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황제랑은 사이가 좋아 본 적이 없어서
피부에 와닿는 홀 안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팬들의 함성과 음악 속에 눈부시게 빛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여섯 명의 멤버가 꽉 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잘 짜인 동작으로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순 무대 전체로 산개한 듯하던 멤버들이 다음 순간 한 멤버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쉴 새 없이 질주하는 비트에 무대를 보고 있는 이쪽의 심장 박동마저 빨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사운드에 맞춰 서서히 차오르는 물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채우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흔들리지 마 기다리고 있을게
여기 이 자리 너를 (나를) 위한 나락 속에서
한계까지 차올라 넘실대던 물이 팍 터져 나오듯 무대를 꽉 채웠던 빛이 순간 점멸하며 한 멤버를 둘러싸고 있던 다섯이 사방으로 흩어지듯 쓰러졌다. 그리고 무대 위에 서 있는 단 한 사람. 고개를 숙인 채 홀로 서 있던 멤버가 느릿하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오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한재이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 피리를 꺼내 든 한재이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피리를 불며 천천히 무대 뒤편으로 걷기 시작하자 그 소리에 이끌리듯 주변에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하나둘 비틀거리며 일어나 느릿하게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모두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텅 빈 무대의 LED 위로 검은 연기가 차오르듯 곡의 타이틀이 뭉쳐 올랐다가 흩어졌다.
[Abyss: 심연]
“…미친.”
무대가 끝나고도 끝나지 않는 여운에 김도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아아아———!!!!
다음 순간 귓가를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에 김도연은 겨우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쟤넨 확실히 안정적이네.”
“그러게. 이번에도 재밌는걸. 역시 보는 맛이 있어.”
옆에서 무대를 구경 중이던 제작진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김도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분하지만 숨 쉬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멋진 무대였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빨리 뛰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도 할 수 있어.’
김도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X나 많이도 왔네.”
“피디한테 돈 먹인 거 아니야? 뭐 저렇게 많아?”
삐딱하게 선 채 불만 섞인 표정으로 무대 너머 관객석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은 헤어와 의상을 만지작대느라 무대 쪽은 보고 있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대신 가슴속을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듯한 기분에 김도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김도연 인상 펴. 싸우러 가냐.”
“무대 망치면 뒤진다.”
“진짜 도움 안 되는 2군 X끼.”
김도연은 대답 대신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대 위로 돌아와 스태프들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세부 사항을 확인한 파티 멤버들이 이내 오케이 사인을 받은 듯 백스테이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팬들의 환호에 손 흔들어 주며 뭐라고 대화를 주고받다가 다 같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TV를 보고 있는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대기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들어선 그들이 다음 녹화를 위해 스탠바이 하고 있던 자신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이겨 보이겠노라 이를 갈고 있는 경쟁 상대라고 해도, 멋진 무대를 보여 준 그룹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리더의 눈치를 힐끔 살핀 김도연은 입에서 맴돌던 말을 집어삼켰다.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휙 돌리자 하필이면 마침 마지막으로 들어오고 있던 한재이와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컬러 렌즈를 끼고 있는 탓인지 이질적으로 붉게 번뜩이는 두 눈동자가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김도연은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
.
.
- 한재이한테 밀렸다잖아.
- 누구? 그 퇴출 1호?
- 헐. 나 같으면 쪽팔려서 때려치움.
-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 괜히 김독연이겠냐.
- 저렇게 백날 연습만 해 봐라, 소용 있나. 결국, 운도 실력인데.
‘틀린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 주겠어.’
자기 대신 저 만년 꼴찌를 고른 회사도, 저런걸 멤버로 받아 주고 싸고돈 A팀 녀석들도 모두 자기가 아닌 그 녀석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마침 지금의 회사에서 컨택이 왔다.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이 따라나섰다. 운도 실력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 야 이 X발아, 제대로 안 해? 이래서 X나 빌빌대는 거 주워 오지 말자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 둬라, 만년 2군에만 있던 새끼가 뭐 제대로 알기나 하겠냐.
- 재능도 없으면서 빌붙어있기는.
여러 회사에서 날고 기는 실력자들만 모아 온 멤버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회사는 그들의 프라이드를 그룹의 정체성이자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론칭을 맡은 본부장은 멤버들과의 첫 대면에서 너희는 실력만 제대로 보여 주면 될 뿐 나머지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 낡은 관행이나 허례허식은 무의미하다고, 그룹 이름처럼 모든 이들 위에서 군림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눈앞에 깔아 놓은 푹신한 레드카펫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것. 회사가 큰돈을 쥐여 줘 가며 모셔 온 A급 연습생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B팀에서 허덕이다 데뷔 문턱에서 미끄러진 자신은 쭉정이에 불과했다. 열심히 연습하면 능력도 없는 게 설친다고 욕을 먹고 레슨을 빼먹기라도 하면 능력도 없는 주제에 노력조차 안 한다고 욕을 먹었다.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어떻게 해서든 보란 듯이 데뷔하고 싶었다. 멤버들 사이에서의 취급은 거지 같았지만 어차피 일로 만난 사이였다. 밀어주고 끌어 주는 끈끈한 의리나 우정 같은 거, 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했다.
