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한재이 제대로 찍힌 듯
‘이건…….’
재이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통로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스테이지 쪽으로 향하고 있던 다른 멤버들을 재빨리 살폈다. 멤버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였는지 곡의 초반부를 담당하고 있는 랩 라인의 녀석들이 특히 당황해서 표정이 깨지고 있었다.
‘이건 반칙이지.’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객석 바로 옆을 지나느라 무대에 있을 때 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팬들 중 군데군데 붉은 컬러 렌즈 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포트라이트가 스치지 않았다면 무대 쪽에선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왜 굳이…….
그렇지만.
‘짜릿해!’
어두운 회장에서 창백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드문드문 붉게 빛나는 눈빛을 마주하며 걷고 있자니 마치 진짜 어비스에 잠식당한 공간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마 흔들리지 마 기다리고 있을게
여기 이 자리 너를 (나를) 위한 나락 속에서
주변을 서서히 물들여 가듯 옥죄어야 할 자신의 파트가 후렴구를 한목소리로 따라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에 어느샌가 거꾸로 묻혀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가슴 터질 듯 기분 좋은 고양감에 재이는 가장 심각해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활짝 웃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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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마지막에 재비스 웃는 거 보고 소름 돋았잖아요.”
“진짜. 마침 카메라가 재이 씨 얼굴 클로즈업 하는데 . 저 무대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전광판에 뜬 재비스 얼굴 보고 스텝 꼬여서 넘어질 뻔했다니까요.”
노래가 끝나고 스테이지에 모인 멤버들이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왜요? 너무 멋있어서?”
재이의 태연한 대꾸에 객석의 함성과는 반대로 멤버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썩어 들어갔다 .
“진짜, 팬분들 앞이라 참았습니다.”
“매번 이렇게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시네요.”
“참는데 내일 쓸 힘까지 끌어다 써 버린 듯.”
“다음 무대에서 실수하면 다 한재이 씨 탓입니다.”
“아니 무슨 이분들은 맨날 무대에서 실수하면 다 내 탓이래.”
억울하다는 듯 멤버들을 흘겨보고는 투덜대는 재이에 객석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근데 진짜 오늘은 저희가 팬분들께 한 방 먹은 듯해요.”
남궁찬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니까요. 지금 이렇게 보면 그렇지도 않은데 아까는 완전 놀랐다고요. 객석 사이에서 스탠바이 하고 있다가 제 차례에 스포트라이트 들어왔는데 마침 컬러 렌즈 끼고 계셨던 팬분하고 눈이 딱 마주쳐서.”
재이가 눈에 힘을 주며 번쩍 떴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렌즈를 빼고 온 덕에 재비스의 붉은 눈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재이가 눈빛을 번뜩이며 주변을 돌아보자 그와 시선이 맞은 멤버들이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근데 저도 놀랐지만, 그분도 완전 놀라셨는지 으아악 비명을 지르시는데.”
그게 좋아서 지른 비명이 아니라, 그거 있잖아요, 왜. 진짜 놀라서 나오는 소리.
재이가 웃으며 설명하자 인혁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많이 익숙해진 저희도 재비스랑 눈 마주치면 가끔 심장 철렁하는데.”
그러자 엠케이와 은규가 차례차례 한 마디씩 덧붙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깜깜하던 곳에 갑자기 불 들어오더니 빨간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재비스와 눈이 똭!”
“으으, 그분 진짜 공포 체험 하셨을 듯.”
어깨를 움츠리며 진저리를 치는 은규에게 이환이 말을 보탰다.
“재비스가 잘못했네. 왜 우리 소중한 포션을 놀라게 하십니까.”
“재비스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한재이 씨, 반성하세요.”
곧바로 이어지는 멤버들의 몰이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전 제가 놀랐다는 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왜 얘기가 또 이렇게 되냐고요.”
재이의 중얼거림에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프닝을 객석에서 시작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엠케이였다.
