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쥐를 잡고 싶으면
“내 말 알아듣겠어?”
툭, 툭.
짜증 난다는 듯 어깨를 두어 번 밀쳐 대는 에이튼의 손길에 김도연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찌그러져 있으라고, 나대지 좀 말고 어? X발 생방이니까 지르고 보자 이거였어, 혹시? 이게 좋게 좋게 얘기했더니 사람을 호구로 아나.”
그럼 디제이가 묻는데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어야 하냐고.
조금 전에 있었던 라디오 생방송에서 갑자기 자신을 지목해 기습 질문을 해 온 디제이에게 대답을 한 거로 이 지랄이었다. 얼결에 대답했던 것이 좀 먹혔던 듯 스튜디오 반응도 청취자 반응도 좋았던 게 거꾸로 에이튼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잠깐 보자며 끌고 와서는 그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갈굼이 시작됐다. 여기서 대들어 봤자 괜히 에이튼의 화를 돋우기만 한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이미 잘 알고 있는 김도연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에이튼이 쏟아 내는 말들을 건성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냥 어서 끝내고 돌아가 좀 쉬고 싶었다.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아. 들켰나.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튼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설마 진짜 때리려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김도연은 순간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곧 있을 충격에 대비했다.
“아, 여기예요, 여기. 분명 이쪽이었어요!”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튼이 들어 올렸던 손을 황급히 내리려는 찰나 어둑하던 공간이 확, 하고 갑자기 밝아졌다.
“어? 두 분 거기서 뭐 하세요?”
그건 내가 할 소린데.
김도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그룹 파티의 메인 보컬이자, 최근 에이튼을 ‘신발 찾는 폐하’라고 인터넷에서 조리돌림 당하게 만든 장본인, 한재이가 저와 에이튼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어? 어어…….”
에이튼도 어지간히 당황했던지 욕을 내뱉는 것조차 까먹은 채 한재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이 씨, 정말 여기로 온 게 맞아?”
그제야 김도연은 재이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소부 유니폼을 입은 용역업체 직원 중 한 명이 미심쩍은 얼굴로 재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맞다. 네. 이쪽이 분명 맞아요. 여기서 났다고요, 그 소리.”
“잠깐 확인 좀 할게요.”
함께 온 직원 두 명이 자신과 에이튼의 틈을 비집고 탕비실 안쪽으로 들어가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는 것을 본 김도연이 재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재이가 김도연에게 물었다.
“혹시 못 봤어요?”
“무슨…….”
“쥐새끼. 여기 지나가는데 막 쥐 소리가 나는 거 있죠. 쥐들이 웬만해선 대놓고 이런 바깥까지 나다니지 않을 텐데.”
대답과 함께 재이가 에이튼을 빤히 쳐다보았다.
“방송국에 돌아다니는 쥐라니. 꺼림칙하잖아요.”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에이튼이 발끈하며 입을 열었다.
“이… ㅆ.”
“이상하네. 며칠 전에 소독 싹 다 했는데.”
“일단 쥐구멍 같은 거 없는 건 확인했으니 내일 오전조에게 인수인계해 두자고. 밝을 때 보면 뭔가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에이튼의 신발 타령은 마침 들려온 직원들의 대화로 맥이 끊겼다.
“알려 줘서 고마워, 재이 씨. 여기 건물이 낡아서 가끔 나오거든. 봤다는 사람 있을 때 바짝 찾아내서 싹 없애 버려야지.”
“그냥 두면 골치 아파지거든.”
“그러게요. 쥐든 바퀴벌레든 초장에 잡아 없애는 게 중요하죠, 그렇지 않나요?”
직원들에게 맞장구를 치던 재이가 대뜸 돌아보며 묻는 말에 에이튼이 허를 찔린 듯 당황한 채로 대답했다.
“어? 어. 어어…….”
그런 그를 흘깃 쳐다본 재이가 이번엔 그 옆에 서 있던 김도연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쥐 잡는 게 말이 쉽지 안 해 본 사람은 못 하거든요. 그러니까 발견하면 잽싸게 도망치거나,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좋아요.”
쥐한테 잘못 물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다고요.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얘기하는 재이에게 김도연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이 씨는 그런 걸 또 어디서 배웠대?”
그의 말에 김도연과 에이튼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거둔 재이가 직원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 제가 완전 시골 출신이거든요. 쥐 잡는 거야 뭐. 덫 같은 거 따로 필요도 없이 맨손으로 이렇게!”