“가자.”
리더의 말에 멤버들이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 흔한 화이팅 구호조차 없이 제각기 무대로 향하는 그들을 뒤따라 걸으며 김도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이야, 재비스 박력 쩔더라. 마지막 클로즈업에서 카메라 감독님 움찔하시는 거 봤냐?”
“나 그거 보고 웃음 터질까 봐 어금니 꽉 깨문다는 게 입 안 깨물어서 지금 얼얼하다고.”
“한재이 다음번에 어비스 할 땐 눈에 힘 조금만 줘라. 잘못하다간 공포 조장이네 뭐네 해서 검열에 걸리겠어.”
“아, 나 아무래도 이 컬러 렌즈 눈에 안 맞나 봐, 이것 좀 봐.”
대기실로 돌아온 멤버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재이가 컬러 렌즈를 빼고는 그대로 붉게 충혈된 눈을 멤버들에게 들이밀었다.
“으악, 한재이 호러 저리 가.”
“혐짤 들이밀 때는 사전에 경고해 주는 게 매너 아니냐.”
“좀 심한데? 뮤비 찍을 땐 괜찮았잖아?”
“이게 더 발색 좋다고 해서 바꾼 건데 아무래도 한재이한테 안 맞는 듯.”
빨갛게 충혈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하는 멤버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상태를 살피러 다가온 김석관과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말했다.
“저 잠깐 찬물에 눈 좀 씻고 올게요.”
“안약 넣고 좀 쉬는 게 나을 텐데.”
석관이 만류하는 말에 재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눈이 뻑뻑한 게 신경 쓰여서 그래요. 잠깐 다녀올게요.”
“너무 세게 문지르지 말고. 덧나면 큰일이니까.”
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석관이 한마디 덧붙이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음 좀 가져다 놓을게요. 안약 넣고 냉찜질 좀 하면 나을 거야.”
“이따 인터뷰할 땐 좀 가라앉아야 할 텐데.”
“정 안되면 이게 렌즈 낀 거라고 우겨 보죠, 뭐.”
“제가 같이 다녀올게요.”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석관과 스태프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꾸하며 밖으로 나서는 재이를 인혁이 따라나섰다.
“야, 대기실 이쪽인데 어디 가?”
“구경.”
등 뒤에서 인혁이 부르는 소리에 재이가 짧게 대답했다. 금세 뒤따라온 인혁이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구경? 무슨 구경?”
“황제 구경.”
“아.”
인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어째 얌전하네 싶었다.
“보고만 오는 거다?”
인혁의 물음에 여전히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재이가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뭘 더 하게?”
“아니면 됐다.”
인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를 한 번 흘겨보고 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원래 스스로 칭제하는 것들 중 제대로 된 녀석이 없다는 것은 저쪽 동네에서 이미 검증이 끝난 팩트였다. 황제돌이라고 언플 중인 저 신인 그룹도 그냥 국외 자본 끌어와서 분탕질 중인 회사의 사탕발림에 놀아나고 있는 꼭두각시인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안하무인으로 휘젓고 다녀도 당장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이 무례해도 넘어가 줄 만큼 뛰어나서가 아니라 삼화 엔터와 그 뒤에서 돈을 대고 있는 모그룹의 의중을 캐기 위해서일 터였다.
‘근데 저렇게 설치면 대체로 금방 골로 가던데.’
결국 끝이 좋지 않았던 저쪽 동네의 자칭 황제를 떠올린 재이가 내심 중얼거렸다.
백스테이지 끝에 다다르자 바깥쪽 무대에서는 아직 녹화가 한창이었다.
“생각보다 길어지네?”
“그러게. 아까 우리 오기 전에 이미 한 곡 찍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데뷔부터 두 곡이라니. 황제 대접이 다르긴 한가 보네.
자신에게만 들리게 나직이 중얼거리는 인혁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이며 재이는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포지션을 바꾸느라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카이저의 리더 에이튼과 정면으로 시선이 맞아 버렸다.
“어이쿠 저런.”
그리고 다음 순간 에이튼이 거하게 음 이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 했냐?”
“뭐래.”
“아니 노래 잘하고 있던 애가 너 보더니 갑자기 삑사리를 내잖아.”
“이젠 아주 만물이 살아 숨 쉬는 것도 다 내 탓이구나.”
“그게 아니라.”
“내가 진짜 서러워서 살 수가 없다.”
“아니면 쟤가 왜 너 노려보냐고.”
촬영이 잠시 중단되고 리테이크를 위해 잠시 대기 중이던 멤버들 사이에서 에이튼이 이쪽을 힐끔 노려보는 것을 눈치챈 인혁이 재이에게 말했다.
“난들 아냐. 사시인가 보지.”
“큭, 하여간에.”
재이의 무심한 대답에 짧게 뿜은 인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재이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에이튼을 무시한 채 포메이션의 끄트머리에 선 김도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던 차에 마주쳤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거참.’
그렇다고 무슨 일이냐고 가서 대놓고 물어볼 만한 사이도 아니고.
