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주태온과 철가방즈
XX 동 레이크 공원 야외공연장
[불망동 탐정 사무소] 시청률 20% 돌파 기념 깜짝 콘서트가 시작되기 20분 전.
콘서트가 열릴 야외공연장은 공원에 들렀다가 유명 연예인들의 갑작스러운 콘서트 소식에 발걸음을 멈춘 시민들, 몇 시간 전 제작진이 띄운 기습 공지로 소식을 듣고 달려온 팬들로 이미 북적이기 시작했다. 공연장 뒤편에 설치된 간이 천막에서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확인하고, 콘서트 진행 순서를 점검하기 위해 출연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허밍과 함께 가볍게 입 주변 근육을 풀고 있던 홍리세가 문득 말했다.
“와, 나 완전 떨려, 어떡하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신데요.”
옆에서 스트레칭 중이던 재이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래도 이 바닥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얼굴에 티 나면 되겠니. 근데 이것 좀 봐.”
홍리세가 대답과 함께 양손을 재이 쪽으로 내밀어 보였다. 과연.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두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배님 무대 타입이실 줄 알았는데.”
“무대 타입 맞아. 저렇게 엄살 피워 놓고 나중에 막상 무대 올라가면 아마 다 씹어 먹을걸.”
차상혁이 끼어들었다.
“같은 말을 해도 어쩜 저렇게 품위 없게 한다니. 쟤네 팬분들이 쟤 저러는 걸 보셔야 하는 건데.”
홍리세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투덜대는 말에 차상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내 팬들이야 내 덕질 하루 이틀 하신 분들도 아니고. 이미 다들 알고 계시지.”
“진짜야? 네 성격이 이렇게 개차반인 걸 아신다고 다들?”
“개차반이라니 누나…. 점잖은 표현으로 ‘카리스마 있다’, ‘반전매력’ 뭐 이런 말들이 있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참 뻔뻔하기 이를 데 없어.”
홍리세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섰다. 벽을 마주 본 채 눈을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가사라도 다시 외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이는 그런 홍리세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선배님, 저희 멤버들 중에 심은규라고 긴장 엄청 잘 하는 녀석이 있는데요.”
“은규가? 은규 긴장 잘해?”
홍리세가 흥미롭다는 듯 재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은규 이름도 아시고, 자칭 포션이라시더니 진짜였나 봐.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네, 걔가 저희 멤버들 중에 긴장왕이거든요. 무대 있는 날엔 꼭 청심환 챙겨 먹을 정도예요.”
“신기하네. 너희 무대 보면 은규는 항상 되게 침착해 보이던데.”
“그쵸. 근데 걔가 사실 청심환 먹고도 손을 이렇게 떨 정도로 긴장하는 녀석인데.”
재이는 제 손을 들어 덜덜 흔들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무대 올라가기 전에 이걸 하고 가면 좀 낫거든요. 어떻게. 시험 한번 해 보실래요?”
아, 참고로 뭐 이상한 약 같은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재이가 웃으며 덧붙인 말에 홍리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뭔데?”
차상혁을 비롯해 오늘 무대에 오르는 다른 조연급 배우들의 이목까지 저에게 집중된 것을 깨달은 재이가 싱긋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묵찌빠요.”
.
.
.
“묵! 으앗차, 이겼다! 차상혁 약속한 대로 내일 촬영장에 커피 쏘기! 우리들 말고 스태프 몫까지 다야!?”
“하, 내가 왜 이걸 하겠다고 해서. 한재이 너 진짜 이렇게 멕이기냐.”
차상혁이 한쪽에서 자신들의 묵찌빠 배틀을 관전 중이던 재이를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형제 둘이 나란히 가위바위보 존못이라니 신기하네. 대체 얼마나 진한 거야, 차씨네 유전자. 저 정도면 상혁이 형이나 차인혁이나 막상막하겠는데?’
분명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홍리세를 상대로 연전연패 중인 차상혁을 보면서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상혁이 재이를 구박하는 것을 본 홍리세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먼 애는 왜 잡고 그래? 네 실력이 형편없어서 지는 걸 가지고. 왜, 막상 한턱 쏘려니까 돈이 아까운 거야 설마?”
슈스의 품격 어디 갔니.
홍리세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에 차상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쏘면 되잖아, 쏘면. 좋아요. 다음 촬영 때 제가 커피 쏩니다.”
“오오오- 역시 차상혁!”
“멋지다!!”
“더 해라!”
두 사람의 배틀을 흥미진진하게 관전 중이던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 불탐정 팀, 스탠바이 해 주세요.
마침 타이밍 좋게 들려온 진행 요원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신기하네. 진짜 좀 덜한 것 같아.”
이런 신통방통한 방법을 인제야 알게 되다니.
