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자신 있다면서
“컷. 주태온이 괜찮아?”
피디의 심각한 목소리와 함께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 석관이 뛰어들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거 좀 놓으시죠.”
희미하게 생긴 인상과 달리 날카로운 석관의 목소리에 조윤민은 자신이 아직 한재이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손에 쥐고 있던 힘을 풀었다.
“잠깐 의무팀에 보이는 게 좋겠는데.”
어느새 다가와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던 피디가 건넨 말에 재이의 손목을 살피던 석관이 조윤민을 힐끔 쳐다보곤 피디를 돌아보며 말했다.
“첫 번째 컷도 그렇고 지금도 배우끼리 사인이 안 맞았다고 보기엔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혹시 저희 모르는 사이에 대본에 수정이라도 있었습니까.”
혹시 너, 쟤랑 짜고 우리 애 물 먹이는 거 아니냐고 정중한 말투로 대놓고 따지는 석관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피디가 조윤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정은 무슨. 오 형사, 무슨 일이야? 대본이랑 다르잖아? 거기서 그렇게 세게 붙잡고 있으면 태온이가 다음 연기를 어떻게 해?”
“아니 그렇게 세게 잡지는 않았는데…….”
조윤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역효과였던 듯 피디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세게 잡지 않았는데 손목이 이렇게 되나? 대본대로 가자니까? 내 주문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드나? 가벼운 씬 하나 따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어렵게 갈 일이야?”
뒤늦게 달려온 조윤민의 매니저가 중재에 나섰다.
“아이고 피디님. 우리 윤민이가 열의에 넘쳐서 그만 실수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절대 고의는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윤민이가 연기에 얼마나 열성적인지.”
이쪽을 바라보는 매니저가 어서 사과하지 못하겠느냐고 연신 눈짓을 해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정쩡하게 촬영장 한복판에 서 있던 조윤민은 아까부터 계속 따라붙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처음엔 그렇게나 간단히 피한 녀석이 두 번째에서 순순히 당했다는 건…….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야?’
뒤늦게 당했다는 생각에 조윤민은 석관과 조연출에게 둘러싸여 의무팀이 있는 쪽으로 막 걸음을 옮기는 중이던 재이 쪽을 쳐다보았다. 이쪽의 시선을 느낀 듯, 순간 고개를 돌린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
재이의 눈빛을 읽은 조윤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과 마주친 저 어린 녀석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얕은수에 걸려든 기분이 어떠냐며 노골적인 비웃음이라도 담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잠시 마주치고 그대로 비껴간 시선에 담긴 것은 어쩌다 소품에 부딪쳐 다치기라도 한 것 같은 무심함 뿐이었다.
뒤늦게 무기력한 패배감이 피어올랐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을 뿐 그대로 촬영장을 빠져나간 녀석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던 조윤민은 제 뒤통수를 꾹꾹 누르는 매니저의 성화에 뒤늦게 주변에 사과하기 시작했다.
* * *
“아 그 인간, 처음 봤을 때부터 싸하더니 결국 제대로 사고 쳤네. 안 되겠다, 정식으로 항의해야지.”
재이의 손목에 압박 붕대를 감고 있는 스태프의 손길을 바라보던 석관이 분통 터진다는 듯 내뱉었다.
“그냥 두세요. 딱히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심하게 다친 게 아니기는. 금세 부어오르던데. 아프면 곧장 뿌리치고 NG 내 버려야지 그걸 참고 있었냐.”
석관의 잔소리에 재이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덩치 큰 아저씨가 아주 작정하고 틀어쥐는 걸 제가 어떻게 뿌리쳐요.”
“이상하네. 왜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처럼 들릴까.”
석관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재이가 툴툴거렸다.
“저에 대한 신뢰가 그 정도밖에 안 되셨다니 실망이네요, 형.”
“입 살아 있는 거 보니 네 말대로 심하진 않은가 보다. 그나마 다행이네.”
“왜 이상한 데서 납득하시지. 뭔가 억울한데.”
붕대를 감아 주고 있던 스태프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큭큭 웃으며 끼어들었다.
“심하진 않은데 그래도 손목에 무리 가서 좋을 거 없으니까 며칠간은 조심하세요.”
‘뭐, 그래도 이걸로 앞으로 귀찮게 굴지는 않을 것 같으니 싸게 먹힌 건가.’
스태프의 말에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재이는 생각했다.
조윤민이 촬영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엉겨 붙을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어떤 식이 과연 어떤 식일지 궁금했는데 겪어 보니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서로 합의되지 않은 돌발 행동으로 상대방의 멘탈을 압박해서 NG를 유도해 보겠다니, 결국 리딩 때와 똑같은 수법 아닌가. 지난번에도 먹히지 않았던 수법인데 이번이라고 걸려들 리가 없었다.
