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아메리카 레이드 파티 [6/6] (2)
“와, 우리 여행 안 가고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크리스의 차가 서서히 멈춰 서며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본 남궁찬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안가에 있는 크리스의 집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저택이었다.
“*어때, 근사하지? 우리 부모님 은퇴 후 목표가 홈스테이였거든. 요새 같으면 에어비앰비 같은 게 돈이야 더 되겠지만 보시다시피 돈이 부족한 집안은 아니라. 부모님이 원하시는 건 너희처럼 외국에서 온 젊은 친구들과의 교류거든. 집주인인 부모님이 결정하신 건데 군식구인 나야 뭐 그냥 ‘네, 네’ 하고 따라가야지, 안 그래? 그래도 너희들이 우리 집에 묵게 된 건 내가 모집 공고 보고 지원한 덕이라고. 후훗”
크리스가 설명과 함께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 웃었다.
“뭐래?”
재이의 뒤편에서 크리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환이 그를 툭 치며 물었다.
“자기네 집에선 부모님이 갑이래.”
“풉.”
장황한 크리스의 설명에서 핵심만 짚은 재이의 한 줄 요약에 옆에 서 있던 엠케이가 참지 못하고 작게 내뿜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우리 언제 들어가?”
자신의 물음에 나한테 말 걸지 말아 달라는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하는 셋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재이를 쳐다보는 두 멤버를 둘러보는 크리스에게 재이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아, 미안미안. 어서 들어가자.”
재이의 말에 크리스가 그제야 생각난 듯 멤버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집으로 들어온 멤버들은 크리스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손님방이 있다는 2층에 짐을 풀고 각자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해외여행도 장시간의 비행기 탑승도 처음이었던 국내파 3인방, 남궁찬, 이환, 은규는 정원에서 캘리포니아의 햇볕을 쬐며 몰려드는 잠과 싸우고 있었다.
“야, 한재이 쟤는 왜 멀쩡해? 쟤도 해외여행은 그때 그 생법 다녀온 거 말고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늘어져 있던 세 명 중 남궁찬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그의 옆자리 선베드에 몸을 기댄 채 가물거리는 의식을 애써 붙잡고 있던 은규가 말했다.
“차인혁 말이 그때도 그랬대. 거기야말로 여기보다 더 멀었는데도 비행기 갈아타고 잠깐 눈 붙이고 배 타고 섬까지 들어가는 거에 다들 넉다운인 와중에 혼자 쌩쌩했다고.”
“그거 아니냐. 시차 놈도 한재이는 더럽고 무서워서 피해 가는 거.”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이환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린 말에 남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이환이 맞는 말을 다 하네.”
“그러게.”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돌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른 숨을 내쉬며 곯아떨어진 세 사람 너머로 어느샌가 래쉬가드로 갈아입은 재이와 인혁, 엠케이가 옥외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빙자한 PVP전을 벌이고 있었다.
“야, 한재이 지금 건 치사… 으억!”
첨벙
조금 전 재이가 던진 공에 뒤통수를 맞은 엠케이가 항의하려 돌아섰다가 인혁이 던진 공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아 미안 미안, 피할 수 있을 줄 알았… 어억.”
풍덩
당연히 엠케이가 피할 줄 알고 있었던 인혁은 얼굴을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져 물까지 먹는 바람에 허우적대느라 만신창이가 된 엠케이에게 다가가려다 뒤에서 날아온 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으아, 미안 미안. 피할 줄 알았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이가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얄밉게 웃고 있었다. 안에 든 거라곤 공기밖에 없는 비치볼이 분명한데 무슨 농구공에라도 맞은 것 같이 머리가 띵한 것에 인혁이 인상을 콱 찌푸리고 이를 갈았다.
“다치면 어쩌려고.”
“거울 좀 보고 얘기해라. 네가 비치볼 맞고 다칠 만한 체격이냐고. 저 엠케이면 모를까.”
재이의 말에 인혁이 움찔했다. 확실히, 타격은 있었지만, 뒤로 나가떨어진 엠케이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확실하게 감정을 실어 나르지 않아도 되잖아, 어? 카메라 돌아가는 거 안 보이냐.
인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세게 던졌잖아!”
“그러니까 실수였다니까, 실수. 차 리더의 운동 신경이 그걸 못 피할 줄 알았겠냐고 내가……!”
첨벙-
인혁과 옥신각신하고 있던 재이는 시야 한쪽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그대로 수면 아래로 몸을 웅크려 숨어 버렸다.
“이야아압!!!”
퍼억
“어억-”
“으아아, 차인혁 미안! 한재이한테 던진 건데 왜 네가 맞아! 나 절대로 복수하려고 그런 거 아니라고 어? 어?”
