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혹시 걸려들까 싶어 쳐 봤던 건데
“재이 너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뭐가요?”
재이는 자신의 손목 부상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시선을 돌려 옆자리에서 운전 중인 석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불망동 탐정 사무소]의 제작 발표회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거, [너의 노래가 들려] 경연 녹화할 때 손목에 테이핑했던 거. 오늘 기자들 중에 그거 묻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자신을 힐끔 쳐다보며 묻는 석관에게 재이가 씩 웃어 보이곤 대답했다.
“그냥, 돌다리 좀 두드려 본 거죠.”
며칠 전 방송을 탄 [너의 노래가 들려] 첫 경연에서 이환과 은규는 아이돌에 대한 편견의 유리천장을 깨부쉈다는 호평을 들으며 다음 경연으로 가는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런 환심이의 선전만큼이나 파티의 팬들을 뜨겁게 끓어오르게 한 것이 연예인 응원단석에서 환심즈를 응원하던 재이의 손목에 감겨 있던 테이핑이었다.
“돌다리를 두드리다니?”
석관이 묻는 말에 재이가 대답했다.
“그렇잖아요. 기껏 조율해 놨는데 엉뚱한 데서 엉뚱한 소리 하면 김빠지니까.”
조윤민과의 일에 대해서는 향후의 대처 방법에 대해 관계자들끼리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아직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배우 간에 불화설이 터져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점에서 모두의 이해가 일치했다. 의욕이 넘쳐서 일어난 작은 사고쯤으로 무마하기로 합의를 본 뒤였으니 사실 기자에게서 질문이 들어와도 미리 맞춰 둔 대로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이건 그냥 일종의 보험이지.’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난하게 덮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것은 분명 옳은 판단이었지만, 조윤민은 이번 일로 초반 분량도 잃고 제작진의 민심마저 잃은 상황이었다. 제작 발표회야 짬이 안되어 못 나온다지만 어디서 어떻게 뒤통수를 치려 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 일로 조윤민이 스스로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었길 바라는 게 나이브한 발상인 거 아닌가.’
입과 글로 하는 싸움이 피 튀기고 뼈 갈리는 전투만큼이나 살벌할 수 있다는 것은 저쪽 동네에서 이미 목도한 바였다. 리온의 경험상 이 정도 보험은 들어 두는 것이 맞았다.
“진짜 너는. 애들이 흑막이니 최종 보스니 하는 말도 일리는 있다니까.”
“와 너무하시네. 조심성 있다, 신중하다, 철두철미 뭐 이런 좋은 말을 놔두고 굳이.”
“음. 그게 또 그런 느낌은 아니란 말이지.”
뭔가 좀 더.
덫 쳐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 같은 느낌이랄까.
석관이 중얼거리는 말에 재이가 그를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하여간에. 멤버고 매니저고 다들 나만 몰아, 나만.”
툴툴거리면서도 그 틈에 또다시 대본을 집어 드는 재이의 모습을 힐끔 확인하곤 석관이 웃었다.
* * *
ZTBC 드라마 [불망동 탐정 사무소] 제작 발표회
“피디님, 안녕하세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오, 태온이 왔구나.”
리허설 준비로 한창인 회장으로 들어가니 이제 막 도착한 듯한 최재욱 피디와 노영란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꾸벅 인사하며 다가가니 노 작가가 새삼스럽다는 듯 재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와, 찢어진 청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만 보다가 오늘 보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네.”
“이게 제 본모습이죠.”
뻔뻔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하는 재이는 검은 슈트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은 심플한 차림새였다. 딱히 액세서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 탓인지 시선이 확 쏠릴 정도로 화려해 보였다.
“어째 주태온보다 한재이가 한 수 위인 것 같아.”
“데뷔 때부터 어그로 외길 인생이거든요.”
재이의 대답에 캐스팅 때가 떠올랐는지 노 작가가 큭큭 웃는 것이 보였다.
“촬영장에서 바로 오신 거예요?”
