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어, 이게 아닌데
조윤민은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배운 ‘연기’라는 행위, ‘배우’라는 직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로 문을 두드렸던 연극 판에서 보았던 내로라하는 선배 배우들이 그랬고, 운 좋게 지금의 회사와 계약을 하고 드라마 판에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 가며 보아 온 전문 배우들의 연기가 그랬다.
역할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각오와 뼈를 깎는 노력,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열정, 그 모든 것이 있어도 운이 없어 못 뜨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이었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진짜 저 새끼는 뭘 더 얻어먹자고 여기까지 온 걸까.’
주태온 역은 자신도 오디션을 봤던 역할이었다.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준비해 갔건만 오디션 현장의 반응은 썰렁했다. 피디도 작가도 심드렁한 얼굴로 서류를 들춰 보다 예의상 몇 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싫어도 감이 올 수밖에 없었다.
벌써 정해졌구나.
속은 쓰리지만, 저보다 더 좋은 배우를 찾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설마 노영란 작가 스스로 ‘내 작품에 절대 다시 없을 것’이라 못 박았던 아이돌이었을 줄이야.
다른 역할로 오퍼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인터넷 게시판마다 돌아다니며 그 작품 망삘이라고 욕을 써 재꼈을 터였다. 나를 차고 넣은 게 고작 저거라니. 조윤민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낯짝도 두꺼운지 그렇게 대놓고 싫은 얼굴을 했는데도 웃는 얼굴로 다가와 살갑게 인사하는 붉은 머리카락의 녀석에 조윤민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것 좀 드세요. 오늘 처음이라 가져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 형사님.”
이게 어디서 착한 척이야.
순진한 척 웃고 있지만, 저 녀석이 보통이 아니란 것은 리딩 때 이미 눈치챘다. 피디와 작가를 시작으로 출연진들이 모두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정면으로 들이받을 줄은 몰랐다. 잘못하면 말을 꺼낸 스스로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자신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녀석의 배짱에는 일순 조금 움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너도 거기까지 그냥 올라온 건 아니라 이거지.’
조윤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됐어. 난 슛 들어가기 전에 뭐 안 먹어.”
“와 선배님 저희 촬영 신 꽤 뒤쪽이던데 그럼 그때까지 쭉 굶으시는 거예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얼굴에 뒤늦게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주는 거 받아먹기 싫어서 대충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촬영, 저 녀석과 엮이는 신이었다.
“안 바쁘냐?”
그거 다 돌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눈으로 위아래로 쳐다보자 녀석이 짐짓 큰 소리로 대꾸한다.
“앗. 그러게요. 선배님 그럼 이따 봬요. 와 진짜 선배님 존경. 다른 분들한테도 말씀드려야지.”
저게 또 시키지도 않은 짓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꾸벅 인사하고 다른 배우 쪽으로 뛰어가 그를 붙들고 들고 있던 음료를 나눠 주며 이쪽을 힐끔 쳐다보는 것이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하필 예전에 다른 작품에서 만난 적 있던 사람이라 ‘쟤가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발 누가 저 자식 입 좀 꿰매 줘.’
한숨을 푹 내쉬면서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데 그 녀석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옆을 지나치며 슬쩍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쯤 해 두세요. 저 녀석 감당 안 되실 겁니다.”
뭐라는 거야.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이미 그 녀석 옆으로 뛰어가 다른 스태프를 붙들고 허리를 접어 가며 음료를 나눠 주고 있는 뒷모습만이 보였다. 아주 아이돌이고 매니저고 쌍으로 밥맛이었다. 내가 조연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지금? 매니저 주제에 누구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조윤민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구두 끝으로 괜히 바닥을 툭툭 걷어찼다.
* * *
‘보기보다 노력파란 말이지.’