한쪽에서 기척을 숨긴 채 한재이에게 회심의 일격을 먹이려고 비치볼을 조준, 발사했던 엠케이는 자신의 공이 목표물이 아닌 엉뚱한 사람을 맞힌 것에 당황해서 외쳤다. 정통으로 얼굴에 들어간 일격에 차인혁이 이마를 감싸 쥔 채 멈춰 서 있었다.
“야야아, 괜찮아? 지금거 꽤 세게 던졌는… 푸크하압.”
인혁을 향해 걱정스럽게 묻던 엠케이는 물 밑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다리를 쑥 잡아당기는 통에 속절없이 수면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푸허어”
“어떠냐. 이 정도는 돼야 기습이지.”
엠케이와 인혁의 사이에서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재이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런 재이를 쳐다본 엠케이와 인혁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한재이 복수다아아—!”
“받아라아아—!!”
두 녀석이 동시에 재이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놔, 놔, 으아, 어푸흐흐.”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재이는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협공에 물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투닥거리는 세 사람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크리스가 스태프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원래 케이팝 아이돌은 평소에도 저렇게 파이팅이 넘칩니까? 아니면 지금도 촬영 중이라 그런 건가요?”
그의 질문에 활동적인 세 사람과 어느샌가 이미 숙면모드에 들어간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스태프가 대답했다.
“*케이팝 아이돌이 열심인 것도 맞고 지금이 촬영 중이라 그런 것도 맞지만. 기본적으로 PART.Y가 좀.”
“*좀 뭐요?”
잠시 표현할 단어를 고르는 듯 말을 멈춘 스태프에게 크리스가 재촉하듯 물었다.
“*PART.Y 멤버들이 좀 많이 활동적이긴 해요. 촬영하면 사운드가 안 비는 팀이라는 평이거든요. 리액션 좋아서 예능 피디들이 많이 눈여겨들 보고 있죠.”
“*아… 그러니까, 시끄러운 게 팀컬러구나.”
제 식으로 이해하고 중얼거린 크리스의 목소리는 정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람과 두 마리의 소음에 묻혀 스태프에게까지 닿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졌다.
“*나 왔어-, 어어어, 야야!”
두 마리의 애완견을 데리고 오후 산책을 다녀오던 크리스의 아버지는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리드를 끌어당기며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낑낑대는 골든 레트리버 두 마리에게 이끌려 뛰듯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수영장에서 한참 나 빼고 다 적인 난투를 벌이고 있던 세 사람까지 하던 걸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으음… 커헉!”
수영장에서의 소음을 자장가 삼아 선베드에 누운 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단잠에 빠져 있던 남궁찬은 갑작스럽게 명치에 내려앉는 묵직한 무게에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왕와앙--왕왕! 왕!
“커허흑…….”
남궁찬은 귓가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뭔가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제 얼굴을 쓸어 올리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잃어버렸던 진짜 주인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며 헥헥대고 있던 대형견 두 마리가 또다시 남궁찬의 양 뺨을 핥아 댔다.
“허헉…….”
“*샐리, 낸시. 이리 내려와. 손님 놀라셨잖아.”
뒤늦게 달려온 크리스의 아버지가 두 강아지의 리드를 잡아 끌어 내리자 두 마리가 못내 아쉬운 듯 남궁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와, 남궁찬 동물 자석 장난 아니네.”
“그러게. 저게 여기서도 통하네.”
“남궁찬 쟤 우리가 모르는 무슨 냄새라도 풍기는 거 아니야? 동물들이 어떻게 저렇게 쟤만 좋아하지?”
“잰 진짜 진로 선택 잘못한 거 아니냐.”
“정말이지 저건 연구가 필요하다.”
갑자기 벌어진 난리 통에 수영장에서 놀던 녀석들이 남궁찬에게로 모여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이환과 은규까지 깨어나 마른하늘에 골든 레트리버 벼락을 맞고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남궁찬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남궁찬이 겨우 물은 말에 두 마리를 겨우 정원 반대편 쪽에 격리하고 돌아온 크리스의 아버지가 사과하며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 원랜 엄청 순한 녀석들인데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진짜 미안. 다치진 않았니?”
강아지 두 마리의 갑작스럽고도 격렬한 포옹에 튕겨 나갔던 넋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모양인지 여전히 얼빠진 표정의 남궁찬에게 재이가 말을 건넸다.
“원랜 엄청 순한 녀석들인데 너한테 한눈에 반했는지 흥분했던 모양이래. 미안하다고 다치지 않았냐고 하시는데, 괜찮냐, 남궁찬?”
“어? 어어… 어.”
남궁찬의 넋 나간 대답을 듣고 있던 옆에서 이환이 은규에게 속삭였다.
“솔직히 아까 아저씨가 한 말 나 하나도 못 알아들었는데, 왜 한재이가 말하니까 진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처럼 들리지?”
“진짜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설마 그럼 한재이는 ‘한눈에 반했는지 흥분했던 모양’이란 걸 영어로 듣자마자 해석이 가능했단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뭐야 기만자, 역시 영어존잘이었잖아.”