최 피디를 돌아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오늘 A팀은 전부. 이거 끝나고는 태온이도 우리랑 같이 출발하나?”
“예. 저도 가야죠.”
빡빡한 촬영 스케줄은 제작 발표회가 있는 날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오늘 발표회가 끝나면 재이도 그대로 촬영팀에 합류해 새벽까지 촬영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저기 우리 주연 배우들 오시네.”
재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최 피디는 재이의 어깨 너머 회장 입구에서 마침 들어오고 있던 홍리세와 차상혁을 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마침 들려온 스태프의 안내에 장내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불망동 탐정 사무소] 제작 발표회가 열릴 회장 입구에 선 데일리 엔터 최보민 기자는 감개가 무량했다.
전략적 제휴 관계인 케이엠과는 일해 온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소속 연예인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꿰고 있는 편이었다. 연예부 기자 중에선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덕에 작년 케이엠과 TVM이 진행한 서바이벌 예능 [스텝 업]에서는 심사 위원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있는 탓인지 오늘, 이 제작 발표회에 참가하는 기분이 남달랐다.
‘퇴출 1호 연습생이 어느새 드라마 데뷔라니.’
최보민 기자는 [스텝 업]의 첫 촬영 날 무대에 서 있던 한재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날, 미리 받았던 참가자 프로필에 적혀있던 연습생 평가 기록에서 줄곧 최하위를 찍고 있던 그래프가 직전 3개월 수직 상승하고 있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출력 오류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때 무대에 올라 자기소개를 하던 한재이의 모습을 보고 단박에 이해했다.
저건 될 녀석이구나.
프로그램을 위한 어그로였건 뭐건, 눈앞에서 반짝이는 재능만큼은 진짜였다. 게다가 그 나이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두둑한 배짱까지. 데일리 엔터가 케이엠의 어용 미디어라는 소리를 듣는 것과 별개로 대중이 최보민 기자를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그녀가 가진 이 ‘감’ 덕분이었다. 최보민이 찍으면 뜬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그녀의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리고 오늘 제작 발표회는 그 ‘보민픽’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가 될 터였다.
최보민은 회장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장식한 세트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역시 세상 커플. ZTBC에서 아주 아낌없이 쏟아부었구나.’
최보민의 관심이 한재이에게 쏠려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드라마의 주역은 홍리세와 차상혁이었다. 시청률 퀸 홍리세와 슈퍼스타 차상혁의 빅매치. 이미 세상 커플이라며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주연급들의 위력은 제작 발표회의 규모와 세트에 들인 정성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이미 도착한 기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아 앉고 있었다. 얼마 후 제작 발표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짧은 안내 방송이 흐르고 무대 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하이라이트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이 사건, 내가 꼭 끝까지 파헤치고 말 거야.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사건 파일을 꽉 쥔 채 나직이 내뱉는 R에게 여선욱이 말했다.
- 네가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이유를 모르겠어. 포기해. 너만 위험해질 거라고.
- 아니. 넌 몰라.
그의 말을 단호히 끊어낸 R이 여선욱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그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 내게 어떤 힘이 있는지.
그녀가 쥐고 있는 한 장의 풍경 사진 위로 그 사진이 찍힌 곳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오버랩 되며 장면이 바뀌었다.
불망동 탐정 사무소.
경찰 제복이 아닌 편한 복장의 R이 맞은편에 앉은 면접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그래요 백백설 씨. 특기가 뭐라고요?
조금 전 그 처절하기까지 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우아하고 느긋한 말투. 눈앞에 앉은 백백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 냄새를 잘 맡습니다.
- 흥미롭군요.
다음 장면. R이 여상한 말투로 묻는다.
- 장호성 씨, 특기는?
- 힘이 셉니다.
말과 함께 한 손으로 옆에 놓인 3인용 소파를 들었다 놓아 보이는 장호성.
- 흥미롭군요.
