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04화 (104/224)

#104

재비스의 강림

하얀 배경 속 블랙으로 색을 맞춘 의상을 입은 여섯 명이 시선을 내리깐 채 서 있었다. 어두운 베이스음이 낮게 깔리고 스산하게 진행되던 인트로가 멎은 순간, 여섯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했다.

여섯 명의 눈동자 중 단 한 쌍의 붉은 눈동자.

그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 씩 웃자 주변이 검게 물들며 떠올랐던 곡의 타이틀이 흐릿하게 흔들리다 연기처럼 흩어졌다.

[Abyss: 심연]

묵직한 사운드 속에서 서로 다른 톤의 래핑이 여러 겹으로 포개지고 은규와 이환이 만들어내는 사운드에 맞춰 밀고 당기듯 곡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들 속에 스며들어 있던 재이의 낮은 목소리가 일순 분위기를 뒤집으며 특유의 곧게 뻗어 나가는 목소리로 단숨에 사운드를 장악했다. 마치 물에 떨어지자마자 훅, 주변을 순식간에 물들여 버리는 잉크 한 방울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하얗던 배경은 어느샌가 멤버들이 입고 있는 의상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창백한 조명이 빠르게 점멸하는 공간 속에서 자로 잰 듯 맞아떨어지는 여섯 명의 칼군무가 펼쳐졌다. 이내 포메이션이 바뀌며 여섯 중 유일하게 붉은 눈동자를 한 멤버, 재이가 다른 다섯 명의 멤버들이 자신을 둘러싼 채 다가오는 것을 둘러보고는 입 끝을 슬쩍 말아 올리며 웃었다.

감히?

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멤버들을 둘러본 재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멤버들 사이로 얽혀 들었다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며 빠르게 쏟아지는 비트를 가지고 놀듯 박자를 꽉 채우는 움직임에서는 어딘지 모를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멤버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며 쉴 새 없이 질주하는 사운드 속에서 재이의 목소리가 심장을 서서히 옭아매듯 귓가에 차올랐다.

걱정하지마 흔들리지마 기다리고 있을게

여기 이 자리 너를 (나를) 위한 나락 속에서

그리고 다음 순간, 시간이 멎은 듯 모두가 멈춰 선 공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던 재이가 천천히 손을 허공에 뻗었다. 손끝 주변을 맴돌던 검은 연기가 모였다 흩어진 자리에는 붉은 피리가 들려 있었다.

재이 주변의 멤버들이 재이가 부는 피리에 이끌리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서로 원치 않는 듯한 동작으로 얽혀 들면서 곡은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재이를 향해 뛰어든 다섯 명의 동작이 그대로 멈추고 그들의 사이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재이가 다시 한번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대며 그대로 카메라를 지나쳐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재이가 사라지고도 계속되는 피리 소리에 이끌리듯 다섯 명의 멤버가 하나씩 천천히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힐끗 바라보곤 그대로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가는 다섯의 눈동자는 어느새 재이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멤버들이 모두 사라진 공간. 시작과는 달리 어둠으로 꽉 찬 공간에 타이틀이 다시 한번 떴다 사라졌다.

[Abyss: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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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저만 대놓고 악역삘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인데 혹시 제 착각인가요?”

멤버별로 완성된 뮤직비디오를 돌려보기 위해 모인 회의실에서 마지막으로 재생된 음유시인 버전을 본 재이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어비스가 완승하는 패턴은 너로 가기로 했잖아. 왜, 완성본이 마음에 안 들어? 완전 잘 빠진 것 같은데.”

VD실 윤효민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은 [Abyss: 심연]

뮤직비디오는 어비스, 즉 심연에 사로잡힌 멤버와 나머지 다섯이 대치하는 구도로 연출되었고 멤버별로 각기 다른 엔딩을 맞는 형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재이가 맡은 음유시인 버전은 어비스에 물든 음유시인에 맞서던 다섯 멤버가 결국 어비스에 패하고 그와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나름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이었다. 촬영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완성된 영상을 보고 있자니 이건 아예 대놓고 악역이 따로 없었다.

“아니 잘 빠지긴 했는데요…….”

재이가 중얼거리자 멤버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당했네 당했어. 음유 버전밖에 기억에 안 남아.”

“내 말이. 세상을 구한 건 차인혁인데 어째서 머릿속엔 한재이밖에 안 남아 있는 거지?”

“이것이 바로 흑막보스의 위엄인가.”

엠케이의 말대로 재이가 어비스와 동화되어 나머지 멤버들을 모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면 반대로 인혁이 담당한 전사 버전에서는 어비스에 물들었던 인혁이 도중에 스스로 나락에서 빠져나와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하얀 배경에서 엔딩을 맞았다. 그러나 완전히 어비스에서 탈출한 것은 인혁의 전사뿐, 나머지 멤버들의 스토리는 몇몇은 살아남고 몇몇은 심연에 물드는 회색엔딩이었다.

