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원래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랜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섬 탈출 컨셉 예능 [눈 떠 보니 무인도] 비공개 오디션 회장
- 어? 한재이도 오디션 봐?
- 한재이가 누구야?
- 걔 있잖아, 불탐정 주태온.
- 아, 노영란 작가가 오디션에서 보고 단박에 꽂혔다는?
오디션 지원자 대기실로 들어서자 주변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이는 그런 주변의 반응에 익숙한 듯 실내를 한 번 둘러보고는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성큼 걸어갔다. 호기심, 질투, 멸시 등등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이 등 뒤에 따라붙는 것을 무시한 채 빈자리를 찾아 앉는 재이의 주변으로 수군거림이 계속되었다.
- 잘생긴 건 인정하는데 그렇다고 한눈에 반할 정도는 아니지 않냐?
- 괜히 아이돌이겠냐고. 애교라도 부렸나 보지.
- 윽. 그건 좀.
“야, 원래 오디션 대기실은 이렇게 분위기 살벌한 거야?”
재이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원래 그런지 어떤지 나도 이제 겨우 두 번째라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살벌한 건가, 이게?”
“하아, 그래. 한재이한테 뭘 바란 내가 잘못이지.”
주변의 경계 섞인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멀끔한 얼굴로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이를 바라보며 그의 옆자리에 따라 앉은 엠케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엠케이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눈치챈 재이가 말했다.
“야 이따가 네 차례 돼서 들어갈 때 조심해라. 이환이 음방 출근길에서 걷듯이 걷다간 ‘케이엠에서 새로 꽂으려는 놈은 긴장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라는 카더라 돌기 딱 쉽겠어.”
너 들어가는 거 영상 찍어서 애들한테 보내 줘야겠다 . 이환이 녀석이 좋아하겠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재이의 태도에 엠케이가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는지 눈썹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와, 동료의 첫 도전에 격려와 위로의 한 말씀 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깎아내리냐.”
“억울하면 안 그러면 되겠네.”
“어휴, 저걸 믿고 여기까지 오다니. 내가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재이의 대답에 엠케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모습이 아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것을 힐끔 확인한 재이는 피식 웃고는 오디션장으로 연결되는 출입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랜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에 출연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잘하면 따로 돈 들이지 않고서도 해외 인지도를 쌓을 수가 있었다. 케이엠은 고심 끝에 들어온 기회를 그냥 이대로 내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재이 또한 그 결정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였다.
이 정도 위치에서 꺼림칙한 부분을 다 쳐 내면서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의 발목을 저 스스로 묶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것은 성미에 맞질 않았다.
섬 탈출 컨셉 예능 [눈 떠 보니 무인도].
컨셉 예능답게 출연진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캐릭터와 세계관 속에서 행동할 것이 요구되었다. 드라마와 다른 점이라면 작가와 감독이 원하는 대로 대본과 디렉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의대로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전문적인 배우가 아닌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캐스팅 물망에 올랐고 오디션은 지원자의 연기력보다는 캐릭터와의 친화력, 표현력, 그리고 캐릭터와 거기에 지원한 지원자의 싱크로율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출연진은 총 여섯 명.
사업에 실패한 이종격투기 선수, 협잡꾼 소리를 듣는 4선 정치인, 취업을 준비 중인 대학생과 휴가 중인 군인, 그리고 성격도 외모도 전혀 다른 이란성 쌍둥이 형제였다. 그들 중 재이에게 오디션 오퍼가 들어온 것은 이란성 쌍둥이 형제 중 형인 서도진 쪽이었다.
‘아니 근데, 기왕 꽂아 줄 거면 오디션 건너뛰고 배역에 직접 꽂아 줄 것이지.’
쪼잔하기는.
재이는 곽연호의 미끈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내심 투덜거렸다.
‘뭐, 그래도 덕분에 이 녀석도 같이 올 수 있었으니. 그 덕을 아주 못 본 건 아닌가.’
옆자리를 힐끔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시나리오를 꺼내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는 엠케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부류의 비공개 오디션은 정보전이었다. 투자사의 푸시 덕에 랜플릭스는 그 속내야 어찌 됐건 다른 곳들보다 먼저 케이엠에 접촉해 왔고 케이엠은 제작진과의 사전 미팅 에서 그들이 같은 날 이란성 쌍둥이의 동생 역할 오디션도 함께 진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내부 회의 를 통해 엠케이가 재이의 쌍둥이 형제 역할 오디션에 지원하게 되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연습생 때 월말평가 받던 생각 난다.”