팬 미팅은 콘서트를 제외하면 팬들과 직접 양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다. 앨범을 몇십 장씩 살 수 있는 재력의 고인물 이 아니라면 넘볼 수조차 없는 팬 사인회나 멘탈과 체력을 모두 갈아 넣을 수 있는 각오와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전할 엄두조차 못 내는 음악방송 방청과 달리 팬 미팅은 그래도 티켓팅에 운만 따른다면 멤버들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이벤트보다는 진입 장벽 이 낮은 편이었다.
콘서트처럼 장시간 함께 음악에 흠뻑 젖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음악뿐 아니라 게임이나 토크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무엇보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가까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무대 연출 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 엠케이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만족이었다. 붉은색 컬러 렌즈 를 끼고 온 팬들의 서프라이즈가 더해져 완벽한 어비스 월드로 오프닝을 연 파티의 팬 미팅은 이미 객석과의 일체감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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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무대연출은 엠케이 아이디어예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고 그사이 토크쇼 형식으로 세팅된 무대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 앉은 멤버들 중 인혁이 운을 떼자 엠케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오프닝 무대는 멤버들하고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 가져가기로 했는데 기껏 여섯 번이나 게임을 했는데 한재이 혼자 2승을 한 거예요. 그게, 재비스 메인이 음방같은 거 할 땐 임팩트 있어서 좋은데 이렇게 라이브로 하면 다른 멤버들한테 눈이 잘 안 갈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럴 바엔 아예 다들 객석에서 스타트 해서 무대로 모이는 쪽으로 동선을 짜자고 했죠.”
야무진 엠케이의 설명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엠케이한테 잘 보여야 해요. 이분이 실세야. 저 보세요. 죽어라 인형 따내고 내기에서 이기면 뭐 하냐고요 . 결국 이분 한마디에 무대 포커스는 멤버들하고 나눠 가졌잖아요 .”
그러자 멤버들이 일제히 아우성쳤다.
“와, 그만큼 하면 됐지 또 독식하려는 거예요 ? 대체 욕심의 끝 어딨죠?”
“사람이 양심이란 게 있어야 해요, 한재이 씨.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 마음속 어딘가에 부숭하게 흉한 거 있죠? 그게 한재이 씨 양심이란 녀석이라고요.”
“저 정도면 양심이 어딨는지 찾지도 못할걸요.”
“글렀어요. 갱생도 불가능해.”
“괜히 완승의 재비스가 아니라니까요.”
인혁이 객석을 돌아보고는 여전히 시끄럽게 투닥대고 있는 멤버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워워, 여러분 진정하세요. 보세요 좀, 팬분들 얼굴이 딱 ‘쟤네 또 시작이네’ 하고 계시잖아요.”
인혁의 말에 객석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충 그렇다는 뜻이었다.
“이게 저희가 ‘몰이’가 좀 습관이 돼서. 스텝 업 때부터 얼굴만 보면 서로 까내리… 흠, 서로 틈이 보이면 지적하고 그 덕에 고치고 하는데 이런 선순환이 습관 되면 의외로 좋거든요.”
인혁의 설명에 재이가 끼어들어 덧붙였다.
“덕분에 저희 멤버들이 어디 가서 말로 누구한테 지는 법이 없죠.”
“이걸 재이 씨 입으로 들으니 설득력이 배가되는 것 같은 기분이죠, 왜?”
“남궁찬 씨, 네. 정상입니다.”
남궁찬의 말에 이환이 옆에서 거들었다. 분위기가 꽤 풀어진 것을 확인한 인혁이 진행을 이어갔다.
“오늘은 이렇게 여러분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중간중간 멤버들의 개인 무대를 보여 드리면서 진행할 거예요. 편하게 웃고 즐기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뒤로 멤버들이 준비한 여러 가지 무대가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것은 인혁의 무대였다.
“성대모사요?”