재이는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리테이크가 시작된 무대에서 또다시 에이튼이 음 이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라 그런가 데뷔도 화려하게도 한다. 리테이크만 몇 번이냐.”
“그래도 당당하잖아. 대단해, 저건 아무나 못 하지. 확실히 제왕의 재목이긴 하다.”
“한재이 제발 그 입 좀.”
인혁이 주변을 재빨리 살피며 재이에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왜. 난 칭찬도 못하냐고.”
“못 해, 안 돼, 하지 마. 그냥 좀 조용히 보다가 가자.”
“맨날 나만 갖고 그래, 나만.”
인혁의 말에 재이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 * *
LBC 음악방송 [더 스테이지]의 라이브 인터뷰 [비하인드 씬]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비드씬] 인터뷰는 ‘당신을 달콤한 나락으로 끌어들일 치명적인 카리스마’ PART.Y 여러분과 ‘가요계에 군림할 절대군주’ KAISER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같은 대기실에 몰아넣을 때부터 알아봤지.’
엠씨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포진해 앉은 두 그룹 가운데서 재이가 내심 중얼거렸다. 온에어 중 라이브로 송출되기 때문에 원래도 난이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인터뷰였지만, 오늘은 왠지 다른 의미로 대기실 안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차올라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 우선 PART.Y 여러분, 새 앨범 [Lv.2 Abyss Raid]로 돌아오셨는데. 와, 무대! 와, 진짜! 완전 충격적이었어요!”
엠씨가 분위기를 띄웠다. 엠씨 바로 옆에 앉아있던 인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무대 완전 준비 많이 했거든요. 여기 엠케이 씨랑 남궁찬 씨가 막 매일 밤 코피를 쏟아 가면서…….”
“저희가 이번 무대에 진짜 영혼을 갈아 넣었습니다!”
“영혼을 재비스에게 제물로 바쳤지요!!”
인혁의 과장된 설명에 엠케이와 남궁찬이 그에 맞춰 코피 쏟고 쓰러지는 추임새를 넣으며 한마디씩 보탰다.
“와 그러셨구나. 역시 파티의 댄스 라인, 든든하네요! 근데 재이 씨, 그 눈은 혹시 설마 아직 재비스!?”
엠씨가 영혼 없는 리액션과 함께 화제를 재이의 충혈된 눈으로 돌렸다.
“걱정하지 뫄흐~ 흔들리지 마하~ 기다리고 있을게허~”
“으아아 물리치자!!!!”
“지금이야!!!”
“재비쓰으으-!!!”
대답 대신 흐느적거리며 과장된 콧소리로 후렴구를 부르는 재이에게 양옆에 앉아 있던 이환과 은규 그리고 남궁찬이 달려들었다. 우당탕 한바탕 법석을 떨고 있는 멤버들을 몸으로 가리듯 앞으로 나서며 인혁과 엠케이가 재빨리 마무리 멘트에 들어갔다.
“하하 여러분 저희 파티의 어비스 레이드 앞으로도 기대해 주세요!”
“과연 다음엔 어떤 심연이 당신을 나락으로 끌어들일지!!”
그러자 어느샌가 각자의 포지션에 맞춰 카메라 앵글로 능숙하게 들어온 파티 멤버들이 인혁의 선창에 따라 입을 모아 외쳤다.
“Part of you, 여러분의 일부가 되고 싶은 PART.Y였습니다!”
파티 멤버들의 인사가 끝나자 엠씨가 시선을 맞은편으로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혼이 나가 버린 듯 떨떠름한 표정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카이저 멤버들의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를 통해 전파를 탔다. 순간 급격히 식어 버린 주변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캐치한 엠씨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하핫. 여러분은 지금 비글돌의 명맥을 잇는 파티의 라이브 인터뷰에 피격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계십니다! 괜찮아요. 카이저 여러분, 여러분의 리액션은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땐 진짜 넋이고 혼이고 다 빠져서 진행할 기력도 안 남았었다니까요, 저와 파티 여러분의 잊지 못할 첫 만남이었지요. 하하하.”
그러나 애써 포장한 엠씨의 노력이 무색하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이저의 리더 에이튼이 건조한 말투로 짧게 대답했다.
“아, 저희가 원래 가식이 없는 편이라.”
주변의 촬영 스태프들이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는 자신들을 오만한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이튼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뭐. 내가 황제랑은 사이가 좋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재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사실 아까 대기실에서 처음 뵀을 때 느낌이 딱 왔어요! 들어가자마자 저희를 이렇게 쳐다보고 계시는데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 꿇고 인사 올릴 뻔했다니까요!”
턱을 한껏 추어올려 에이튼의 오만한 눈빛을 흉내 내 보이며 재이가 말했다.
어느 망조가 든 제국에서 온 놈들인지 몰라도 여기는 동방예의지국이라 이거지. 사람 만나면 일단 위아래 따져서 서열부터 정리하고 들어가는 나라에서 선배한테 인사도 제대로 안 했다?
‘황제 폐하 납시는 길에 가시 좀 살짝 뿌려 드려 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이가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