있잖아. 당장 컷오프 날짜가 턱 밑까지 다가왔는데 은규 컨디션이 저래선 예선 통과는커녕 기한 내에 제출도 힘들 것 같다고.”
그럼 그냥 타임아웃 하게 놔두시지, 라고 하려던 재이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재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장세은 팀장도 매니저 석관도 재량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멤버들의 입장을 존중해 주려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아마 컷오프 날짜까지 곡이 완성될 기미가 아예 안 보였다면 모를까, 마지막 공정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게 뻔히 보이는데, 기껏 잡은 기회를 이대로 날려 보내긴 아까워서 하는 말일 터였다.
“알겠습니다.”
생각을 정리한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장세은 팀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역시, 믿고 맡기는 어흑재.”
“아니, 팀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믿음직스럽단 얘기야. 잘 부탁한다?”
장세은 팀장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재이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 * *
며칠 후.
신년 맞이 특집 [열린 콘서트] 헌혈의 밤 리허설 현장
“쟤네야?”
객석 한쪽에 자리를 잡으며 박예찬이 옆에 앉은 이우연에게 물었다. 무대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어. 쟤네.”
이우연의 대답에 박예찬이 다시 유심히 무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박예찬.
그의 손을 거친 음반은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치는 법이 없다는 평을 듣는, 가수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프로듀서 1위에 빛나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와 데뷔 때부터 알고 지낸 이우연이 보기엔 그저 사람보다 인터넷 게임을 좋아하는 괴팍한 중년에 불과했지만.
“어때?”
이우연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이자 동업자의 기색을 살폈다. 이번 무대에 올릴 자신의 곡을 담당했다는 핑계로 저 방구석 폐인을 이곳 공연장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제 할 몫은 다 했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무대 중앙에서 후렴 부분의 고음 파트를 뽑아내는 한재이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허설임에도 객석 뒤편에 앉아 있는 자신의 귀에 꽉 차도록 만족스럽게 울리는 목소리를 감상하던 이우연은 며칠 전 간만에 전화해서는 대뜸 약을 팔던 녀석의 맹랑한 말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