“음. 그보다는 모션 카피?”
의외라는 듯 되묻는 엠케이에게 인혁이 대답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재이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어쨌건 인혁 씨가 저희 멤버들을 흉내 내 보시겠다 이거잖아요?”
그러자 다른 멤버들이 우르르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씩 보탰다.
“차 리더,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이게 잘 되면 좋은데 망하면 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괴롭다고.”
“맞아요, 저희야 그냥 안 본 거로 치고 넘어가 줄 수 있지만 팬분들 모셔 놓고 그러면 그건 그냥 무대 사고죠.”
“지금에라도 취소하고 그냥 댄스나 한판 추시는 게 낫지 않나요?”
“아니면 노래라도 해요. 스텝 업 때 잠깐 하고 안 했었잖아요 .”
자신을 몰아가는 멤버들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인혁이 중얼거렸다.
“뭐죠. 컨셉 회의 때랑 다들 말이 다른 것 같은데.”
그러자 그런 인혁을 힐끔 바라보며 재이가 당연한 얘길 한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때 얘기한 걸 진짜 믿었다니. 우리 팀 컨셉 복마전인 거 잊었어요? 인혁 씨 무대가 망해야 우리가 살잖아.”
왜 이러시죠? 아마추어같이.
재이가 덧붙인 말에 인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남궁찬과 엠케이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각자도생! 각자도생!”
“어휴 어쩌겠어요. 그래도 인혁 씨가 기왕 준비해 온 거 보기나 하자고요. 여러분, 여러분도 저희와 같이 인혁 씨가 흉내 내는 게 누구인지 맞혀 보도록 하죠!”
그렇게 인혁의 원맨쇼가 시작되었다.
한편에서 멤버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인혁이 그대로 바닥에 길게 모로 눕더니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다른 손으로 리모컨을 뒤적이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더니 고개만 뒤로 뺀 채 멤버들을 향해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재이- 나 바아압—”
“와하하하- 이건 너무 쉽다, 정답!! 남궁찬! 남궁찬!”
인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못 참겠다는 듯 엠케이가 웃으며 소리 질렀다.
“와 미친 싱크로율!”
“남궁찬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세요……. 어? 왜 남궁찬 씨가 둘이죠?”
“아, 저 진심 지금 혈압 오른 게 진짜로 남궁찬 씨가 저 부르는 줄 알았다고요.”
“저기서 ‘한재이’를 ‘엄마’로 바꾸면 바로 ‘숙소에서의 남궁찬’이 아니라 ‘본가에서의 남궁찬’ 버전이 되는 거죠.”
멤버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자 남궁찬이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저렇게 게을러터진 것처럼 저러고 있다고요? 이거 중상모략 아닙니까?”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들 하죠.”
“완전 딱인데요? 다른 멤버들도 보여 주세요 !”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던 것에 겨우 안심한 듯 좀 전보다 많이 풀어진 얼굴로 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번엔 팔짱을 끼고 한쪽 다리에 균형을 실은 채 삐딱하게 서서는 고개까지 삐딱하게 기울인 채 멤버들을 하나하나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다시.”
“…….”
“…….”
짧은 침묵이 흐르고 한 박자 늦게 이환이 외쳤다.
“으아아아, 정답! 한재이!!!”
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은규가 머리를 쥐어 싸매는 시늉과 함께 말했다.
“아아아, 진짜. 저 ‘다시’ 들을 때마다 체력이 팍팍 깎이는 기분이라고요.”
“멘탈도 같이 와사삭이죠 .”
“제 말이요. 근데 저 말 들었을 때 주저앉으면 안 돼요. 이 악물고 일어서서 다시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까 남궁찬 씨 같은 포즈 나오면 그때는…….”
“아 왜요, 그때는 제가 뭐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재이가 억울하다는 듯 멤버들을 둘러보며 투덜거리는데 뒤에서 인혁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찬, 오늘 밥 없다.”
