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아메리카 레이드 파티 [6/6] (3)
“*어어어? 거기 비켜!!!”
갑자기 들려온 다급한 외침에 은규와 재이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던 청년이 뒤늦게 자신들을 발견한 듯 방향을 바꿀 타이밍을 놓친 채 그대로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우당탕—
‘심은규 입을 꿰매든지 해야지 안 되겠어.’
말이 씨가 됐잖아.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재빨리 몸을 틀어 바깥쪽으로 피한 덕에 자신과 은규는 다행히 참사를 면했지만 촬영 중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VJ는 그대로 그와 뒤엉켜 넘어졌다.
“감독님 괜찮으세요?”
“아이고 아야……. 카메라, 카메라 괜찮나?”
재이의 물음에 바닥에 넘어졌던 VJ가 한쪽에 던져진 카메라부터 찾았다.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앵글 바깥으로 물러나 있던 PD가 급하게 뛰어와 VJ를 부축하며 그와 함께 카메라를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도 카메라도 무사한 모양이었다.
“*으아아, 망했다.”
VJ와 부딪쳐 바닥에 나뒹굴었던 청년이 시간을 확인하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등에 멘 것이 기타 가방임을 확인한 재이가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아?”
“*아, 고마워.”
재이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년이 인사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미안. 죄송합니다. 장비에 문제 있는 거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 보시다시피 그거 물어드릴 여력이 없거든요. 하하.”
청년이 예의 바르게 VJ와 재이를 돌아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딘지 엠케이를 연상케 하는 동글동글하게 생긴 외모에 친근한 말투까지.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타입은 아닌가 보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제작진 쪽을 살피니 PD와 VJ는 이미 넘어갔는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던 중이야?”
재이의 물음에 청년이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보시다시피. 버스킹 하러 가는 길이었어.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마음이 급했거든. 근데 뭐. 지금쯤이면 나 빼고 시작했겠네. 아마도.”
기다려 달라고는 했지만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 어쩔 수 없지 뭐, 하하.
허탈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청년을 보고 있던 재이가 PD를 돌아보았다.
“피디님, 저희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가도 돼요?”
“야 한재이, 갑자기 들리긴 어딜 들러?”
은규가 옆에서 재이를 말렸다. 놀러 온 것도 아닌데, 빨리 키워드 찾아서 다른 멤버들 거랑 맞춰 봐야 길잡이 찾을 거 아니냐고. 은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와 마찬가지로 태평한 표정의 재이가 이어 말했다.
“저쪽이 와서 부딪친 거긴 해도, 저희랑 엮인 일 때문에 팀에서 쫓겨나게 생겼다잖아요. 무슨 공연인지만이라도 확인하고 가면 안 될까요. 버스킹이라니 구경하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뭐… 나쁘진 않은데…….”
PD가 솔깃했는지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청년, 꽤 괜찮아 보이는 것이 촬영 중에 일어났던 사고로 치고 커트해 버리긴 좀 아깝긴 했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 PD가 결정을 내린 듯 재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재이가 청년을 돌아보며 물었다.
“*TV에 나와 보고 싶은 생각 없어?”
“헐.”
재이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은규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뜬금없는 재이의 말에 청년 또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재이 전생에 약장수였나 봐.
은규는 청년을 향해 슬슬 약을 치기 시작하는 재이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크리스 맥그레이.
자신을 크리스라고 소개한 청년이 재이, 은규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완전 놀랐잖아. 촬영팀이 따라다니는 걸 보니 일반인들은 아니겠구나 싶긴 했는데 케이팝 가수였다니. 이래 봬도 나 크래쉬캣 노래 좋아한다고.”
신기해라, 이 동네 크리스들은 크래쉬캣 선배님들이 꽉 잡고 계시나 봐.
보란 듯이 크래쉬캣의 대표곡을 흥얼거리며 가볍게 춤까지 춰 보이는 크리스를 쳐다보며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익숙해진 분위기에 조금 용기를 얻은 은규가 입을 열었다.
“*크래쉬캣, 같은 회사야. 우리랑.”
“*오오오! 정말이야!? 멋진데? 에이미의 실제 모습은 어때?”
