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플래티넘 수저와 황금 인맥
엠케이의 아버지는 엠케이와 닮은 듯 전혀 다른 인상의 중년이었다.
“그래. 너희들이구나.”
내 아들과 아이돌 놀이 하고 있는 녀석들이.
짤막하고 가시 돋친 인사말에 멤버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와, 기백이 장난 아니시네.’
재이 또한 속으로 감탄했다. 저쪽 동네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인간 군상을 봐 온 재이였지만 이런 기백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이쪽에서도 지금 회사의 문선일 대표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이런 거물이 엠케이의 아버지였다니. 의외였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이런 든든한 뒷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연습생을 거쳐 데뷔까지 한 걸 보면 저 동글동글하고 유순하게만 보이는 엠케이가 눈앞의 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내가 꿇릴 것도 없는데 뭐.’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이는 엠케이 아버지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되받아치는 재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버지의 짙은 눈썹이 꿈틀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실례. 그쪽 이름이 뭐였더라?”
“재이입니다. 한재이.”
“그래, 재이. 우리 아들이 신세 많이 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달리 눈빛은 왜 그렇게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시나요.
재이는 내심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전혀요. 오히려 엠케이 없으면 팀이 안 굴러가죠. 엠케이가 성격도 둥글고 상황 판단도 빨라서 회사 직원분들은 물론이고 현장 스태프들한테도 인기 좋아요.”
설마 저 한재이가 자신을 칭찬하는 것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엠케이가 아예 입을 반쯤 벌린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의 표정 또한 별다를 바 없었다. 멤버들 모두가 ‘저게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쯧. 저렇게 상황 판단들이 느려서야, 어디 먹고 살겠냐고.’
딱 봐도 각이 나오는구만. 문 열어주기 전에 기 싸움 한판 하자는 거잖아.
재이는 어리둥절해 보이는 멤버들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눈앞의 상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애가 성격이 좋긴 하지. 날 닮았거든.”
전혀 안 그런 것 같지만 어쨌건 마지막 말이 핵심이네. 재이가 내심 미소 지었다.
“사실 오늘 들어오면서 엄청 놀랐어요. 엠케이가 이런 데 살고 있을지 전혀 몰랐거든요. 연습생으로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데뷔하고 지금 같이 숙소 살면서도 한 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아서.”
이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눈치 백 단인 재이조차도 엠케이가 이렇게 돈 많은 집안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평소의 엠케이는 보통 그 자체였다. 그 현실 감각과 적응력이라니. 이건 재이로서도 놀라운 부분이었다.
“저 녀석이 고집 하나는 타고나서. 그놈의 아이돌인지 뭔지 하겠다고 한국으로 날아간 뒤로는 자기가 연락하기 전까진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 건방지게 말이야.”
건방지다면서 왜 웃으세요.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엠케이를 슬쩍 흘겨본 엠케이의 아버지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는 것을 보고 재이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역시 그거였다.
‘아들 바보.’
엠케이, 너. 사랑받고 자랐구나.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훌륭한 집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걸 마다하고 저희랑 똑같이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하니까 솔직히 존경스러운데요.”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친구네.”
“사실이니까요.”
태연한 재이의 대꾸에 엠케이의 아버지가 재미있다는 재이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청 잘하고 있거든요. 멤버들도 성격들이 좀 특이해서 그렇지 다들 괜찮은 녀석들이라 서로 사이도 나쁘지 않고요. 저희 데뷔앨범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아마 점점 더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대뜸 내뱉은 재이의 말에 엠케이를 비롯한 주변에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이게 정말 입만 열면 독설에 비즈니스와 각자도생을 입버릇처럼 외치던 한재이가 맞는 건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들이었다. 그런 멤버들의 시선들을 태연하게 흘리며 재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엠케이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들에게서 비슷한 소리를 여러 번 들었을 테지만 그와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멤버에게서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일 터. 재이의 예상대로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엠케이의 아버지가 재이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를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긴 하구나. 어쨌거나 멀리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일단 들어오거라.”