“사실 한재이 아니면 소화하기 힘들지 저건.”

“하긴, 저 엔딩 한재이 말고 다른 사람이 했으면 좀 어색했을지도.”

“역시 진리의 어흑재.”

“악역 전문 아이돌이라니. 아이돌 캐릭터의 새 장을 여는구나, 한재이.”

멤버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것에 재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왜지. 나만큼 착한 애가 어딨다고.”

그러나 멤버들은 재이의 혼잣말 따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다른 주제로 이미 넘어가 버린 후였다.

“어흐. 근데 나 저 피리 소리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아.”

“나도. 진짜 홀리는 것 같은 기분.”

“한재이 피리를 불어도 꼭 저렇게 불어야 하냐고.”

“아니 그게 내 탓이냐고. 사운드 짜 넣은 건 심은규랑 장 팀장님인데.”

남궁찬의 말에 발끈한 재이가 은규를 가리키며 버럭했다.

“음유 버전에서 피리 소리 같은 걸 중간에 넣으면 임팩트 살고 좋을 것 같다고 한 건 한재이 너였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사실 나나 장 팀장님은 네가 피리 불 줄 아는 줄도 몰랐다고.”

은규의 반격에 재이가 드물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이환과 남궁찬이 쑥덕거렸다.

“하긴, 보통은 피리 같은 거 불 줄 모르지 않나?”

“피리가 다 뭐야. 나는 리코더도 불 줄 모르는데.”

“한재이 저것도 그러고 보면 은근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거 많다니까.”

“추가 예산 얘기 나오자마자 그럼 우리 뮤비 추가 촬영 하면 안 되냐고 했을 땐 진짜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환이 슬쩍 끼어들며 던진 말에 남궁찬이 격하게 맞장구쳤다.

“내 말이. 바빠 죽겠는데 뭘 더 어쩌려고 싶고 막. 난 찍으면서도 긴가민가했다니까.”

“찍을 땐 이대로 죽나 보다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살아있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응.”

퀄리티 죽이네요. 역시 믿고 맡기는 케이엠 VD팀.

그 틈에 윤효민에게 양손 엄지 척하며 아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 엠케이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재이가 윤효민 실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그럼 포토는 좀 착하게 나가나요? 저 너무 무섭게 나가면 애들이 싫어해요. 운다고요.”

재재님을 빌미로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어본 재이의 질문에 윤효민이 대답할 새도 없이 멤버들이 달려들어 한마디씩 했다.

“본캐와 부캐를 혼동하면 안 되지, 한재이.”

“그래그래. 재재님과 너를 동일시하지 마. 너랑 재재님은 다른 인격이야. 어나더 펄쓴, 오케이?”

“그러타 그러타. 파티의 한재이는 어차피 흑막이라 대놓고 무서워도 괜찮아.”

“뮤비 저렇게 찍어 놓고 포토에서 아닌 척 착한 척하고 있으면 그거야말로 캐붕이지.”

“앨범의 완성도를 위해 네 한 몸 희생해라, 한재이.”

아 어쩐지 거하게 말린 기분이야.

자신의 물음에 대답은커녕 멤버들의 째몰이가 재미있다는 듯 아예 팔짱까지 낀 채 강 건너 불구경 중인 윤효민을 비롯한 직원들의 모습에 재이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PART.Y 팬 게시판

[Abyss: 심연 뮤비 본 포션이 포션 구함 ㅜㅜ]

살려 줘 나 호흡 딸려 죽겠어. 이번 뮤비 미친 거 아니냐. 나 보고 레알 기절하는 줄. 이거 퀄리티 실화냐고. 나 꿈 꾼 거 아니지 그치. 와 진짜 재비스 보고 있자니 주태온이 새삼 쩌리잡몹이었다고 느껴짐ㅋㅋ 아이돌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ㅜㅜ 나도 물들여 줘 재비스ㅜㅜ 나락에 내 자리 없나요.ㅜㅜᅮ 아 진짜 파티 때문에 일상생활이 안 됌. ㅁㅊ 이건 암만 봐도 포션이 필요한 건 애들이 아니라 나라고 나. 진심 이러다가 컴백 무대 보기도 전에 뮤비 돌려보다 심장마비로 쓰러질 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포션구함요ㅜㅜ

└ 재비스가 뭐임?