최애멤버까지 똑같다니. 공통점이라곤 이름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취향도 똑같잖아. 재이와 은규는 눈앞의 이 잘생긴 크리스와는 달리 커다란 덩치에 수염까지 길러 덥수룩한 홈스테이 크리스를 떠올리고는 서로를 마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잘생긴 크리스가 멋쩍은 듯 웃으며 덧붙였다.
“*아,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 뮤지션 지망생이거든. 곡도 쓰고 노래도 하고, 가끔은 춤도 추고 버스킹도 해. 너희도 나랑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이미 데뷔해서 프로라니.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걸그룹과 같은 회사에서 왔다니까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말이야.”
갑자기 난 여태껏 뭐 했나 싶고 그렇네. 하하.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씁쓸하게 웃고는 시무룩해하는 크리스를 본 재이와 은규가 서로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운 내.”
“*에이미 ‘선배님’이 지금 네 말 들으셨으면 엄청 혼내셨을걸.”
재이와 은규가 동시에 말했다. 축 처져 있던 크리스가 에이미라는 말에 반응하고 고개를 번쩍 들어 재이와 은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배님은 약한 소리 싫어하시거든. 에이미 선배님 좌우명 ‘프로는 결과로 말한다.’”
“*’프로는 결과로 말한다.’라……. 듣기에 따라서는 되게 냉정하고 독선적으로 들리는 말인데?”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하지.”
재이의 간결한 대답에 크리스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귓가에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기야?”
“*어? 으응.”
어딘지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를 힐끔 쳐다본 재이와 은규가 음악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던 행인 몇몇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보컬의 노래와 키보드, 기타의 연주에 맞춰 댄서 두 명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팀이면 꽤 탄탄한… 까지 생각하던 재이는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아마추어 버스킹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제각각일 수가.’
“다 따로 놀잖아.”
은규가 재이의 생각을 읽은 듯 중얼거렸다.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팀이었는데 자세히 듣다 보니 키보드도 기타도, 보컬도, 심지어는 두 댄서들의 동작까지 모두 제 잘난 맛에 취해 서로 겉도는 느낌이었다. 노래의 소절 소절마다, 춤 동작 하나하나마다 ‘날 봐, 나만 봐’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격렬한 자기 어필에 재이와 은규는 동시에 똑같은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VJ가 기민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어때? 멋지지 않아? 키보드의 벤은 프로덕션에서 컨택도 받은 능력자야. 보컬의 조지는 재작년 ‘아메리카 갓 스타’ 지역 예선을 통과한 강자인 데다 댄서 두 명도 이 근방에서 유명한 춤꾼들이지. 우리 팀이 그래도 이쪽 지역에서는 꽤 알아준다고.”
“*어… 그래…….”
재이와 은규의 떨떠름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신이 난 얼굴로 팀 멤버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던 크리스가 자신을 대신해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새 대타를 구한 모양인데. 늦는다고 연락도 했다더니, 팀 분위기 칼 같은가 봐.”
은규가 재이에게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속삭였다. 동양인 소년 둘과 그들을 촬영하기 위한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 몇몇을 이끌고 나타난 자신들의 동료를 발견한 팀원들의 얼굴에 놀라움, 호기심, 그리고 질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들의 표정에 스친 감정들을 재빨리 읽어 낸 재이가 크리스에게 나직이 물었다.
“*사이, 별로인가 봐?”
“*재이 너 아픈 데를 찌르는 재주가 있구나?”
그렇지. 그게 바로 한재이의 정체성 같은 거란다.
은규는 정곡을 찌른 크리스에게 맞장구를 쳐 주고 싶었지만 짧은 영어 탓에 망설이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치곤 대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러 왔어? 네 포지션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어.”
“*그래, 우린 시간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녀석을 품고 갈 정도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어디서 뜨내기 촬영팀 하나 낚아 온 거로 우리한테 비비려고 했다면 큰 착각인데.”
곡이 끝나고 그들에게 다가간 크리스를 향해 팀원들이 냉랭하게 한마디씩 내뱉었다.
“*연락했잖아, 늦는다고.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났을 뿐이라고.”