대본에서 눈을 떼고 잠시 멍하니 대기실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엠케이가 문득 중얼거렸다.
“뭔 생각?”
“잘할 수 있을까. 실수하면 어쩌지. 쟤네가 나보다 더 잘하면 어쩌나. 뭐 그런?”
“평범하네.”
짤막한 재이의 대답에 엠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와 진짜 너무한다.”
“뭐가?”
“아니 대부분 사람이 이렇게 화제를 던지면. ‘으아니 시작부터 A팀이었던 갓케이 님 도 월말평가 때는 쫄았다는 겁니까? 믿어지지 않는데요’ 하면서 뭔가 대화의 랠리가 시작돼야지. ‘평범하네’ 한마디가 뭐냐고 ‘평범하네’ 한마디가.”
“그런 대화를 원하는 게 너무 뻔히 보여서 말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재이의 대답에 엠케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차인혁이야 그렇다 치고, 남궁찬은 그 농장 예능 찍는 동안 너랑 어떻게 같이 다녔다니? 말 안 통해서.”
“걔 나랑 안 다녔어. 스크류박 선배님이랑 다녔지.”
“하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엠케이를 힐끗 바라본 재이가 투덜댔다.
“다음 스케줄은 꼭 나랑 하겠다고 엉기던 분 어디 가셨는지.”
“그땐 그때고.”
“들어올 때랑 나갈 때랑 다른 법이라더니.”
재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리는 것에 엠케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으며 말했다.
“아 안 되겠어, 단톡방에 실황 중계 라도 해야지.”
그런 그를 힐끔 쳐다본 재이가 심드렁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그래 봐야 별 대답 안 돌아올걸.”
“… 제길 반박 불가라 분해, 분하다고.”
하루 24시간 중 대부분을 붙어 다녀서인지 파티 멤버들의 단톡방은 기본적으로 별 대화 없이 조용했다. 간혹 개인 스케줄 때문에 각자 시간을 보내는 때에도 도시락 뭐 나왔었다는 자랑과 그것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쏟아질 때 빼고는 기본 조용했다. 그러므로 아마 지금은 엠케이가 뭐라고 하건 읽씹 당하고 말 것이 뻔했다.
엠케이가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이 오디션을 진행 중이던 스태프가 다음 지원자를 호명했다.
“한재이 씨, 들어와 주세요.”
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내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잘하고 와.”
조금 전까지 투덜대던 엠케이가 긴장한 눈빛으로 재이를 향해 낮게 말했다. 그 말에 걸음을 내딛던 재이가 대답 대신 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그 태연한 미소에 엠케이는 저도 모르게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 지원자가… 한재이. 걔구나, 삼화 픽.”
“아, 그 홍리세랑 차상혁 나왔던 드라마에서 철가방으로 나온.”
“아이돌하고 겸업이지?”
“케이엠에서 대놓고 밀어주는 것 같던데. 언제 또 삼화에는 줄을 댔대?”
“삼화랑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왜?”
“거기 신인 그룹 터뜨린 게 케이엠이란 얘기 있잖아.”
“헐 그래?”
“흠. 오디션과 상관없는 얘기는 그만들 하시죠.”
오디션을 참관하고 있는 제작진들 사이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프로그램의 총책임을 맡은 배형욱 피디가 눈썹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그의 한마디에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함을 되찾자 그와 함께 나란히 심사 위원석 에 앉아 있던 메인 작가 윤명주가 배형욱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로 아닌 것 같으면 가차 없이 쳐 내도 되는 거죠? 저 정말 눈치 안 봅니다?”
“거기 말고도 투자하겠다는 곳 줄 섰어.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업에만 신경 써 주세요. 제발 인물만 봅시다. 인물만.”
배형욱이 다른 스태프들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이스, 윤 작가.’
배형욱이 윤명주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중파 예능 피디로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닐 때부터 자신과 함께 배 사단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동고동락했던 윤명주 작가는 분위기가 탐탁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곤 나서서 배형욱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 지금도 그 덕분에 사람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상한 선입견이 퍼지는 것을 일단 틀어막을 수 있었다.