“…….”
와하하하하하-
그 실감 나게 박력 넘치는 한마디 에 뒤늦게 재이 한 사람을 제외하고 무대와 객석에서 한꺼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둥- 두둥- 두둥- 둥-
암전된 실내에 묵직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릿하게 심장을 내리찍으며 울려 퍼지는 북소리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듯 피리 소리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 속 규칙적으로 뻗어 나가는 북소리 사이로 피리의 음률이 유연하게 헤엄치듯 이리저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리고 객석 뒤편에서 함성이 일었다.
“한재이이이——!!”
“재비스으으——!!!”
“와아아아——!”
어두운 공간 속 재이가 올림머리로 길게 묶은 검은 머리칼을 내려뜨린 채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같이 어두운색의 동양풍 의상을 몸에 걸친 재이의 손에서 붉은 피리가 조명을 받아 번뜩였다.
팬들의 함성에 흘깃 객석을 둘러본 재이가 특유의 웃음을 피식 흘리고는 다음 순간 크게 도약했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재이는 발을 크게 구르며 객석 너머 반대편의 무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그대로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로 날아가는 재이의 모습에 아래쪽의 팬들이 넋을 놓은 듯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쥔 피리만큼이나 붉은 머리끈이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나부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날아올라 단숨에 무대까지 도착한 재이가 느릿하게 스테이지 한가운데에 발을 디디며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검은 의상으로 존재를 최대한 죽인 백댄서들이 재빨리 재이에게서 와이어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그사이 한자리에 가만히 선 채 피리를 불고 있던 재이는 백댄서들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서서히 연주를 멈추고는 천천히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북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던 귓가에 어느샌가 [Abyss: 심연]의 사운드가 차오르고 있었다. 멤버들의 목소리 없이 울리는 사운드는 왠지 더 음울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음악이 완전히 차오르자 흡사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제야 재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팔뚝만 한 길이의 피리를 손에 쥔 채, 마치 춤을 추듯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갈랐다. 무대에 선 단 한 사람의 기백에 객석에 모인 천여 명의 사람들이 숨소리조차 마음껏 내지 못한 채 그의 움직임만을 눈으로 좇았다.
둥-두둥-두둥-둥-
[Abyss: 심연]의 전자음이 다시 한번 낮은 북소리와 겹쳐지며 잦아들자 무대를 빼곡히 수놓던 붉은 피리의 궤적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높게 도약해 공중에서 휘익, 한 바퀴 커다랗게 회전하며 착지한 재이가 길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귀찮다는 듯 짧게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메라가 그 모습을 다급히 클로즈업으로 쫓았다.
음악이 완전히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든 재이가 손을 내렸다.
무대 양쪽의 전광판에 클로즈업 된 화면에는 재비스의 상징인 두 눈 중 한쪽만이 여전히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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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엔터] 파티와 포션이 만난 완벽한 어비스 레이드의 현장! 불타올랐다!
[스타 뉴스] 진정한 심연의 재연! 팬들까지 가세해 완벽한 어비스 월드를 만들어 낸 PART.Y의 팬 미팅 현장
[노컷 엔터] 재비스의 파멸! 붉은 눈의 재비스가 외눈박이가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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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케이엠 본사 회의실
“이유는 무슨, 그냥 공중제비 돌다가 한쪽 렌즈가 빠졌을 뿐인데.”
팬 미팅 관련 기사를 모니터링 하던 이환이 헤드라인을 훑다가 투덜거렸다. 재이의 개인 무대였던 재비스의 독무 마지막 부분에서 재이가 외눈박이가 된 것은 사실 그저 단순한 사고였다. 가뜩이나 맞지 않는 렌즈가 마지막 공중회전을 하는 틈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한쪽 눈에 위화감을 느낀 재이가 기민하게 대처한 덕에 거꾸로 현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재비스의 외눈박이 엔딩은 오히려 팬들이 올린 후기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번지며 인기를 끌었다. 기자들의 헤드라인도 반쯤은 ‘포션에 희석되어 파멸한 재비스’라는 스토리성을 살린 무대 연출 에 대한 칭찬이었으니 화제 몰이는 제대로 한 셈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마지막에 심장 쫄깃한 게 몰입 쩔더라.”
