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원래 대가리 깨져 가면서 배우는 거야
‘들이받아 버릴까.’
인혁의 우뇌가 중얼거렸다.
‘미쳤어? 여기서 저 사람 들이받으면 네 커리어 망하는 건 둘째치고 평생 한재이의 저주에 시달리게 될 거야.’
인혁의 좌뇌가 말렸다.
인혁의 좌뇌와 우뇌가 서로 치고받고 하는 사이 재이가 뒤를 돌아보며 최 피디를 향해 인사했다.
“피디님 오셨어요?”
“그래, 태온이가 커피 쏜다길래 와 봤지.”
“안녕하세요, 한재이랑 같은 그룹에 있는 엠케이라고 합니다.”
눈치 좋게 엠케이가 끼어들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서 있던 인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안녕하세요. 차인혁이라고 합니다.”
인혁이 한 박자 늦게 최 피디에게 꾸벅 인사했다. 인혁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엠케이가 대뜸 최 피디에게 물었다.
“피디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주태온이 최종 보스인가요?”
“야, 엠케이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한재이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엠케이가 말을 이었다.
“혹시 현장에서 피디님이나 작가님 만나면 꼭 물어보고 오라고 멤버들이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한재이가 자기 중후반 갈수록 비중 높아진다고 하도 으스대서.”
엠케이의 말에 최 피디가 웃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거 스포일러인데 어쩌지.”
“역시. 나중에 저게 막 다 날아차기 한판으로 쓸어버리는 거죠?”
“아하하, 그러면 너무 개연성 없지 않나?”
“주태온이 한재이면 그게 제일 개연성 있는 전개인데…….”
엠케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최 피디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와, 재밌어 보이는데, 저도 좀 끼워 주시죠.”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엠케이와 재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껏 분위기 돌려놨더니 다 틀렸네.
목소리의 주인공, 차인혁의 생물학적 형이자 [불탐정]의 주연 배우 차상혁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 이렇게 보니까 둘이 진짜 닮았구나. 부모님이 대단하시네, 어떻게 저런 걸 두 번이나 낳으셨지.”
옆에 나란히 선 차인혁과 차상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최 피디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저 눈치 없는 양반. 1절만 좀 하시지.’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앞의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눈코입만 붙어 있으면 세상 사람들 다 닮은 꼴인가.
재이는 최 피디의 감탄 포인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상혁은 조금 후 있을 촬영을 위해 분장을 마친 채 여유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반면 저 차인혁은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모양새가 속으로 언제 들이받을지 각을 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저 꼬인 성질머리의 어디가 상혁 선배랑 닮았다는 건지. 재이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습을 위해 입을 열려던 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차인혁이 입을 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형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죠.”
뭐야, 쟤 뭐 잘못 먹었어?
재이가 엠케이를 살폈다. 그러나 차인혁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입이 반쯤 벌어져 있는걸 보고 차상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차상혁도 제 동생의 반응이 의외였던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선 녀석을 돌아보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최 피디만이 재밌다는 듯 인혁의 말을 받아쳤다.
“차상혁의 겸손한 버전이라니 신선한데? 차 배우 긴장 좀 해야겠어? 군대 다녀오면 자리 없는 거 아니야?”
“백 년은 빠르죠.”
차상혁이 코웃음 치며 대답하는 것에 최 피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먼저 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엠케이가 차상혁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차인혁을 힐끔 바라보곤 재이에게 말했다.
“야, 아까 피디님한테 대답하던 차인혁 너무 멀쩡해 보여서 섬뜩했던 거 나뿐이냐.”
“꼭지가 돌긴 돌았는데 너무 많이 돌아서 360도 회전하고 정상처럼 보이는 듯.”
“아, 납득.”
두 사람이 쑥덕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차인혁이 투덜거렸다.
“뭐라는 거야. 날 뭐로 보고. 나 멀쩡하거든.”
“원래 제 입으로 멀쩡하다는 사람치고 진짜 멀쩡한 사람 몇 없더라고.”
“쏘트루 참트루네.”
세 녀석이 투닥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차상혁이 끼어들었다.
“야 너희 맨날 이러고 노는 거야? 재밌네.”
“은근슬쩍 끼어들 생각 말고 꺼지시지.”
“아이고, 차인혁, 입, 입.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엠케이가 인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 촬영장 쪽으로 차상혁의 등을 떠밀며 재이가 말했다.
“선배님은 이제 슬슬 촬영 가셔야죠. 피디님이 찾으시겠어요.”
