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10화 (110/224)

#110

최고의 공격은 선빵이라잖아요.

“……도망치거나, 도와 달라거나.”

김도연은 회의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조금 전 얻어맞아 시큰거리는 정강이를 문지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처음 그룹에 합류했을 때부터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들들 볶아 대던 에이튼이었지만 최근엔 아예 감정의 샌드백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하고 있는 스스로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이 점멸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웃긴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멤버들은 물론이고 회사 직원들까지 에이튼의 표적이 자신으로 집중된 것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사방으로 튀던 어그로가 한 사람에게 쏠리니 그 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숨통이 트였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한 사람’이 나라는 게 문제지만.’

김도연은 쓰게 웃으며 손에 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에이튼의 시비가 일상화되면서 잠자리에 들 때도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 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어차피 멤버들이고 직원들이고 자신이 무얼 하든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자신이 폭로 따위 해 봤자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거꾸로 묻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저 방송국 높으신 분들도 좌지우지하는 재력인데 저 같이 돈도 빽도 없는 개인 따위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에이튼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 차곡차곡 쌓여 갈수록 언젠가 판을 뒤집을 수 있는 물증을 확보하고 있다는 든든함보다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환멸만이 더 빠르게 불어났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허무했다. 데뷔만 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시궁창은 그저 시궁창일 뿐이었다.

갓 데뷔한 신인에게 인맥이란 게 존재할 리 없었다. 인제 와서 제 발로 박차고 나온 케이엠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주변을 둘러봐도 도와 달라고 할 사람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불 꺼진 회의실 구석에서 숨소리조차 죽인 채 두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웅크려 앉았다.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락함에 잠시 젖어 있는데 갑자기 달칵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설마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야?’

안무 연습 도중 자신의 움직임이 성에 안 찬다면서 시비 끝에 정강이를 걷어찬 에이튼을 피해 다른 층 회의실로 숨어들었던 참이었다. 이미 야심한 시각이라 설마 이 시간에 여기에 누군가가 들어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걸 보면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김도연은 본능적으로 책상을 밀어 놓은 구석으로 최대한 몸을 말아 숨기고는 숨을 죽였다.

“사진은 확보했고?”

김도연이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슬쩍 들었다. 매니저가 여긴 왜?

불도 켜지 않아 깜깜한 회의실 안,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드는 희미한 불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네. 모레 중으로 나머지도 받아 낼 예정입니다. 이거 데이터 원본 얻는데 돈 꽤 깨졌는데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럼 자료도 모였겠다, 슬슬 터뜨려 볼까.”

무슨 말이지? 무슨 사진? 뭘 터뜨려?

김도연은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루트 알고 있지?”

“네. 말씀하신 대로 일부러 우리 쪽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기자들로만 추렸습니다.”

“이런 건 시간 싸움이니까 질질 끌 생각 하지 말고 한 번에 팍 터뜨려. 진위 공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치고 빠져야 하니까.”

“네. 아 참, 이 사진, 인물 신상은 따로 체크 안 해도 됩니까?”

“나 참.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어딨다고. 최 주임, 우리가 지금 무슨 기사라도 쓰는 줄 아는 거야, 혹시?”

“예?”

“우리는 그럴듯한 떡밥만 던지면 되는 거야. 만년 꼴찌에 퇴출 1호 소리까지 듣던 녀석이 갑자기 데뷔하더니 그 뒤로 예능이고 드라마고 꽂히는 족족 잘나가더라. 수상해서 좀 파 봤더니 역시나 돈 많아 보이는 스폰이랑 밀회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이것 좀 봐라. 어때? 하고 사진 몇 장 던져 주면 끝인 거야. 뉴욕에서 한 장, 한국에 와서도 두 장이나 건졌잖아? 이 정도면 이미 끝난 게임이라고.”

최 주임이 머뭇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팩트 체크도 없이 던졌다가 혹시라도…….”