“가만 보면 심은규 쟤가 재비스 찐 팬이야.”
“그러니까 편곡도 재비스한테 몰아줬겠지.”
“와 모함 쩌네. 너희는 어비스는 무대에서 하는 거로 충분하니까 개인 무대는 딴 거 할거라고들 했었잖아, 다들.”
은규는 자신을 재이와 함께 싸잡아 몰아가려던 이환과 엠케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맞받아쳤다. 그러자 이환이 이번엔 공격의 화살표를 인혁에게로 돌렸다.
“차인혁이 다 가져갈 줄만 미리 알았어도 나도 그냥 환비스 했다니까.”
“내 말이. 컨셉 회의 때는 그렇게 자신 없어 하더니. 완전 속은 기분.”
“나도 연기 수업받을래. 차인혁 가르쳐 주신 선생님으로 붙여 달라고 해야지.”
“아서라, 저건 얼굴만 아니라 재능까지 제 형 복붙인것 같은데. 넌 틀렸어.”
이환의 말에 남궁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혁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놈의 핏줄 타령 한 번만 더 하면 아까 몰래 에너지바 먹은 거 석관이 형한테 이를 거다?”
“와, 제 마음에 안 든다고 고자질로 사람을 협박하다니. 차인혁 몇 짤?”
“억울하면 걸릴 일을 만들지 말던가.”
멤버들이 투덕거리고 있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며 석관과 함께 기획팀 심진우가 들어왔다.
“어? 팀장님이 직접 오셨네요?”
“무슨 일 생겼어요?”
자신의 등장에 멤버들이 술렁이자 심진우가 석관을 대신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디션 스케줄하고 멤버들 개인 스케줄 나온 거 얘기도 할 겸.”
“오디션이요? 무슨 오디션이요?”
“랜플릭스에서 기획 중인 시리즈에 오디션 자리가 나서 말이지.”
“오오, 랜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요? 쩐다. 근데 뭔데요? 누가 나가요?”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멤버들의 얼굴을 돌아보던 심진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섬 탈출 서바이벌이라고. 일종의 컨셉 예능이라 시나리오도 있고 캐릭터도 만들어서 들어간다더라고. 그중 한 배역에 랜플릭스에서 우리 회사로도 오디션 오퍼가 들어온 거지. 근데.”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돌린 심진우가 재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이어 말했다.
“투자사 쪽에서 재이 너를 오디션 명단에 넣어 달라고 콕 집어서 리퀘스트가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오오오, 갓재이. 투자사느님께서도 알아보는 유명인!!”
“와 부럽다, 한재이가 저렇게 뜰 동안 나 뭐 했지?”
멤버들이 중얼거리는 소리에도 왠지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심진우를 살핀 재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투자사가 어딘데요?”
재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 석관과 시선을 교환한 심진우가 입을 열었다.
“이게 여러 회사가 펀딩에 참여한 거라 투자사가 한 곳은 아닌데, 알아본 바로는 리퀘스트를 낸 곳이 거기라나 봐.”
‘거기’가 어딘데요.
말을 멈춘 채 잠시 뜸을 들이는 심진우의 태도에 멤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삼화요?”
재이의 한마디에 산만하던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놀란 듯 재이를 바라보던 심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삼화. 거기서 랜플릭스 제작진에게 연락이 왔다더라. 한재이도 오디션 섭외 리스트에 넣어 달라고 .”
“……. ”
“……. ”
“… 한재이 제대로 찍힌 듯?”
짧은 정적 끝에 누군가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재이가 인상을 콱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