그 뒤로 소장 R이 쫓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흐르고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는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배달이요
붉은 머리에 귓가에는 주렁주렁 피어스를 달고 목 늘어난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 낡은 운동화를 신은 주태온이 철가방을 들고 화면에 등장했다. 사무소 테이블에 건성으로 그릇들을 탑 쌓듯 올려놓고 소장에게 돈을 받아 사무소를 나선 그는 낡은 상가의 인적 드문 복도 끝에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그리고 그가 건넨 돈을 받아 들고 액수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수상한 사람들이
수상한 사건을
수상한 방법으로 해결한다.
[불망동 탐정 사무소]
스피디한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개 영상이 끝나고 무대가 밝아졌다. 최보민 기자는 눈을 빛냈다.
‘홍리세와 차상혁을 데리고 B급 감성 드라마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보통은 로코 쪽으로 갈 텐데. 각본이 좋은 건가, 아니면 편성을 따낸 피디 수완이 좋은가.’
최보민이 생각에 잠겼다.
사회자의 오프닝 멘트가 시작되었다.
“ZTBC 특집 드라마 [불망동 탐정 사무소] 제작 발표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이라이트 영상은 어떠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이 수상한 탐정 사무소를 만들어 가는 수상한 사람들을 불러 볼까요!”
소개 멘트와 함께 피디와 작가, 그리고 주·조연 배우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기획 의도, 제작진의 포부를 듣는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배우들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뉴티비의 장형오 기자입니다. 차상혁 배우, 이번 드라마를 끝으로 입대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정확한 시기는 아직 조율 중입니다만, 슬슬 고려하고 있는 사항이긴 합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오, 역시 슈스의 힘인가. 재이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감탄하며 질문과 답변을 이어 가는 선배 배우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구경했다.
“노영란 작가님께서 ‘내 작품에 더이상 아이돌은 없다’라고 선언하신 지 하루 만에 캐스팅된 거로 화제를 몰았는데, 한재이 ‘배우’, 본인의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이는 노골적인 어그로와 함께 자신을 지명해 묻는 기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쩍 옆을 보니 노영란 작가가 짜증 난다는 듯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성미 급한 노 작가가 끼어들기 전에 재이가 앞에 놓인 마이크를 들고 대답했다.
“생 신인이 첫 작품에 이 정도면 신동 소리는 못 들어도 차상혁 후배 소리는 듣겠다고 하시던데요. 최 피디님이.”
훌륭한 탱딜이 여기 널렸는데 나 혼자 어그로를 감당할 필요가 있나.
카메라가 최 피디와 차상혁 쪽으로 쏠리는 것을 보며 재이가 싱긋 웃었다.
“하하, 아까 하이라이트 영상 보셨죠? 그 모습 그대로 오디션장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작감이 안 뽑고 배기겠냐고요. 안 그래요, 노 작가?”
최 피디가 노련하게 공을 노 작가에게 넘겼다.
“그러게요. 제가 오디션장에서 한재이 씨한테 그랬다니까요. 한재이 씨 덕분에 나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라는 꼬리표 붙게 생겼다고.”
노 작가가 웃으며 투덜댔다. 그 뒤로 잠시 주연 배우들에게 돌아갔던 질문의 화살이 다시 재이에게로 쏠린 것은 구석에 앉아 있던 기자 한 명이 던진 질문이었다.
“한재이 배우, 최근의 손목 부상이 경쟁 배우와의 분량 싸움을 위한 자작극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재이는 지금 질문인지 제보인지 모를 멘트를 던진 기자 쪽을 쳐다보았다.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 쪽으로 쏠렸음에도 태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기자를 잠시 마주 본 재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극을 두 개나 동시에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연기에 익숙지 않은데요.”
차분한 어조로 받아친 재이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기자에게 되물었다.
“근데 제 손목 부상은 어떻게 아신 건가요?”
허둥대기는커녕 눈을 빛내며 되묻는 재이의 태도에 기자가 당황한 듯 어색하게 대꾸했다.