“팩트 체크 그건 나중에 기레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런 류의 스캔들은 그런 루머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타격인 법이야. 우린 일단 얼개만 얽어서 던지고, 진짜냐 가짜냐 뭐 이런 얘기 나올 때쯤 전혀 상관없는 배우 쪽 열애설 같은 거 하나 던져서 그쪽으로 화제나 싹 옮겨 버리면 그만인 거라고. ‘스폰설 터졌던 애’라는 딱지 하나 붙여 주는 게 목적이지 이걸로 죽기 살기 끝장을 보겠다는 게 아니라니까.”

“근데 혹시 나중에라도 이쪽이 공작 친 거라는 게 알려져서 그쪽에서 작정하고 고소라도 하면.”

“벌금 그거 얼마나 한다고. 내가 말 했지. 돈 걱정은 하지 말라니까.”

매니저의 말에 김도연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아무튼, 이제 슬슬 여론도 에이튼 녀석 패는 거에 질린 듯하니까 마침 잘 됐지.”

제대로 된 장작 좀 넣어 줘 보자고.

매니저의 자신만만한 한마디와 함께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고도 한참 동안 김도연은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 * *

다음 날.

방송국에서 찾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에 자기 회사 사람들이 없는 것을 재빨리 확인한 김도연은 그의 소매를 붙잡고 다짜고짜 비상구 계단참으로 끌고 나왔다. 숨도 쉬지 않고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다급하게 쏟아 내고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는 김도연에게 그동안 묵묵히 그의 설명을 듣기만 하고 있던 재이가 물었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알려 주는 거죠?”

“…뭐?”

“의외여서. 그쪽은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싶어서요.”

전에 마주쳤을 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재이의 눈빛이 제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에 김도연은 괜히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쥐가 싫으면 도망치거나,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하라고.”

“아니 그렇다고 꼭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란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 말에 김도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저 같아도 며칠 전까지 적의에 찬 눈으로 노려보던 놈이 갑자기 너 스캔들 터지게 생겼다며 걱정하는 척해 오면 경계부터 했을 터였다.

“왜. 내가 가져온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쥐 좀 잡아 달라는 부탁의 대가로는 괜찮을 것 같았는데.”

봉두화와 최 주임이 자리를 뜨고도 한참을 그곳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김도연은 연습실로 돌아가자마자 에이튼에게 찬물 세례를 받았다. 남이 마시던 물을 흠뻑 뒤집어쓴 자신의 꼴을 보고도 멀찍이서 힐끔대며 피식거릴 뿐 누구 하나 달려와 주거나 말 걸어 주는 사람 없는 것에 김도연은 거꾸로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한번 마음을 먹자 오히려 번잡하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김도연은 눈앞의 상대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에게 털어놓은 이상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거절당한다면 다 터뜨려 버리고 죽어 버릴 생각이었다.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데 그럼 아무도 못 쫓아올 곳으로 도망이라도 가야지. 안 그런가?

그런 김도연의 속내를 읽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재이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쥐만 잡을 자신이 없어서 말이죠. 잡기 시작하면 주변까지 다 잡아 버릴 것 같은데. 그러면 아마 그쪽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너한테 다 말했을 땐 그 정도 각오는 이미 했어. 데뷔도 해 봤으니 미련도 없고.”

그 데뷔란 것도 별거 없더라고.

짧게 중얼거리며 메마르게 웃는 김도연을 쳐다보던 재이가 말했다.

“내 말은 도망치라는 거지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고요.”

김도연이 뜨끔한 표정으로 재이를 쳐다보았다.

“쥐가 무섭다고 스스로 죽으려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가 하든 누구한테 부탁하든 대청소 한번 싹 해서 치워 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재이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김도연은 멍하니 서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 이제 가 봐야 하는데. 핸드폰 좀 이리 줘 봐요.”

시키는 대로 핸드폰을 내미니 제 번호를 찍은 재이가 폰을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

“연락해요. 혼자 머리 싸매지 말고.”

재이가 건넨 핸드폰 속에는 ‘청소부’라는 이름의 연락처가 새로 등록되어 있었다.

* * *

그날 밤.

케이엠 사옥 내 회의실.

“헐 소오름.”

“와 세상 쉽게 사네. 던져 보고 아님 말고라니. 고소당해도 벌금 물면 그만이라고? 와 진짜 개쓰레기잖아?”