“와, 한재이 너무하네. 차인혁만 챙기고. 너 내 팬 아니었어?”
“제가 선배님 팬인 건 선배님 팬도 알고 저희 팬들도 알고 천지신명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저거 여기서 터지면 골치 아프니까 그만 좀 찔러보시라고요.”
얌전히 좀 가라고 제발.
말은 안 했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재이의 마지막 말에 알았다며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던 차상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제 동생에게 말했다.
“아, 동생아, 올 때 나 아아메 한 잔만.”
“네가 갖다 먹어 인간ㅇ… 으읍”
잠시 힘을 풀었던 엠케이가 다시 인혁의 입을 틀어막는 사이 호탕하게 웃는 상혁의 등을 꾹꾹 밀며 재이가 투덜거렸다.
‘어휴, 그걸 못 참고 결국 터치냐.’
차인혁 저거 성격 꼬인 거 절반 이상은 제 형 탓이 맞긴 한 것 같다며 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근데 그 사람은 안 보이네?”
차상혁이 사라지고 흉흉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엠케이가 재이에게 물었다.
“누구?”
“있잖아 그 사람. 너한테 시비 건.”
“아아.”
“왜 안 와. 내가 오늘 그분 만나면 드리려고 비장의 레시피도 준비했는데.”
“얘 뭐라는 거야?”
재이가 묻는 말에 인혁이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엠케이가 오늘 그분 만나면 직접 커피 내려 드린다고 바리스타분과도 이미 말 맞춰 뒀거든.”
“까나리카노로 진하게 한 잔.”
“어휴. 큰일 날 뻔했네.”
먹는 거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니까.
재이가 엠케이한테 눈을 찌푸리며 잔소리하자 엠케이가 또 시작이라는 듯 건성으로 대꾸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왜 안 오신대? 나 기다리고 있는데.”
엠케이의 물음에 재이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되겠니. 제작 발표회에서 그 사달을 내고.”
“그러면?”
“집에 가셨지.”
재이의 짧은 대답에 인혁과 엠케이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헐.”
“내 까나리카노.”
제작 발표회에서 평소에 친분이 있던 기자를 이용해 여론 몰이를 하려다 들킨 조윤민은 결국 일신상의 이유를 핑계로 자진 하차를 택했다. 물론 그 뒤에는 앞으로 분량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대놓고 엄포를 놓아 버린 최 피디의 압력이 있었다. 어차피 아직 촬영분도 없던 터라 자연히 그의 역은 다른 배우에게 돌아갔다.
갑질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쩌겠나. 시청률이 갑인데. 며칠 전 첫 방영을 마친 [불탐정]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홍리세 차상혁 커플을 비롯한 드라마 떡밥만으로도 연예 기사란이 미어터질 지경인데 잘 알려지지도 않은 조연의 하차 소식이야 가십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새삼 덧없는 세상이라고, 재이는 생각했다.
“재이 씨, 촬영 갑시다.”
마침 재이를 부르는 조연출의 목소리에 앉아 있던 재이가 일어나며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어. 오늘 와 줘서 고마운데 다음에 올 땐 얘는 빼고 와라, 엠케이.”
“그래, 나도 얘가 저도 가겠다고 우길 줄은 몰랐다고.”
재이가 말과 함께 턱짓으로 인혁을 가리키자 엠케이가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아 내가 뭘 어쨌다고.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래,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제발 얌전히 있다가 가라, 알았지?”
열받는다는 듯 내뱉는 인혁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신신당부한 재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오늘 촬영할 장면은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소장과 여선욱 일행을 어디선가 나타난 주태온이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주태온이 가진 능력이 인간의 그것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이라는 것이 제대로 밝혀지는 순간이자, 그동안 선인지 악인지 불분명했던 주태온이 자신들의 편임을 소장과 여선욱이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와 분위기 살벌하네.”
촬영장 한쪽에서 구경 중이던 엠케이가 인혁에게 소곤거렸다. 인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리허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능글맞은 얼굴로 자신의 울화통을 터뜨리던 형 놈도, 그놈 편만 들면서 성질 좀 죽이라고 구박하던 한재이 놈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얼굴로 리허설에 한창이었다. 와이어 팀까지 동원된 액션 장면의 촬영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현장은 긴장감으로 차올라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치고 들어가니까 이쪽으로 돌아 나가면서 붙잡고 훅.”
“이렇게요?”
“그렇지. 그 틈에 선욱 씨가 들어가고.”
액션 팀 감독의 지시에 따라 합을 맞춰 보던 재이가 스턴트맨들과 함께 와이어를 이용해 도약하며 뒤로 훌쩍 간격을 넓혔다.