도어락 한 번 열기 엄청 힘드네.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성격들이 좀 특이해서 그렇지 다들 괜찮은 녀석들’이라니, 한재이 뭐 잘못 먹은 거 아닌가 싶어서 놀라서 쳐다봤잖아.”
“내 말이. 엠케이보고 존경스럽다고 하는 한재이라니.”
“순간 내가 헛것을 들었나 싶더라니까.”
“나도 꿈인 줄 알고 허벅지 꼬집어 봄.”
손님방과 엠케이의 방에 나누어 짐을 풀고 센트럴 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멤버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하여간에 눈치 없는 것들 같으니. 거기서 쫄면 어떡해. 딱 보면 각 안 나오냐. 내 집에 들어오고 싶으면 우선 내 비위나 좀 맞춰 보던가. 이거였잖아. 내 덕분에 무사히 들어와서 좋은 대접 받고 있는 줄이나 아셔들. 나 아니었으면 현관에서 그대로 쫓겨났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한테 마음껏 고마워해라, 다들.
재이가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멤버들이 한마디씩 했다.
“와 저 생색내는 것 좀 봐.”
“안정의 한재이 맞네.”
“결국, 입에 발린 말이었다는 거야?”
“왠지 배신감 느끼는데.”
그런 멤버들의 반응을 한 귀로 흘리며 재이가 엠케이에게 물었다.
“아이돌 하는 거 집에서 반대했나 봐?”
그 말에 엠케이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렇지 뭐. 비보잉 한다고 돌아다닐 때만 해도 저러다 말겠거니 하셨나 봐. 아빠는 나도 누나처럼 공부해서 사업을 이어받길 원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누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거든.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없지.”
그리고는 살짝 굳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저래 보여도 우리 스케줄 하나하나 다 꿰고 계셔. 아마 재이 너 나온 드라마도 다 보셨을걸.”
그러자 재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냥 처음부터 우리한테 말을 하지. 미리 말해 줬으면 더 친하게 지내는 건데.”
“그러게. 이참에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재이에 더불어 드물게 인혁까지 가세하자 엠케이가 소름 돋는다는 듯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이럴까 봐 그랬지. 이럴까 봐. 대체 집에 돈이 많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멤버들이 하나둘 가세하기 시작했다.
“와 저 가진 자의 여유 보소.”
“그러게. 진정 가진 자만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은규와 이환이 중얼거리자 남궁찬이 끼어들었다.
“난 우리 부모님이 곧 나고 내가 곧 우리 부모님인데. 그러므로 부모님의 재산도 언젠가는 곧 내 재산.”
“남궁찬 저거는 꼭 선 넘어요.”
“인성이 부족한 거야. 우리가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 만들어야지 별수 있냐.”
“그러게. 근데 어째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멤버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인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물었다.
“근데 그래서 다들 뭐 할 거야?”
“우린 박예찬 선생님 만나기로 했어. 마침 뉴욕 와 계시다고 해서.”
인혁의 물음에 은규가 이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예전 경연 프로그램에서 도움을 받은 프로듀서 박예찬과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박예찬이 곡 작업차 뉴욕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와 있다는 소리에 거기에 들러 이번 앨범에 대해 조언을 듣기로 한 모양이었다.
“오 뉴욕에 와서까지 음악 작업 하는 거야? 셀렙같다야.”
“장세은 팀장님이 아시면 또 땅을 치시겠는데?”
“이번엔 내 탓 아니라고 말씀드려야지.”
은규를 박예찬에게 연결시켜 준 일로 될성부른 나무를 떡잎째 다른 프로듀서에게 넘겼다고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던 재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은규가 웃으며 재이에게 물었다.
“넌 뭐 할 건데?”
“어? 나도 만날 사람이 좀.”
“와 뭐야, 한재이 인맥 뉴욕까지 뻗어 있는 거야?”
“누군데? 나도 좀 알자, 응?”
멤버들이 눈을 빛내며 달려들자 재이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블럭 코리아 사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
재이의 말에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멤버들이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와, 쩐다. ‘별거 아니야. 블럭 코리아 사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라니. 블럭 코리아가 동네 마트 이름이냐고. 사장님이 네 친구냐고.”
“한재이 역시 황금 인맥이었어.”