무대 아래에 선 홍리세가 어느새 진정된 제 손을 들여다보며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라마 [불망동 탐정 사무소]의 출연진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불탐정 식구들, 나와주세요!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객석에 모인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들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홍리세와 차상혁, 재이를 비롯한 주·조연급 배우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 * *
“소장님과 여선욱의 화끈한 무대 어떠셨나요? 홍리세 배우 오늘 이 무대를 위해 촬영 스케줄 틈틈이 차상혁 배우와 댄스 레슨까지 따로 받았다고 하는데요. 역시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 같네요. 여러분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와아아—”
“상혁 오빠 사랑해요!!”
“세상 커플 포에버!!”
주변에서 터지는 환호성에 객석에 앉아 있던 아이 엄마 김수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옆을 내려다보니 여섯 살배기 아들 녀석이 갑자기 주변에서 터지는 큰 소리가 거슬리는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쩍 따뜻해진 날씨에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야외 무대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공짜로 콘서트를 한다는 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 화근이었다. 운 좋게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은 좋았는데 덕분에 중간에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빽빽하게 들어찬 객석을 돌아본 김수현이 짧게 한숨을 쉬곤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만 참자, 이제 곧 끝날 거야.”
진짜 이제 슬슬 끝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타이르자 아이가 울상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부모가 돼서 연예인 구경에 혹한 나머지 괜히 애만 고생시킨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애에게 정신이 팔려서였는지 홍리세고 차상혁이고 TV에서 보는 거랑 똑같이 예쁘고 잘생겼다는 것 말곤 딱히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얼른 끝나서 사람들이 좀 빠지면 집에 가서 아이랑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자 그럼 다음 순서는…….”
뭐야, 끝난 거 아니었어? 주연 배우 무대 끝났으면 끝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상식적으로.
김수현이 내심 투덜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불탐정의 히든카드! 겉은 무서워도 속은 부드러운 겉바속촉 주태온의 무대를 보시겠습니다!”
주태온이 누군데. 누군진 몰라도 빨리하고 내려가라 집에 좀 가자.
육아에 시달리면서 보는 거라곤 애가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이 전부인 입장에서는 홍리세 차상혁 정도가 인내력의 한계였다. 주태온이 누군진 몰라도 아기상어 뚜루룹 정도 불러 줄 거 아니면 미안하지만, 얼른 하고 내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들어 봐 들어 봐 나를 봐 나를 봐
지켜봐 지켜봐 Three two one Go
내 이름은 주태온 간지 작렬 배달원
고층건물 판자촌 어디든지 달려가
여기요도 아니고 저기요도 아니고
배달의 민심 김 집사도 아니고 (아니고)
1588 태온태온 1588 때옹때옹
신속 배달 쾌속 정확 배달할 땐 주태온
‘아니 무슨 랩이 저래. 선거유세 방송도 아니고.’
김수현이 혀를 차며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들 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재재님?”
응? 재재님이 왜 저기서 나와?
갑자기 튀어나온 아들 녀석의 최애 유튜버 이름에 김수현은 그제야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무대 위에서는 아들의 말대로 붉은 머리의 재재님이 비트에 맞춰 랩을 쏟아 내고 있었다.
본업은 배달원 부업은 스파이
겉보기엔 싸움꾼 but 상처 받은 길냥이
“엄마”
“어, 아들.”
“재재님이 말한 비밀 임무가 저거야?”
“어? 아…….”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무대 위의 재재님이 들고 있는 번쩍거리는 것을 가리켰다. 백댄서 두 명과 함께 솜씨 좋게 철가방을 들고 춤을 추던 재재님이 바닥에 놓은 철가방을 짚고 한 바퀴 크게 공중회전했다. 재재님의 움직임에 맞춰 양쪽에서 동시에 에어체어 프리즈를 하는 백댄서들의 움직임이 서로 타이밍을 잰 듯 칼같이 들어맞았다.
“와… 멋있다!”
아이가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김수현이 말릴 새도 없이 객석 위로 올라가 선 채 넋 놓고 무대를 바라보던 아이가 이내 랩에 맞춰 무릎을 들썩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계단식 객석이긴 해도 혹시라도 뒷좌석의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아이의 어깨를 잡아 내리려던 김수현은 괜찮으니 그냥 두시라며 웃는 뒷좌석 사람들의 만류에 어색하게 꾸벅 인사하곤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I say 주 You Say 태온
주 (태온) 주 (태온)
I say 외상값 You say 주세요
외상값 (주세요) 외상값 (주세요)
“대체.”