“하하하, 재밌는 친구일세. 요새 세상에 그렇게 쥐를 잡는 시골이 어딨다고.”
“아 진짠데.”
재이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직원이 끼어들었다.
“생긴 건 쥐는커녕 개미도 못 만져 보고 컸을 것 같은데, 의외야.”
“아저씨들 저 나온 프로그램 보신 적 없으시구나? 제가 그 김봉만 형님이 인정한 야생의 사나이인데.”
“하하하 그래?”
“내가 야생의 사나이는 몰라도 재재님은 안다고. 우리 손주 놈이 완전 팬이거든. 이따가 사인 한 장 받을 수 있을까.”
“어허 김 씨 이 사람…….”
“좋죠. 근데 손자분 주실 거면 사인보다는 할아버지랑 같이 찍은 사진이 좋을 것 같은데요?”
“아이쿠, 그럼 영광이지.”
김도연은 재이와 직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잽싸게 도망치거나,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좋아요.
재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귓가에 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어디 갔다 온 거야? 화장실에 찾으러 가도 없던데?”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스탠바이로 분주한 제작진들 사이에서 엠케이가 물었다.
“쥐가 나와서.”
“뭐? 쥐?”
“어 쥐. 그래서 청소업체분들한테 알려 드리고 하느라 좀 늦었네.”
재이의 태연한 말투에 남궁찬이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으 쥐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함.”
그런 남궁찬의 반응에 엠케이가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역시 외모하곤 다르게 속은 깔끔한 도시남궁찬.”
“그건 칭찬이냐 욕이냐. 아무튼, 우리 집이 음식점 하잖아, 쥐가 무서운 게 아무리 가게를 청결하게 관리해도 주변 건물이 낡으면 말짱 소용없더라고.”
“쥐 하면 뉴욕 지하철에 사는 쥐가 진짜 대박이지. 걔네는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크기가 막 진짜 애기 머리만큼 크다고.”
“히에에엑.”
엠케이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이환과 은규가 소름 끼친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때아닌 쥐 토크에 신난 멤버들 사이로 인혁이 재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쥐라니. 누구 얘기야?”
“…하여간에 차인혁, 덩치에 안 어울리게 쓸데없이 예리해.”
“감이 좋다고 해 줘라. 그래서. 누구?”
재차 추궁하듯 묻는 인혁에게 짧게 한숨을 내쉰 재이가 대답 대신 물었다.
“너 김도연 잘 아냐?”
* * *
- 하하 근데 아까부터 조금 신경 쓰였는데, 재이 씨 눈은 괜찮은 거예요?
- 아, 이거요? 네네. 요새 무대 때문에 컬러 렌즈를 끼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좀 예민해서 이런 게 잘 안 받거든요.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끝나면 항상 눈 세척 잘하고 냉찜질도 챙겨서 하고 있습니다.
디제이의 물음에 재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멤버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 재이 씨가 사실 겉으론 아무거나 잘 받아먹을 것 같아 보이게 생겼어도 되게 까다롭거든요.
- 그렇죠, 저래 봬도 가리는 음식도 얼마나 많은데요. 알레르기도 있다고요.
- 일단 고기 아니면 안 먹죠.
- 와, 그건 진짜 모함이다. 제가 언제 고기 아니면 안 먹었다고? 아, 고기를 제일 좋아하는 건 맞습니다만.
멤버들의 말을 자르며 재이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 가리는 게 많아서 본인이 먹을 음식은 아예 본인이 만들다 보니 요리 솜씨가 늘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죠.
- 그쵸. 초창기에 만났을 땐 자주 얻어먹고 했는데. 이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안 해 주더라고요.
엠케이의 말에 남궁찬이 맞장구를 치자 재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나직이 내뱉었다.
-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중상모략과 유언비어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계십니다. 와 진짜 다들 너무하시네. 끼니때마다 자기들 먹고 싶은 거 리스트 만들어서 이거 해내라 저거 해 달라 하시던 분들 양심 어디 갔죠? 게다가 남궁찬 씨, 남궁찬 씨는 제가 한 걸 드리고 싶어도 못 드리잖아요.
-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흥미진진하게 멤버들과 재이의 말을 듣고 있던 디제이가 끼어들어 묻자 재이 대신 인혁이 대답했다.