‘조금 손해 본 기분도 들지만.’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테이핑이 끝난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 보았다. 불편한 느낌은 있었지만 단단하게 감긴 테이핑 덕분인지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최 피디는 섬세한 디렉팅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성격상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것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대본을 무시하고 장난을 쳐 댄 조연을 그냥 둘 리 없었다. 게다가 이미 리딩에서의 전적이 있었다. 불협화음이 더 이상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조정에 들어갈 터였다. 일이 터지자마자 석관이 눈치껏 적절하게 피해자 포지션을 취해 놓은 만큼 입장상으로도 이쪽이 유리했다. 이젠 흘러가는 대로 두고 봐도 될 일이었다.
* * *
조금 쉬고 오라는 최 피디의 배려에 의무팀이 있는 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와 보니, 현장은 이미 촬영이 재개되어 있었다. 두 주연 배우, 홍리세와 차상혁이 합세하자 확실히 공기의 무게감부터 다른 듯한 느낌이었다. 재이는 티격태격 말씨름을 벌이고 있는 두 배우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둘 다 바쁜 몸이라 따로 대사를 맞춰 볼 시간 따위 없었을 텐데도 톱니바퀴 맞물리듯 딱딱 들어맞는 타이밍에 지켜보고 있는 이쪽의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소장과 여선욱의 씬이 끝나고 드디어 주태온이 합류하는 장면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재이는 두 사람의 호흡을 끊어 내는 타이밍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성큼, 카메라의 앵글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님이 외상값 받아 오래요.”
“외상값이라니? 내가 안 낸 게 있어? 그럴 리가 없는데? 확실한 거야?”
“전화해 보시던가요. 일단 돈부터 주세요. 만 칠천이백 원이요. 아님 요리 못 드려요.”
원 대본과 약간 다른 홍리세의 변화구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치며 넘어가는 재이의 연기를 보며 최 피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녀석, 센스 있네.’
소장이 의심스럽다는 듯 캐묻는 데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제 할 말만 내뱉는 것이 딱 불량 아르바이트생 주태온다웠다. 소장과 여선욱이 서로에게 각을 세우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태연하고 무관심한 주태온의 조합이 꽤 쓸 만했다.
‘저건 살려 볼까.’
세 사람의 컷을 따로 빼 보기로 마음먹고 위치를 확인하니 재이는 이미 테이핑한 쪽의 손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슬쩍 각도를 비틀어 선 채였다. 카메라가 들어오는 각도와 자신이 설 자리를 미리 계산해 두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눈치도 있고. 좋아.’
최 피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괜히 왔다가 돈만 뜯기게 생겼네. 얼마라고요?”
“과, 과, 과장님! 과장님! 큰일 났습니다!”
여선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등장한 오 형사가 외치는 것을 본 최 피디가 기다렸다는 듯이 컷 사인을 냈다.
“잠깐 끊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최 피디의 얼굴에 촬영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최 피디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노 작가, 난데. 안 되겠다. 역시 두 번째로 갈게.”
두 번째가 뭔데.
출연진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사전에 미리 들은 바가 있는지 촬영 스태프들이 하나둘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화를 끝낸 최 피디가 오 형사 역할의 조윤민에게 말했다.
“여기서 오 형사 대사는 전화로 주고받는 거로 대체하죠. 김 감독님 아까 2안 설명해 드렸던 대로 동선 준비하시고, 타이밍 맞춰야 하니까 오 형사는 밖에서 대사 좀 쳐 줘. 필요하면 레코드는 나중에 따로 땁시다. 선욱 씨 핸드폰 들고 있지?”
“피디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황한 조윤민이 외쳤다. 차상혁이 양복 주머니에서 협찬받은 핸드폰을 꺼내 드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최 피디가 바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지금 있는 인물들한테 포커스 둔 채로 진행하는 쪽이 전체적인 흐름이 좋을 것 같거든. 노 작가 컨펌 난 사항이니까 오 형사가 이해하고. 조명팀도, 아까 알려 준 2안 루트 숙지했죠? 선욱 씨는 핸드폰 꺼내 드는 타이밍만 좀 조심해 주고. 다시 한번 갑시다. 오 형사 대사 좀 부탁해.”
정신없이 쏟아지는 최 피디의 지시에 제작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다시 촬영장 세팅에 들어가자 망연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는 조윤민을 조연출이 눈치껏 카메라 앵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조윤민의 매니저가 최 피디에게 달려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최 피디는 나중에 얘기하자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냉담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가차 없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촬영장에서는 피디가 왕이라더니. 조처를 하기야 하겠지, 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신속하게, 그것도 대놓고 분량을 들어 내 버릴 줄은 몰랐다.