이환이 배신당했다는 듯 얼굴을 팍 찡그렸다. 환심이의 주거니 받거니를 옆에서 듣고 있던 인혁은 핵심 빼고 모두 의역이었던 재이의 통역을 떠올리며 두 사람의 오해를 풀어 줘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아무리 눈치껏 때려 맞춘다고 해도 저렇게 번번이 대화의 핵심을 짚는다면 저건 기만이 맞았다.
‘영어 못한다더니 개뿔. 또 속았잖아.’
인혁은 크리스의 아버지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재이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거실 소파에 모여 앉아 있는 멤버들 중 인혁이 슬레이트를 치는 것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어제 오후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고 배불리 먹고 잠까지 푹 잔 재이, 인혁, 엠케이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며 숙소를 배회하던 나머지 셋은 여전히 잠이 묻어나는 얼굴로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제작진에게서 미리 미션 봉투를 받아 들고 있던 크리스가 다가와 인혁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따라란~ 미션 봉투 등장!”
‘미션’이라는 말에 쿠션 대신 두 마리의 골든 레트리버 낸시와 샐리에게 반쯤 파묻혀 있던 남궁찬이 말했다.
“좋아! 어서 열어 보자!”
“의욕 넘치는데 남궁찬? 언제는 여행 같은 거 가지 말고 일정 내내 여기 있자더니?”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으면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미국의 매력을 발견해야지. 그것이 바로 레이드의 참뜻 아니겠냐고.”
남궁찬의 한쪽 허벅지에 고개를 얹고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던 낸시가 인간 쿠션이 들썩거리자 불편하다는 듯 푸. 하고 한숨 섞인 콧김을 내뱉으며 턱을 고쳐 괴었다. 반대편 다리를 차지하고 있던 샐리도 움직이지 말라는 듯 앞발로 남궁찬의 허벅지를 가볍게 긁어 대더니 다시 바싹 붙어 앉았다. 두 마리 사이에 끼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남궁찬을 잠시 바라본 인혁이 크리스에게 건네받은 봉투를 들고 구성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남궁찬을 저 행복한 지옥에서 구해 주기 위해서라도 첫 미션이 뭔지 확인해 볼까?”
“그래. 혹시 아냐, 미션 성공하면 남궁찬 소원대로 여기서 일정 내내 머물게 해 줄지.”
“야 제발 불길한 소리 좀 그만해.”
재이가 덧붙인 말에 해쓱해진 남궁찬이 비명처럼 외치자 주변에 앉아 있던 멤버들이 하나둘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는 좋다더니.”
“사람 마음이란 저렇게나 간사한 거지.”
“저렇게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참 나. 진짜 가진 자가 더 하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멤버들이 쑥덕이는 것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가 재이에게 말을 걸었다.
“*재밌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내가 한국어 공부를 해야 할 듯?”
“*크래쉬캣 선배님들이 좋아하시겠네.”
그러자 재이 옆에 앉아 있던 엠케이가 끼어들었다.
“*이것부터 외워 봐. ‘어차피 흑막은 한재이’.”
“*어… 뭐?”
“엠케이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혼란스러워하잖아.”
“아 왜. 우리하고 친해지려면 꼭 알아야 하는 말인데.”
어느샌가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여 시끌시끌한 가운데 인혁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열어 본다?”
인혁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봉투를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인혁이 펼친 종이에 적힌 미션 내용으로 향했다.
<첫 번째 미션: 여행의 길잡이를 찾아라>
여러분의 레이드를 도울 최고의 길잡이를 찾을 기회! 키워드를 수집해서 길잡이를 찾아내고 미션을 클리어 하세요. 키워드는 아래 장소에 숨겨져 있습니다. 제한시간: 9시간
“…파머스 마켓, 베니스 비치, 디즈니랜드……. 여길 9시간 안에 어떻게 다 돌아?”
어느새 인혁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종이 안에 적힌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던 멤버들 중 이환이 중얼거렸다.
“나눠야지.”
“어떻게?”
인혁의 간결한 대답에 은규가 물었다.
“간만에 사다리 한 번 탈까?”
재이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 *
“뭘까, 이 복잡한 기분.”
“왜.”
재이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던 것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안 불안하면서도 불안해.”
“뭐라는 거야.”
“너랑 같은 팀이라니 든든하긴 한데, 뭔가 터질 것 같은 그런 느낌.”
“심은규 하여간에 불길한 소리 하는 데 뭐 있다니까.”
재이는 은규의 팔자 눈썹을 힐끗 쳐다보고는 한숨과 함께 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야, 이런 데서 터질 게 뭐가 있겠냐고.”
재이의 등 뒤로는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결 고운 모래사장을 따라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변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가…….”
“일단 지도에 표시된 여기가 어딘지부터 찾아보자. 주소가…….”
“*어어어? 거기 비켜!!!”
갑자기 들려온 다급한 외침에 은규와 재이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