- 남궁찬 씨 특별 다이어트 중이거든요. 똑같이 먹어도 혼자 유지가 안 돼서.
- 중간에 설명이 빠졌어요. 똑같이 먹어도 혼자 유지가 안 된 게 아니라 똑같이 먹고 몰래 또 먹어서 혼자 유지가 안 된 거예요.
- 이게 맞죠. 그래서 남궁찬 씨 혼자 저희 숙소 냉장실 닭 가슴살 코너를 애용하고 계신다는.
- 그럼 뭐 합니까. 저 어제 자다가 잠깐 일어나 나와 봤더니 그 새벽에 남궁찬 씨가 혼자 주방에서.
- 와와와, 이환 씨, 그거 프라이버시 좀 지켜 주시죠?
- 하하하, 정말, 그냥 계속 듣고만 있어도 안 질리는데요. 아쉽지만 벌써 헤어질 시간이 다 됐네요. 맺음말, 누가 해 주시겠어요?
그냥 두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멤버들의 수다를 적당히 끊어 내며 디제이가 마무리에 들어갔다. 앨범 홍보를 위해 출연자가 직접 코너의 클로징 멘트를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 오래 지켜온 암묵의 룰이었다.
- 아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 가라, 재비스!
- 어흑재, 어흑재!
재이의 목소리 뒤로 멤버들이 짧게 구호를 외쳤다.
- 세상의 끝에서 따뜻한 어둠으로 당신의 상처를 감싸 안을 수 있기를. 외롭고 힘든 삶에 지친 당신이 스스로 찾아올 나락에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Abyss: 심연]
재이의 멘트와 오버랩 되듯 노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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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중2스러운 멘트를 줄줄 내뱉을 수가 있는 거지?”
“내 말이. 대본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역시 재비스의 힘은 중2력에서 나오는 거였나.”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 오늘 있었던 라디오 방송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던 중이었던 듯 이환이 중얼거린 말에 남궁찬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쳤다.
“뭐래, 피디님이랑 작가님이 잘했다고 나 칭찬하시는 거 못 들었냐?”
“…한재이, 너 ‘인사치레’라는 말 혹시 들어 본 적 없냐.”
“자매품으로 ‘빈말’이라는 단어도 있지.”
“아 왜. 팬분들 반응도 좋더만.”
“팬분들은 네가 아무 말 없이 숨소리만 내도 좋다고 하실걸.”
엠케이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한 남궁찬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그건 좀 아니다. 상상해 보니까 뭔가 좀 이상하잖아. 마이크에 대고 숨소리만 내는 한재이라니.”
“악, 그러게. 뭐지 나 지금 소름 돋았어.”
“너흰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거냐.”
재이는 자신의 반박이 씨도 안 먹히는 것을 보고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마주쳤던 카이저 멤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전히 건방짐과 오만방자함이 컨셉인 듯 이쪽을 보고도 잠시 멈칫했을 뿐 인사는커녕 목례도 없이 지나치긴 했지만 처음 봤을 때의 그 하늘을 뚫을 듯한 콧대는 많이 꺾인 듯했다.
에이튼이 거하게 방송 사고를 친 후 삼화 엔터에서는 재빨리 사과문을 발표하고 수습에 들어갔다. 기울어진 여론을 수습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디어 노출 빈도를 높이는 전략을 택한 것인지 안 그래도 TV 채널 돌리다 보면 꼭 한번 보는 듯한 뮤직비디오는 물론이고 각종 예능이나 라디오까지 끈이 닿는 한 모든 프로그램에 꾸준히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듯했다.
‘도망치거나, 도와 달라거나.’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두운 복도 끝 아무도 없는 탕비실에서 에이튼 앞에 목을 움츠리고 서 있던 김도연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께가 납덩이를 얹은 듯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괜히 한재이 본인이 겪었던 일들까지 떠올라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도망치거나, 도와 달라거나. 어느 쪽이 됐건 본인이 한 발자국 내딛기 전까진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이 심약한 한재이도 도망칠 정도의 용기는 있었는데.’
독종이라고 불리던 그 녀석이 한재이 정도의 용기만이라도 가지고 있기를.
재이는 무거운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털고는 다시 스쳐 지나가는 밤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며칠 후.
“아니 그렇다고 꼭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란 얘기는 아니었는데.”
방송국 복도에서 저와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적 드문 비상구 계단참으로 끌고 온 상대를 바라보며 재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