투자사들 가운데 삼화 그룹의 자회사인 삼화 엔터에서 한재이도 섭외 명단에 넣어 달라고 연락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배형욱은 촬영장 밖의 사람들이 촬영장 안의 일들에 간섭하는 내정 간섭 이 딱 질색이었다. 캐스팅을 정하는 것은 오롯이 피디와 작가, 그리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스태프들의 몫.
오디션 리스트에 넣어 주는 것쯤이야 할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뽑느냐 마느냐는 이쪽이 판단할 문제. 투자사들의 입맛은 어차피 시청률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것이었다.
“한재이 씨, 들어오세요.”
배형욱의 눈짓에 입구에 서 있던 스태프가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소문의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한재이입니다.”
현직 잘나가는 아이돌답게 길쭉길쭉한 팔다리에 잘 관리된 외모,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소위 말하는 연예인 포스 팍팍 풍기는 녀석이 꾸벅 인사를 해 왔다.
“반갑습니다. 그럼 우선 지원하신 배역에 대한 재이 씨의 생각을 들어 볼까요.”
인사치레에 할애할 시간 따위 없다는 듯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배형욱의 질문에 재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꽤 심플한 성격이신가 보네.’
하긴 오디션 지원자마다 붙들고 일일이 자기소개 작품 소개 같은 걸 하고 있다간 시간 다 가 버리는 건 둘째치고 말하는 본인이 먼저 지겨움에 지쳐 나가떨어질 테니. 재이는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심사 위원 들의 이름표를 쭉 눈으로 훑고는 입을 열었다.
“출연하는 배역 중 가장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배형욱이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추어올리며 되물었다.
“어느 면에서?”
당연한 질문이었다.
재이가 오디션을 보러 온 역할은 ‘제 방에만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는 내성적이고 음울한 성격의 등교 거부 문제아’였기 때문이었다. 배형욱 피디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재이는 자신의 첫 대답이 그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음을 눈치채곤 씩 웃었다.
“다른 배역들은 이미 그 능력치가 배역의 소개 글에 어느 정도 나와 있는데 도진이의 경우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서 시간을 보낸다고 나와 있을 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녀석이어도 판을 뒤집을 한 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고 조리 있게 자기 생각을 밝히는 재이의 모습에 배형욱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 인원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성격이어서야 애초에 아이돌 같은 걸 직업으로 삼을 수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일리 있는 해석이군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당당한 모습도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배형욱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서도진이는 말이죠, 한재이 씨가 말한 대로 잠재력이 있는 캐릭터인 건 맞는데. 캐릭터 소개에도 쓰여 있듯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내성적이고 음울한 성격’이란 말이죠.”
잠시 숨을 고른 배형욱이 재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까지의 이력을 봐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직접 보니 한재이 씨는 당당하고 구김 없는 성격인 것 같은데. 그런 본인이 서도진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배형욱은 자신의 질문에 마치 그렇게 물어볼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재이를 바라보며 ‘배짱은 좋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듯 옆자리의 윤명주 작가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심사 위원 들의 반응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재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원래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거든요. 성격은 데뷔하면서 많이 바뀐 겁니다.”
전형적이네.
배형욱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배역을 따려고 오디션장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 열 명 중 아홉은 저 소리를 했다. 원래 성격은 소심하지만 일할 때만은 다르다. 난 그만큼 투철한 직업 정신 을 가지고 있으니 잘 봐 달라, 뭐 그런.
‘그런거면 좀 식상한데.’
배형욱은 조금 전까지 눈앞의 녀석에게 일었던 호기심이 뚝 꺾이는 기분에 심드렁한 얼굴로 툭 내뱉듯 말했다.
“그럼 한번 볼까요. 한재이 씨가 준비한 서도진.”
그러자 다음 순간, 재이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 뭐지, 이 느낌.’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한재이의 분위기가 확 바뀐 듯한 느낌에 메인 작가 윤명주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산적 같은 외모의 배형욱 피디가 빤히 쳐다보는 것에도 당황하는 법 없이 당당하게 마주 보며 시선을 맞받아치던 녀석이 지금은 자신과 심사 위원석 중간의 바닥 어디쯤 시선을 고정한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시선 처리와 서 있는 자세만 살짝 바꾼 것인데도 조금 전의 그 당당함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꽤 하잖아?’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옆을 쳐다보니 배형욱 피디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눈앞의 녀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윤명주는 다시 시선을 한재이에게로 돌렸다.
잠시 조용히 서 있던 녀석이 무언가 거슬린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나가.”
무기력하게 내뱉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압감에 윤명주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