피디를 비롯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잠시 차에 돌아온 석관은 그새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재이를 힐끔 쳐다보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기할 정도로 뭐든 쉽게 잘하는 듯 보이는 녀석이지만 석관이 보기에 한재이는 분명 노력파였다. [스텝 업] 촬영이 시작되었던 첫날, 자신까지 포함해 모두가 낯선 환경에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도 흔들림 없이 아직 오늘 치 러닝을 못 했다며 한 바퀴 뛰고 와도 되냐고 묻던 녀석이었다. 무엇이든 태연하게 잘해 내는 듯 보이는 녀석의 이면에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하는 근성이 있다는 것을 석관은 알고 있었다.
연기도 그랬다. 처음엔 굳이 이걸 해야 하나 싶어 하던 녀석이 한 번 스위치가 켜지자 무서울 정도였다. 성격 나쁜 주태온에게 몰입한 녀석은 조금 섬뜩할 정도로 무서울 때가 있었다. 멤버들이 방 하나를 통째로 내어 주고 알아서 피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석관은 재이의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잠시 조용히 있다가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하곤 재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집중 깨트려서 미안한데 말이지. 노래 좀 듣고 하지 않을래?”
“갑자기 무슨 노래요?”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본 석관이 대답했다.
“그거. 이환이랑 은규 경연곡. 완성본 조금 전에 받았는데 지금 괜찮으면 들어 볼래? 시간 없다더니 벌써 두 곡이나 뺀 모양이야.”
은규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가며 악전고투하던 곡이 드디어 완성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거 본 경연 올라가면 다들 응원 가기로 하지 않았나? 잠시 스케줄을 떠올리던 재이가 문득 억울하다는 듯 내뱉었다.
“와 근데 이 인정머리 없는 녀석들. 그걸 형한테만 보냈어요? 나한텐 연락 없던데? 배신이네! 배신이야. 이래서 검은 머리 동물은 거둬 먹이면 안 된다는 거구나. 배은망덕한 것들.”
재이가 투덜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석관이 달래며 말했다.
“그러지 마라. 너 집중 깰까 봐 애들이 요새 얼마나 노심초사하는 줄 아냐?”
“완전 오버죠. 누가 보면 제가 인생 역작 주연 드라마라도 찍는 줄 알겠다고요. 다들 왜 시키지도 않은 짓들을 하냐고요. 그냥 이참에 아주 저 갖고 노느라 신난 그것으로 보이던데.”
여섯이 생활하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숙소는 당연하게도 온갖 소음으로 항상 시끄러웠다. 멤버들은 자기들이 한재이의 몰입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핑계로 방까지 비워 주며 슬슬 피해 다녔지만, 그래 봐야 다섯 명분의 생활 소음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몰입은커녕 크지도 않은 숙소에서 멤버 다섯을 상대로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에 괜히 신경만 더 쓰였다.
“이야, 한재이 독고다이 기질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그룹 체질이었구나?”
“그랬으면 애초에 저 짐들 짊어질 생각 않고 깔끔하게 솔로로 데뷔했죠.”
“어휴 저 자신감. 하여간에 한마디를 안 지지.”
석관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본 재이가 덧붙였다.
“화보 보셨죠? 그게 제 매력이래요.”
“그래, 말을 말자 말을.”
아직 촬영까지 시간 여유 있으니까 그 틈에 좀 들어 볼래?
본론으로 돌아온 석관이 묻는 말에 재이는 대본을 덮고 몸을 곧추세웠다. 이환과 심은규가 아예 박예찬 프로듀서의 작업실로 이사를 하듯 들어앉아 작업한 곡이었다. 평소 소심해 보여도 음악적으로는 주관이 뚜렷한 심은규가 저 성깔 있는 이환과 박예찬을 상대로 어떤 곡들을 만들어 냈을지 순수히 기대됐다.
“…이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온 신경을 집중해서 노래를 들은 재이가 입을 열었다.
“…저 이제 장세은 팀장님 안 피해 다녀도 되겠는데요?”