“*어쨌건 기타 포지션은 이미 찼으니 딴 데 가서 알아봐.”
할 말은 그뿐이라는 듯 크리스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재이가 크리스를 잡아끌며 말했다.
“*더 안 봐도 되겠다. 가자.”
“*응? 어, 어딜?”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고. 너 어차피 잘린 것 같은데.”
재이의 말에 크리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은규가 그런 크리스를 다독이듯 말했다.
“*한재이 말이 맞아. 가자. 쟤네는 너 필요 없대.”
혹시라도 직설적인 재이의 말에 기분이 나빴을까 싶어 보탠 말에 크리스의 얼굴이 더더욱 울상이 되는 것을 본 은규가 허둥거리며 변명했다.
“*아, 미안, 미안, 내가 영어를 못해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왜 아주 완벽하게 말 잘했는데.”
재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한재이, 닥쳐.”
“야, 너 그거 카메라 앞에선 NG야. 근데 평소엔 얌전한 녀석이 영어로 말하면 막말이라니. 신선한데? 새로운 캐릭터로 어떠세요?”
당황한 와중에 짧은 영어로 쏟아 내느라 한층 더 여과 없이 직설적이 되어 버린 은규의 말에 재이가 VJ와 PD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작진들이 웃음을 참느라 대답도 못 하고 있는 것을 본 은규가 팔자 눈썹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그래그래, 알쥐 알쥐. 괜찮아, 괜찮아, 지금 딱 좋아.”
네 기준에나 딱이겠지. 내 기준에는 아웃이라고.
은규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재이가 웃으며 은규와 크리스 사이에서 두 사람의 축 처진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본때를 보여 주자.”
응? 우리 언제 시비 붙었어?
은규가 얼빠진 얼굴로 재이를 쳐다보자 재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잖아. 들어보니 얘가 늦는다고 연락을 안 한 것도 아니더만. 근데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으로 충원하고는 여기 네 자리 없으니까 잘 가라니, 그거 대놓고 싸움 거는 거잖아, 안 그래?”
“어… 그건 그렇지…….”
근데 그게 우리 싸움은 아니지 않…….
은규의 마음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재이가 이어 말했다.
“게다가. 우리보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멍멍이 뼈다귀인지 모를 듣보잡 촬영팀이라니.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그냥 가 버리면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이 울지 않겠냐. 안 그래?”
…어, 뭐라고?
은규가 얼빠진 표정으로 재이를 보았다.
“쟤가 아까 그랬다고. 우리보고. 촬영 카메라만 붙었다고 다 연예인인 줄 아느냐고. 너희 같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뜨내기보다 우리 팀 퍼포먼스가 훨씬 쩔어 준다고.”
재이가 크리스의 ‘예전’ 팀 멤버 중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은규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VJ와 PD를 비롯한 촬영팀을 쳐다보았다. PD가 웃음을 참느라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대답했다.
“음, 어 뭐. 딱히 듣기 좋은 말을 한 건 아닌 게 맞긴 해.”
PD가 계속해 보라는 듯 재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역시 한재이 쪽으로 붙길 잘했네. PD는 어디로 튈지 모를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재이 일행을 바라보았다. 재이가 여전히 풀 죽어 있는 크리스를 향해 물었다.
“*너 크래쉬캣 ‘선배님들’ 곡 기타로 가능해?”
“*어? 어어… 들어 본 곡이라면.”
좋아. 저 지들 잘난 맛에 노는 팀에서 합심해서 밀어낼 정도면 아주 가망 없는 녀석은 아닐 테고.
재이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는 은규를 돌아보고 물었다.
“심은규, 오랜만에 그거 한번 하지 않을래?”
“그거라니?”
고개를 갸웃하는 은규에게 재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스텝 업]에서 엠케이가 우겨서 다 같이 커버했던 곡 있잖아.”
“아? 아아아, 그거?”
“어때?”
데뷔 전, [스텝 업]의 첫 단체 곡 미션에서 걸그룹 커버를 하자고 우긴 엠케이 덕에 한 번 불렀던 크래쉬캣의 히트곡을 떠올린 은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렬한 후크로 유명한 곡으로 영미권에서도 케이팝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잘 알려진 곡이기도 했다.