└ 재이+어비스=재비스ㅋ

└ 첫 줄부터 막 줄까지 다 받음ㅋ큐ㅠ 케이엠아 절 받아라. 존심상하게 우리 애들 빈집털이시킨다고 욕했던 나를 매우 치세요. 빈집을 털든 내 재산을 털든 다 털어 가도 좋으니 많이만 나와 주시오ㅠㅠ

└ 포셔나 일련번호 확인했냐. 아무래도 우리 같은 공장 출신인듯ㅋㅋ내가 살다 살다 소속사에 무릎 갈리는 덕질을 하게 될 줄이야ㅜㅜ 이번 뮤비 넘나 은혜로운것ㅜㅜ

└ 역시 진리의 어흑재. 저게 저렇게 잘 어울릴 일이냐고 ㅠㅠㅠㅠ

└ 저런 심연이면 나도 들어갈래 나도 좀 빠지자.

└ 비키세요. 여기 자리 다 찼어요. 저리 가세요

└ 어억 거기 밟지 마새오 사람 있어요

└ 팬보다 더 애들 덕질에 진심인 소속사라니 나포션 반성하고 간다..

└ 애들 컨셉 제대로 잡은 듯 난 규비스 좋았어 미친 듯한 피아노

└ 난 환비스ㅜㅜ 목소리 제대로 취저ㅜㅜ

└ 야 진짜 애들 무대 기대되지 않냐 뮤비 저렇게 찍었는데 무대도 쩔겠지

└ ㅇㅇ이거 무대에서 어떻게 할지 ㅈㄴ기대됨

└ ㅅㅂㅈㅅ랑 붙는대서 좀 걱정했는데 애들한테 미안하다. 그냥 믿고 있으면 되는거였어ㅜㅜ

└ 거기 돈 엄청 뿌리는 거 보고 우리 애들 밀릴까 봐 걱정했는데 뮤비 보고 온갖 시름 걱정 싹 사라짐^^*

└ 비교 ㄴㄴ 분란글 자제 좀

└ 애들 빈집 털러 가는 거 아니었냐고 저건 빈집만 털 기세가 아닌데ㄷㄷ

└ 전투력 개오짐 이미 만렙 ㅋㅋ

└ 케이엠이 제대로 칼 간 게 맞는듯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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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BC 음악방송 사전 녹화일

“야 오랜만에 오니까 되게 떨리는데?”

“오랜만은 무슨. 누가 보면 한 3년 쉬고 온 줄 알겠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아까 들어오는데 팬들 서 있는 거 보고 완전 설렘.”

멤버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방송국 복도로 들어섰다.

“이환 너 설마 또 같은 팔 같은 다리 내민 거 아니지?”

“아 몰라 나 거기 기억이 희미해. 가출했던 영혼이 지금 막 돌아온 느낌이야.”

“기사 떴나 봐 봐라. 그게 더 빠를 듯.”

멤버들은 평소보다 더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사전 공개 된 뮤직비디오는 이미 반응이 뜨거웠다. 팬덤 쪽은 물론이고 일반 커뮤니티 쪽에서도 스토리와 연출이 탄탄하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다소 마니악하게 느껴질 수 있는 뮤직비디오와 달리 곡 자체는 강렬한 비트와 후크로 펌핑한 댄스뮤직이었던 탓에 듣고 있자면 저절로 후렴구가 입에 붙었다. 오늘 컴백 스페셜로 진행될 스테이지 두 곡에서 직접 팬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멤버들은 평소보다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야, 드디어 우리도 단독 대기실을 쓰네.”

“엄밀히 말하면 단독은 아니지 않냐.”

“어쨌거나 그 신인 대기실은 졸업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뭔가 감동인데. 잠깐 기다려봐, 역시 이건 찍어야겠어.”

멤버들과 함께 복도를 걷던 남궁찬이 먼저 대기실 쪽으로 뛰어갔다.

방송사마다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LBC의 경우 신인 그룹은 지하 강당에 파티션으로 칸막이를 쳐서 만든 공동 대기실을 사용하는 반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거나 연차가 쌓인 그룹의 경우 지상층에 단독 혹은 비슷한 연차의 두 팀을 한데 묶어 대기실을 배정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당연히 오늘도 공동 대기실이 있는 지하 강당으로 안내받을 거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단독 대기실이 있는 지상층으로 가란 소릴 들었으니 누구보다 제 한 몸 뉠 공간에 예민한 남궁찬이 감동할 만도 했다.

멤버들보다 먼저 대기실 문 앞에 도착해 문에 붙어 있는 자신들의 그룹명을 인증샷으로 남기려던 남궁찬이 문득 짧게 내뱉었다.

“어…….”

“왜?”

한 박자 늦게 도착한 다른 멤버들이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굳어 있는 남궁찬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삼벤져스?”

PART.Y의 옆에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은 오늘 데뷔 무대를 갖는 신인 그룹 KAISER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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