“태온아하아아-.”
“과장니이히이임-.”
풉.
큭큭-
와이어에 매달려 뒤로 물러나는 재이에게 상혁이 애달픈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진지하게 타이밍을 세고 있던 재이가 금세 표정을 바꾸고 익살스럽게 맞장구쳤다. 그런 둘의 쿵짝에 심각한 표정으로 움직이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엠케이가 인혁에게 속삭였다.
“역시 차상혁 선배님, 현장 분위기를 쥐락펴락하시네. 저게 주연 배우의 위엄인가?”
“올려치기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엠케이를 힐끔 쳐다보며 타박하긴 했어도 내심 같은 생각 중이었던 인혁은 입술 끝을 깨물었다. 엠케이의 말대로 차상혁은 본인의 촬영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스태프들이나 같이 공연하는 배우들의 분위기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와이어 액션이 처음인 재이가 혹시 너무 힘을 줄까 봐 일부러 장난을 건 게 분명했다. 주연 배우의 위엄이라는 둥, 슈스의 품격이라는 둥, 추켜세우는 말들에 과장은 있을지언정 터무니없는 말들은 아니었다. 인혁은 새삼 느껴지는 커다란 벽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애써 봐야 차상혁의 그늘 밑인 거야?’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못난 자아가 불쑥 얼굴을 치켜들었다.
“와, 차 배우 동생이 왔다더니 진짜였구나?”
인혁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인상을 팍 구겼다. 촬영장에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어딜 가나 그놈의 차상혁, 차상혁. 열심히 참았지만, 슬슬 한계였다. 오냐 너 잘 걸렸다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본 인혁은 그러나 들이받는 대신 놀란 얼굴로 꾸벅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차인혁이라고 합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드라마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불탐정]의 또 다른 주연 배우 홍리세였다.
“안녕하세요. 한재이와 같은 그룹에 있는 엠케이라고 합니다. 홍리세 배우님, 완전 팬이에요.”
“와, 저도 반가워요. 어쩜, 실물이 훨씬 귀엽다. 아, 실례. 제가 랜선이모 기질이 좀 있어서. 하하.”
자신의 반응이 의외였던지 엠케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웃은 홍리세가 옆에 선 인혁을 위아래로 훑어보곤 말했다.
“좋네. 차 배우가 저랑 똑 닮았다더니 진짜네.”
“제가 그렇게 닮았나요?”
형이라는 소리 입에도 담기 싫다는 듯 촬영 준비에 한창인 차상혁 쪽을 턱 끝으로 힐끔 가리키고 묻는 인혁의 낮은 목소리에 홍리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천천히 다시 훑어보았다.
“응. 완전 닮았어. 본인도 그런 소리 많이 듣지?”
빙글빙글 웃으며 묻는 홍리세의 대답에 인혁이 대꾸하기도 지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하고, 건방지고, 가소로운 게.”
홍리세가 나직하게 중얼거린 말에 인혁의 옆에 서 있던 엠케이가 숨을 들이켰다.
“딱 차상혁이 처음 봤을 때 그대로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인혁이 홍리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인혁을 위아래로 훑으며 홍리세가 피식 웃었다.
“차상혁이도 그랬어. 처음에 이 판 기웃거릴 때. 제 딴엔 가수 하면서 천재 소리 좀 들었는데 발 연기가 기대되는 아이돌 출신 배우 취급이나 받았으니.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가선 몇 작품 꼬라박으면서 대가리 깨지고 나서야 좀 나아지더라. 너 눈빛이 딱 그거야. 왜 아무도 내 진가를 몰라주냐고 징징거릴 때의 차상혁.”
엠케이는 정신이 혼미했다. 우아한 외모와는 백만 광년 떨어진 단어 선택으로 사람의 아픈 곳만 골라 패는 홍리세라니. 힐끔 옆을 바라보니 홍리세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저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며 혹시 듣는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극한직업 매니저. 엠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옆에 선 차인혁의 상태를 슬쩍 살폈다. 저게 회까닥 돌아서 홍리세 멱살이라도 잡는 날엔 말리지 못한 이쪽이 대역죄인으로 몰릴 터. 언제라도 뛰어들 태세를 갖추며 엠케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잠자코 있던 인혁이 입을 열었다.
“다 안다는 듯 말씀하시는 것, 상당히 불쾌한데요.”
인혁의 말에 홍리세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며 씩 웃었다.
“어쩔 건데. 꼬우면 뜨던가.”