김수현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과 객석을 향해 마이크를 번갈아 가져다 대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있는 재재님의 리드에 덩달아 신이 난 아들 녀석까지 외상값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주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딱히 가사에 알맹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찰진 리듬에 김수현은 어느샌가 손뼉을 치며 아들과 함께 주태온을 연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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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컷연예] [불탐정] 20% 시청률 공약 깜짝 콘서트 - 세상 커플의 꿀 떨어지는 무대 “베스트커플상은 우리 것”
[데일리 엔터] 짜장면 주문은 1588-태온태온, [불망동 탐정 사무소] 열광의 깜짝 콘서트
[뉴스엔터] 한가한 휴일 저녁 공원에 울려 퍼진 “외상값 주세요!” [불망동 탐정 사무소] 깜짝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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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주태온한테 진 기분인데.”
“그러게. 이러려고 콘서트하자고 한 게 아니었는데.”
“차상혁 드디어 지는 해 인정인가.”
“누님 그건 좀 너무 가셨고.”
촬영 준비에 한창인 세트장에서 간이 의자에 앉아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홍리세와 차상혁이 나란히 투덜거렸다. [불탐정] 팀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깜짝 콘서트는 예상보다 큰 호평을 받으며 드라마 후반의 화제성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예상 밖의 일이 있었다면 화제 몰이를 해 줄 것이라 믿었던 홍리세, 차상혁, 일명 세상 커플의 듀엣곡을 제치고 엉뚱한 녀석이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을 독식했다는 것이었지만.
“거기서 야무지게 제 멤버들까지 데리고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하여간에 잔머리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차상혁의 중얼거림에 홍리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 입대를 앞두고 한참 마지막 인기몰이 중인 차상혁에 편승해 이번에야말로 음반 제의 좀 받아 보나 했더니 어린 녀석이 홀랑 화제성을 먹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래도 그 욕심은 버려야 할 듯싶었다. 홍리세의 눈이 인터넷 게시판의 글에 가 멎었다.
[PART.Y 유닛 활동 시작한 듯 <주태온과 철가방즈.gif>]
불탐정 깜짝 콘서트 다녀온 포션 손 들어 봐 ㅋㅋㅋ 우리 재재님 아니 태온이 무대 진짜 ㅋㅋㅋ 1588-주태온 뭐냐고 ㅋㅋㅋ 진짜 짜장면 주문할 때 저걸로 걸 것 같잖아 책임졐ㅋㅋ게다가 엠케이랑 남궁찬 데리고 나온 거 넘ㅋㅋ 멤버 사랑은 나라 사랑이지 암요.
└ 앜ㅋㅋ 이거 전곡 다 가지고 있는 포션 없냐? 나 포션 왜 콘서트 안 갔니 ㅠㅠㅠ
└ 너=나 ㅜㅜ 혐생 주거라ㅜㅜ 나도 듣고 싶다 1588-때옹때옹
└ 불탐정 제작진 듣고 있냐 빨리 엔딩곡 작업해 (찰싹) 어서 (찰싹)
└ 하는 김에 뮤비도 찍자 쩔어 주는 백댄서 데려와서 작업해라
└ 그래서 음원 공개 언제라고요? 뮤비 언제 나와요??
“아이씨 부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상혁 말고 재이한테 얹혀 갈걸.”
“누나 걔네 춤춘 거 보고도 그런 소릴? 리그가 달라요, 리그가.”
차상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타박하는 말에 홍리세가 발끈하며 말했다.
“아 왜 나도 랩 하면 되지. 외상값 주세요. 1588-때옹때옹.”
“아깝네. 태온이 크랭크 아웃 하기 전에 얘기해 보시지.”
차상혁이 안타깝다는 듯 건넨 말에 재이가 이미 크랭크 아웃 한 것을 떠올린 홍리세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두리번거렸다.
“피디님 어디 계시니? 태온이 나오는 컷 하나만 다시 찍자고 하자, 응?”
“아서요. 걔 요새 잘 나가서 스케줄 잡기 힘들걸. 오늘 아마 광고 촬영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뭔데, 왜 그렇게 잘 나가는데?”
“걔 그거잖아. 뽀통령 위에 재재님.”
차상혁의 말에 홍리세가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재이 알짜배기였네. 친하게 지내야겠다.”
“줄 서요. 줄.”
“너는 군대나 가세요.”
차상혁의 말에 홍리세가 들고 있던 대본을 말아 쥐고는 차상혁의 긴 다리를 툭툭 치며 투덜거렸다.
* * *
“야, 이거 정말 괜찮은 걸까.”
은규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멤버들에게 속닥였다. 오랜만에 여섯 명이 모두 모인 파티는 촬영 준비가 한창인 스튜디오 입구에 서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완성된 블럭 사의 지역 한정 에디션 광고를 찍기로 한 날. 미리 광고 촬영에 필요한 콘티를 본 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스케일에 광고 촬영이 처음인 멤버들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재밌겠는데?”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재이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