“며칠 전 한재이 씨가 출연한 모 예능에서 손목에 테이핑을 하고 있던 게 카메라에 잡혀서 인터넷에 회자했던 거 모르십니까. 그게 촬영장에서 경쟁 배우를 찍어 내려고 일부러 다친 거였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이게 본론인가 보네. 이야, 오 형사님 보기보다 수완 좋네. 제작 발표회에서 기자를 쓸 생각을 다 하고.
재이의 속내와는 달리, 회장 안은 갑자기 터진 자극적인 발언에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초고를 송고하는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빠르게 타이핑 중이었고 몇몇은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러 댔다.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 모두가 갑자기 얻어맞은 일격에 잠시 굳어 있는 사이 재이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흥미롭네요. 촬영장에서 제가 다친 건 사실이거든요.”
“인정하시는 겁니까?”
승기를 잡았다는 듯 득의양양하게 되묻는 기자의 말에 재이가 기자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촬영하던 중에 일어났던 가벼운 사고였죠. 곧바로 의무실에 가서 조치도 받았고 별거 아니라 그날 밤에 바로 테이핑 풀었는데요. 분량 싸움에 써 보기도 전에 나아 버렸는데 그런 말씀을 들으니 되게 억울하네요.”
재이의 말에 기자가 다그치듯 따져 물었다.
“그렇다면 예능에서 왜 손목에 테이핑하고 나온 거죠? 팬들을 이용해서 여론 몰이라도 해 보려고 한 거 아닙니까.”
“스타 뉴스 박연재 기자, 말씀이 지나치신…….”
보다 못한 최 피디가 마이크를 들고 끼어들려는 찰나, 재이가 중얼거렸다.
“그건 왼쪽이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확인한 재이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촬영하다가 다친 건, 왼쪽이었다고요. 며칠 뒤에 안무 연습 하다가 다른 쪽을 삐끗하는 바람에 그 예능 촬영할 때 어쩔 수 없이 손목에 테이핑을 하고 갔었어요.”
오른쪽에 말이죠.
못 믿겠으면 인터넷에 돌았다는 그 짤 확인해 보세요.
재이는 제 오른쪽 손목을 들어 왼손으로 톡톡 두드려 보이곤 이어 말했다.
“아시겠지만 아이돌이 사실 극한 직업이잖아요. 최대한 조심은 하는데, 가끔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더라고요.”
아, 참고로 지금은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재이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또다시 분주하게 들려왔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사회자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번엔 백백설 역의 백인혜 배우님 얘기도 좀 들어 볼까요? 평소 홍리세 배우를 존경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공연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요?”
재이는 몇몇 기자들의 시선이 여전히 제 쪽에 머무는 것에 싱긋 웃어 보이며 내심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들어 뒀던 보험인데, 이렇게 타 먹을 줄이야.
[너의 노래가 들려] 촬영에 손목 테이핑을 바꿔서 하고 나간 것은 석관의 말마따나 혹시나 걸려들까 싶어 쳐 보았던 가벼운 덫이었다. 자신에게 칼을 품은 사람과 줄곧 같은 배를 타는 것은 사양이었다. 만에 하나 조윤민이 정말로 자신에 대한 적의를 거둬들이고 개과천선했다면 이런 얕은수에 걸려들 리도 없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대놓고 걸려들 줄이야.’
기자까지 동원한 걸 보면 제대로 진심이었던 것 같은데. 조윤민이 소속사와 함께 벌인 일이건 단독으로 한 일이건, 이제 더는 수습하기 힘들어 보였다. 재이는 드디어 껄끄러움을 덜게 생겼다는 안도와 함께 인간의 적의란 대체 무얼까 싶은 생각에 옅게 밀려드는 씁쓸함을 삼켰다.
“자 그러면 여기서 저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죠. 바로 시청률 공약!”
사회자의 경쾌한 말투에 재이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잠시 흐트러졌던 분위기는 어느새 다시 드라마 제작 발표회 본연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청률 공약은 터무니없어야 맛이죠.”
차상혁이 옆에 앉아있는 동료 배우들의 얼굴을 훑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