재이의 말에 석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은규가 박예찬과 작업 중이라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장세은 팀장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땅을 쳤다는 소리에 재이는 요 며칠째 스케줄을 핑계로 장세은을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석관이 말했다.
“그러잖아도 조금 전에 장 팀장님한테서 너 잡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거 듣고 김 샜다며 문자 왔다. 귀신같은 녀석, 어떻게 거기서 박예찬 프로듀서 생각을 했냐.”
“아니 딱히 거기까지 생각한 건 아닌데요……. 이우연 선배님이면 돌파구가 될 만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라.”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석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물었다.
“이거 1차 통과하면 스튜디오 녹화에 우리도 가는 거죠?”
예선을 통과하면 그때부터는 스튜디오에서 방청객 투표로 당락을 가르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패널로는 참가자들과 인연이 있는 연예인들이 응원부대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아마 멤버 전원은 무리여도 한둘 정도는 들어갈걸. 근데 너는 이거 촬영해야지 거기 쫓아다닐 틈이 어디 있다고.”
“아무리 바빠도 전국 단위 시청자들 앞에서 생색낼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무슨 일이 있어도 갑니다.”
“너도 참, 못 말리겠다 아주.”
석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일단 슬슬 나가 볼까, 미리 움직여서 나쁠 것 없지.”
석관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펼쳐 들고 있던 대본을 덮었다.
이제 다시 파티의 메인보컬 한재이에서 중화요릿집 아르바이트생 주태온으로 변신할 시간이었다.
* * *
“이거 놓으시죠?”
‘뭐야, 이 눈빛.’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노려보는 차가운 눈동자에 조윤민은 순간 뒤로 물러서려던 것을 꾹 참고 대사를 쳤다.
“왜 자꾸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거지?”
“배달 중이었는데요.”
“못 믿겠는데? 잠깐 이리…….”
대사와 함께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손목을 잡아당기려던 오 형사는 순식간에 제 손을 털어 내고 거리를 띄워 서 있는 주태온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본의 지문도 주태온이 오 형사의 손길에서 재빨리 빠져나간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생각으로 필요 이상의 감정을 담아 빠져나가기 힘들도록 단단히 쥐고 있던 참이었다. 이래 봬도 유도 3단인 자신이었다. 유단자인 자신이 마음먹고 잡고 있는 걸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멍한 표정으로 상대편을 바라보고 있는데 피디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컷. 지금 흐름 좋았어. 오 형사 조금만 더 집중하고, 다시 한번 가죠.”
피디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윤민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주태온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집중이 흐려진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듯한 발언에 최 피디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괜찮던데? 그 정도로 빨리 빠져 줘야 나중에 보정 포인트 잡기 편해. 오 형사가 태온이 스피드에 좀 더 맞춰 봐요.”
‘뭐야, 케이엠한테 뇌물이라도 먹은 거야. 왜 저 애송이한테만 저렇게 말랑말랑해.’
노골적인 편애가 느껴지는 피디의 발언에 얼굴이 굳은 조윤민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다른 각도에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거 놓으시죠?”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는 목소리가 한층 리얼하게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조윤민이 눈썹을 찌푸리며 대사를 쳤다.
“왜 자꾸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거지?”
“배달 중이었는데요.”
퉁명스러운 대답과 함께 녀석이 자신에게 잡힌 손목을 슬쩍 비트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엔 제대로 잡았으니 절대 아까처럼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걸. 속으로 중얼거린 조윤민이 꽉 눌러 잡은 손목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못 믿겠는데? 잠깐 이리…….”
이번에도 아까처럼 그렇게 잽싸게 빠져나갈 수 있나 보자.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심산으로 힘을 주어 잡아당기던 조윤민은 일순 당황했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주태온이 휘청이다가 이쪽으로 훅 딸려 왔기 때문이었다.
“으윽.”
‘어, 이게 아닌데.’
짧게 들려온 신음 소리에 조윤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