‘내 눈앞에서 분탕 치지 말라는 거지.’
분위기 흐려 놓는 사람은 두고 보지 않겠다는 엄포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주·조연 리스트 마지막에 겨우 발 걸친 조연이라지만 사전 조율도 없이 그 자리에서 곧장 분량을 날려 버리다니, 괘씸죄가 추가되었다고는 하나 최 피디 배짱도 보통은 아니었다. 골치 아프게 시비 거는 사람을 칼같이 쳐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앞으로 저 칼이 어디를 향할지는 항상 유심히 살펴야겠다고 재이는 생각했다.
* * *
“그래서, 분위기 완전 싸했다니까. 진짜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었…….”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어땠냐고 엉겨 붙는 녀석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재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뒤늦게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다섯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래서, 다쳤다고?”
앞뒤 자르고 훅 들어오는 인혁의 목소리에 순간 움찔한 재이가 대답했다.
“어? 아니. 다친 것까진 아니고 좀 부은 거…….”
“테이핑까지 했으면 다친 거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엠케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야 그걸 그냥 뒀다고? 천하의 한재이가?”
남궁찬이 못 믿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물었다.
“빨간 머리로 레벨 업 한 거 아니었어? 왜 맞고 와?”
“아니 안 맞았는데.”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이환의 말을 정정하려는데 은규가 끼어들었다.
“한재이 센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물러 터져서는.”
아니 심은규 솔직히 내가 너한테 그런 말 들을 레벨은 아니지 않냐.
억울해진 재이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여는데 인혁이 한 박자 빠르게 내뱉었다.
“가만 보면 허당이 따로 없다니까. 어디 가서 맞고 오기나 하고.”
아니 이보세요들? 나 안 맞았다니까?
어이없는 표정의 재이를 놔둔 채 다섯 명의 멤버들이 하나둘씩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걸 그냥 놔두다니, 석관이 형도 실망이네.”
“그러게. 촬영이고 뭐고 뛰어들었어야 되는 거 아님?”
“매니저 직무 태만이야. 징계감이네.”
“야 니네 형은 뭐 했다냐? 소속사 후배가 맞고 있는데 설마 보고만 있던 거야?”
“진짜 그랬으면 가만 안 두지. 대표님께 말씀드릴까.”
인혁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깐 얘들아 정신 좀 차려 봐.
재이가 입을 열려는데 이번에도 이환이 한 박자 빨랐다.
“리딩 때 참지 말고 들이받았어야 해. 그걸 참아 주니까 깔보고 날뛴 거 아니냐고.”
그 말에 다른 멤버들이 또다시 한마디씩 얹었다.
“그러게. 왜 답지 않게 착한 척인지.”
“내 말이. 거울이나 보고 착한 척하는 건지. 진심 1도 안 어울려.”
“그치 거기서 그냥 당하고 있었다니, 그거야말로 진정한 캐붕 아니냐고.”
“눈길로 사람 죽일 것 같던 주태온 어디 갔냐고.”
제발 누가 좀 말려 줘.
다 포기한 표정으로 멤버들의 수다를 듣고만 있는 재이를 힐끔 쳐다본 엠케이가 말했다.
“한재이가 부상 중이니, 어쩔 수 없다. 환심이 응원은 내가 대신 가도록 하지.”
“뭐? 그런 게 어딨어. 공정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해.”
남궁찬이 화들짝 놀라 외치는 말에 재이가 어이없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패널석에 앉아서 응원하는 데 손목이 무슨 상관이라고. 김칫국 너무 마시지 마라, 염분 과다 섭취 하면 얼굴 붓는다.”
“게다가, 내가 안 가면 환심이가 서운하지. 이번 곡에 내 지분이 얼만데.”
이환과 심은규를 돌아본 재이가 쐐기를 박았다.
“자신 있지?”
단 한마디로 구석까지 몰리던 전세를 뒤집어엎으며 재이가 묻는 말에 이환이 기세등등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으응. 그, 그럼.”
“어째 목소리가 작은데? 왜, 박예찬 선생님으로도 부족했던 거야 혹시?”
재이의 말에 이환의 옆에 있던 은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절대 아닌데.”
“그럼 됐지 뭘.”
우승할 거지? 라며 두 사람에게 웃어 보이는 재이의 물음에 이환과 은규가 마지못해 뭐라 웅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 * *
며칠 후.
XX 등 LBC 공연홀 출연자 대기실
“이래서 너희들 오늘 무대 하겠냐.”
어이없다는 듯 재이가 중얼거린 소리에 옆에 선 인혁이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바짝 얼어붙은 표정의 두 사람, 이환과 심은규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