엠케이는 차인혁을 바라봤다. 안된다. 인혁아, 참아라, 여기서 들이받으면 너랑 나랑 한재이까지 우리 다 함께 손잡고 아웃이야.
“저한테 굳이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다행히 아직 이성이 남아있는 듯 멱살을 잡는 대신 퉁명스럽게 내뱉은 인혁의 물음에 홍리세가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우아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병이거든. 오지랖.”
어처구니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인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홍리세가 씩 웃었다.
“기왕 왔으니까 잘 보고 가. 멍청한 게 아니라면 대가리 좀 깨지겠지만.”
원래 그래 가면서 크는 거야.
홍리세가 중얼거리는 말에 엠케이가 질렸다는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인혁이 말없이 생각에 잠긴 사이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태온——!!!”
리허설과는 전혀 다른 박력의 목소리가 촬영장이 꽉 차도록 울려 퍼졌다. 훌쩍 뒤로 도약한 태온이 끌고 온 스턴트맨 둘을 아래로 밀치며 외치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니까 가!”
“주태온!”
“걸리적거려, 가라고!”
“컷, 태온이, 선욱 씨 앞으로 와서 바로 이어서 갑시다.”
최 피디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차상혁이 서 있는 쪽으로 돌아온 재이가 감정을 잡았다. 슛 사인이 들어가자 곧이어 액션 팀과의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숨죽인 채 구경 중이던 엠케이가 인혁에게 속삭였다.
“저렇게 끊어서 가는데도 호흡이 안 끊기네.”
“그러게.”
인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날 때 자신의 몫까지 다 쥐고 태어난 것 같은 저 형 놈도 편견과 싸워 가며 맨땅에 헤딩해 가면서 치열하게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 사실 남이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한재이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의 그 비대한 자의식이 문제라고.
“대가리 깨 가면서 배우는 거라고?”
낮게 중얼거리자 엠케이가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엠케이에게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인 인혁은 중얼거렸다.
“그럼, 나도 깨져 보지, 뭐.”
* * *
‘저거 불안한데.’
긴박하게 돌아가는 촬영의 틈에 힐끔 두 녀석이 서 있는 곳을 쳐다본 재이는 뭔가 수상한 표정으로 삐죽 웃고 있는 인혁의 표정을 확인하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인혁은 대체로 멀쩡한 녀석이지만 잘난 형을 둔 동생이라는 트라우마를 자극당하면 미친놈처럼 눈이 돌아가는 게 흠이었다. 제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 최대한 차상혁과 얽히지 않게 조심하는 듯하더니.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오늘 덜컥 촬영장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심장이 다 철렁하던 차였다.
“한재이 여유 있네. 한눈도 팔고.”
“잠깐 숨 좀 돌린 건데 너무 쪼는 거 아닙니까.”
억울하다는 듯 투덜대는 재이에게 차상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또 이뻐하는 애들한텐 좀 엄한 편이거든.”
“영광이긴 한데요. 그 말씀 동생분한테는 해 주신 적 있나요.”
재이의 질문에 허를 찔렸다는 듯 차상혁이 헛웃음을 지으며 재이를 쳐다봤다.
“뭐?”
“저 녀석 고지식해서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듣거든요.”
더 말해 보라는 듯 잠자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차상혁에게 재이가 이어 말했다.
“칭찬도 갈굼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먹히는 스타일이라고요.”
자기 동생인데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재이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있던 차상혁이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라고.”
생각에 잠긴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차상혁을 힐끔 바라본 재이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집안일은 집안에서 좀 해결하자고요, 제발.’
* * *
“난 못 믿겠다, 천하의 홍리세 배우님께서 그런 성격이시라니.”
남궁찬이 팔짱을 끼며 내뱉은 말에 엠케이가 답답하다는 듯 인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와 속 터져, 진짜라니까. 야, 차인혁 얼른 말해 봐. 홍리세 배우님이 어땠는지.”
“오지랖이 태평양만 했지.”
“아니 그쪽이 아니고. 하아, 말을 말자.”
엠케이가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남궁찬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근데 너희 둘만 왔어? 한재이는?”
“어, 촬영 끝나면 거기서 바로 회사로 간대서.”
“회사는 왜?”
“재재님 촬영.”
인혁의 대꾸에 남궁찬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근데, 그 꼴 그대로 촬영가도 괜찮은 거야? 애들 놀라서 우는 거 아니야?”
엠케이의 말에 인혁과 남궁찬이 재이의 화려한 빨간 머리와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스를 떠올리곤 뒤늦게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