“누구는 맨해튼 펜트하우스에 사는 플래티넘 수저에, 누구는 대기업 사장님하고 친구 먹는 사이에. 우리 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냐, 응? 이거 거리감 느껴져서 어디 같이 일하겠냐고.”
“이환 부러우면 너도 엠케이네 아버지한테 친구로 지내자고 해 봐. 그럼 너도 순식간에 회장님과 친구 사이…….”
“으악 남궁찬 그만해. 상상만으로도 체할 것 같다고.”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빤데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어느새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시끌벅적해진 주변에 고개를 내저은 인혁이 재이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 왜 만나는 거야? 일 얘기라니. 재재님 에디션?”
“어. 그게 말이지. 사실 나도 잘 몰라.”
“뭐?”
재이는 며칠 전 석관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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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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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야, 누가 너 뉴욕에서 시간 되면 좀 만나자고 하는데.”
“네? 저를요? 누가요?”
한국도 아닌 뉴욕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니.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석관이 대답했다.
“블럭 코리아에서 연락이 왔는데. 사장님이 너 한번 따로 만나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사장님이 따로요?”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그쪽의 오 부장네 팀과 협업 중이라 사장이 자신을 굳이 따로 불러낼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는 건 개인적인 용무라는 이야기인데. 재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석관이 이어 말했다.
“어. 오 부장님 통해서 네가 스케줄 때문에 미국에 올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셨나 봐. 사장님 쪽도 업무 때문에 뉴욕에 갈 일이 있다고 혹시 시간 맞으면 고마움의 표시로 밥이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더라고.”
“아니 사장님이 저한테 고마우실 게 뭐가 있다고.”
재이가 중얼거린 말에 석관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 재재님 에디션이 그렇게 많이 팔렸는데 고마우시겠지. 신문 기사 난 거 봤지? 우리나라에서 발매한 로컬에디션 중에서는 거북선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이순신 장군 밑 재재님이라니, 내 가슴이 다 웅장해지더라, 야. 전에 오 부장님 말씀 들어 보니까 다른 나라 한정판들과 비교해 봐도 매출 좋은 편이라 그룹 내에서도 체면이 섰다고 좋아하시던데.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 재재님.
석관이 한 말에 재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블럭 코리아와 재이가 협업한 재재님의 용사 이야기 로컬한정판은 석관의 말대로 출시되기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번져 예약판매 단계에서부터 줄 매진을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파티가 다 함께 찍은 브로슈어가 포함된 특별 패키지는 재재님의 어린 팬들과 파티의 팬들이 몰리는 바람에 발매 첫날에 모두 매진되는 사태가 일어났을 정도였다.
애초에 적은 수량만을 생산하는 한정판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블럭 코리아는 고심 끝에 추가 생산을 결정했다. 한정판을 추가 생산한 것은 블럭 코리아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며 웃는 오 부장의 얼굴은 그간의 격무를 보상받은 듯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장님하고 단둘은 좀 부담스러운데.”
“단둘이라고 누가 그래?”
“예?”
“심 팀장님이 같이 가실 거야. 거기도 아마 혼자 나오지는 않을거고.”
신인 기획팀의 심진우 팀장이 같이 간다고? 고맙다고 밥 한 끼 사 준다는 데에 한국에 있을 심 팀장님까지 날아올 일인가요…….
재이는 이해할 수 없는 석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 *
“그래서, 김 팀장이 진짜 말 안 해 준 거야?”
“그렇다니까요. 석관이 형도 참. 이럴 때 보면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석관의 말에 따르면 블럭 코리아 사장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에 한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심진우 팀장이 재이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사람도 참. 너 놀리는 게 재밌나 보다.”
“저를요? 석관이 형이요?”
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진우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감히 누가 자신을 놀릴 수가 있냐는 표정을 하는 열아홉이라니. 거참 딱 놀리기 좋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심진우가 말했다.
“아무튼 김 팀장이 말 안 한 걸 내가 까 버리자니 좀 미안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가기 전에 알고 가는 게 나을 테니 말해 줄게.”
잠시 숨을 돌린 심진우가 이어 말했다.
“재재님의 용사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 있나 보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