“둘이 할 수 있을까?”
“노래는 너랑 크리스랑 하고 내가 랩 하면 되지.”
“와 한재이 랩 한 번 해 봤다고 자신감 쩌네?”
“원래 다 해 봐야 느는 거거든.”
“하아, 그 패기 진짜 닮고 싶다.”
“아무튼, 어때?”
“스케줄에 지장 있지 않을까?”
우리 놀러 온 거 아니잖아.
은규가 제작진 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은규의 시선을 읽은 PD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원래는 해변 거닐면서 맛집 탐방하고 버스킹 구경하는 그림 좀 따면서 미션 포인트 찾아가는 플롯이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다섯 명이 데뷔하기 전에 불렀던 곡을 두 명으로 심지어 현지인과 함께 커버하는 기습 버스킹이라니. 내가 시청자여도 이쪽을 볼 것 같은데.”
PD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재이가 은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려 맛집을 포기하고 하는 버스킹이라고.”
“왠지 한민족의 자긍심보다 이쪽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비장한 얼굴로 은규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크리스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일단 쟤가 얼마나 하는지 확인부터 하고. 엉망이면 그냥 원곡 틀어 놓고 셋 다 춤만 추자고.”
신중한 은규의 말에 재이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은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고 자신하는 스스로가 보기에 ‘괜찮을 듯’이라고 이미 촉이 온 건 사실이었지만, 은규의 말대로 미리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은규가 크리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기타, 한 번 쳐 봐.”
“…영어판 심은규 박력 쩌네.”
재이가 중얼거렸다. 여전히 좀 뻘쭘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박력 있는 은규의 말에 크리스가 대답 대신 등에 메고 있던 기타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촤아아-앙
그리고 예고도 없이 빠른 비트의 인트로가 시작되었다. 그 정확한 코드 진행에 은규가 고개를 휙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은규의 표정을 읽은 재이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거 봐.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 * *
“…한재이, 심은규. 일하라고 보내 놨더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인혁은 방금 막 들어온 소식이라며 제작진이 내민 영상을 확인하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영상에는 처음 보는 청년의 기타 반주에 맞춰 크래쉬캣의 히트곡 [Almighty Me] 를 부르는 재이와 은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국어로 부르고 있는 재이와 은규에 영어 버전으로 코러스를 넣고 있는 낯선 청년의 화음이 꽤 그럴듯해 주변은 그들을 구경하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얘네 우리 모르게 팀 옮겼냐?”
인혁의 옆에서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남궁찬이 중얼거렸다.
“저러라고 랩 봐 준 게 아닐 텐데.”
남궁찬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당시 인혁과 자신이 맡았던 랩 파트를 제 식으로 소화하고 있는 재이의 모습이 있었다. 두 사람 몫을 혼자 하느라 쉴 새 없이 쏟아 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재이 특유의 쨍한 보이스와 귀에 와서 꽂히는 듯 정확한 딕션 덕에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얘네 뭐 하는 거래요?”
인혁이 이 영상을 보여준 담당 PD에게 물었다.
“촬영하는데 트러블이 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버스킹까지 하게 됐다네. 뭐, 덕분에 분량은 문제없겠어.”
미션은 성공할지 모르겠지만.
불길한 말을 중얼거리는 PD의 말에 인혁과 남궁찬이 얼굴을 콱 찌푸렸다.
“심은규는 얘 안 말리고 뭐 한 거야?”
“사실 심은규에게 한재이가 벅차긴 하지.”
인혁의 투덜거림에 남궁찬이 조용히 의견을 보탰다. 두 사람 모두, 이 돌발 상황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이견도 없는 모양이었다. PD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일단 이동할까? 어차피 재이네 쪽에서 합류잖아.”
PD님께서 그러시자는데 뭐.
인혁과 남궁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왠지 느낌이 싸했다.
‘한재이 제발, 사고 좀 그만 쳐라.’
재이가 들었으면 내가 뭘 어쨌길래 그러냐며 얼굴을 찌푸렸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인혁은 남궁찬과 함께 재이와 은규가 기다리고 있을 베니스 비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