“근데 그거 믿을 만한 거긴 해? 이것도 그쪽에서 쳐 놓은 덫일 수도 있잖아.”

“하긴. 김도연이 제 팔자 제가 꼬긴 했지만 애초에 한재이한테 감정 안 좋은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너한테 그 얘기를 털어놓았다는 게 좀.”

멤버들이 제각각 한마디씩 했다.

재이에게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들은 석관이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멤버들은 방송 스케줄이 끝난 뒤 곧바로 케이엠 본사로 들어갔다. 기획본부 장 이사와 심진우 팀장을 비롯한 핵심 실무진들과 함께 김도연이 재이에게 전한 내용과 그간의 정황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한 멤버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삼화 쪽에서 한재이 흠집 내려고 김도연을 자객으로 보낸 거면?”

“남궁찬, 너 정도 머리로도 추리 가능한 덫을 과연 삼화에서 놓았을까, 라는 생각은 혹시 안 해 봤냐?”

“아 왜, 원래 가장 뻔한 수작이 가장 잘 먹혀들어 가는 법이라고.”

투덕대는 남궁찬과 엠케이 사이에서 인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회사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쪽은 어떻게 대응하죠?”

“일단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쪽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을 쥐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재이야, 거기에 대해서는 뭐 짚이는 거 없냐? 우선은 이게 핵심일 것 같은데.”

심진우가 눈썹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어, 근데 그게 말이죠.”

심각한 상황에도 혼자 태평해 보이는 재이의 말투에 회의실 안에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솔직히 이쪽에서 딱히 준비하지도 않은 덫에 저쪽이 제멋대로 걸려든 느낌이긴 한데.”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천천히 둘러본 재이가 이어 말했다.

“이참에 청소 한번 깨끗하게 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최고의 공격은 선빵이라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는 재이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 *

[데일리 엔터] [특종] 뽀통령 다음은 밐키인가! 아이들의 아이돌 재재님, 애니메이션계의 최강자 ‘픽처스’와 계약

재재님이 일냈다! 지난달 출시된 블럭 코리아의 용사에디션으로 뽀통령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인기를 증명한 재재님이 드디어 한국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본 지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촬영차 미국을 방문했던 한재이(a.k.a. 재재님) 씨는 뉴욕에서 픽처스 사의 아트디렉터 C 씨와 재재님의 용사 이야기를 애니메이션화를 위한 미팅을 가졌다.

이 미팅은 블럭 코리아 CEO의 주선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픽처스 사에서는 한재이 씨를 설득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시니어 디렉터 급인 C 씨를 그가 체제 중인 뉴욕으로 급파했다는 후문이다.

(뉴욕에서_픽쳐스와_미팅중인_한재이.jpg)

(한국_모처에서_픽처스_인사와_미팅중.jpg)

(한재이와의_미팅을_위해_미팅장소로_향하는_아트디렉터_C 씨.jpg)

픽처스 사의 열렬한 구애는 한재이 씨가 그룹 PART.Y의 새 앨범 [Abyss: 심연]의 활동을 위해 귀국한 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픽처스는 한재이 씨와 첫 접촉을 시도했던 C 씨를 한국으로 급파해 직접 조건을 조율하고 계약을 위한 세부 사항을 진행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픽처스와 합작해 본 경험이 있는 한 관계자는 ‘그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픽처스에서 원작자를 설득하기 위해 시니어 디렉터 급의 인사를 직접 파견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픽처스가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동안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고품격 애니메이션으로 아이들뿐 아니라 전 세계 어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온 ‘픽처스’가 재재님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지 기대해 보는 바이다.

[노컷 엔터] 흔한 업계 1위 기업이 될성부른 떡잎을 대접하는 방법: 맨해튼 미슐란 레스토랑에서 미팅 중인 픽처스와 한재이

[스타 뉴스] 노는 물이 다르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재재님의 인기, 비결은 무엇인가.

[스타추적] 어린이들의 든든한 친구 재재님에서 어두운 심연의 제왕 재비스까지. PART. Y 한재이의 팔색조 매력을 집중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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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시시각각 갱신되고 있는 연예 뉴스를 눈으로 훑으며 카이저의 매니저 봉두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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