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게임의 시작
“재이 씨 말이야, 더 큰물에서 놀 생각은 없나?”
“!!”
곽연호가 대뜸 던진 말에 재이는 물론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엠케이도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곽연호를 쳐다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곽연호가 이어 말했다.
“내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말이지. 재이 씨가 우리 쪽으로 온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대부분 이런 얘기는 뭐 어디 밀실 같은 데서 은밀하게 하지 않습니까?”
태연한 표정으로 훤한 대낮에 이미 소속사가 있는 가수에게 이적할 의향이 있냐고 묻는 기획사 임원이라니.
상도덕도 뭣도 없는 곽연호의 날것 그대로의 스카우트 제안에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어차피 옮기게 된다면 다 알게 될 사실인데 밀실에서 속닥거릴 필요가 뭐가 있다고. 중요한 건 본인 의향이지. 안 그래?”
곽연호가 재이의 심중을 읽어 내려는 듯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재이가 말했다.
“옮길 생각 없는데요.”
옆에서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엠케이였다.
재이는 깜빡이 없이 그대로 들이박는 곽연호의 영업 스타일에 당황했을 엠케이에게 짧은 애도를 보내고는 곽연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나도 재이 씨가 한 번에 오케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그랬다면 오히려 좀 신뢰가 떨어질 뻔했는데. 역시 예상대로네.”
‘이렇게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스타일 정말 딱 질색인데 말이지.’
눈앞의 이 사람하고는 역시 안 맞는 거로. 재이가 속으로 재차 결론을 내리고 있는 사이 곽연호가 말을 이었다.
“뭐, 조금 더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이번 기회를 누가 준 건지도 잘 생각해 보고. 살릴지 죽일지는 본인 판단에 달린 문제니까 방금처럼 단칼에 자르기 전에 충분히 심사숙고해 보길 바라.”
“지금 건 협박입니까?”
곽연호의 의미심장한 말에 재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나직이 묻는 재이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곽연호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협박이라니 무슨 그런 험한 말을. 그저 잘 생각해 보라는 거지. 한재이 씨 커리어, 이제 막 시작이잖아? 사람이 호의를 보일 때 눈치껏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크게 되는 법이야. 기억해 두라고.”
그 말과 함께 곽연호는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재이와 엠케이가 배웅할 새도 없이 성큼 제작진과 투자사 직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곽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엠케이가 휙 고개를 돌려 재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한재이, 너 안 옮길 거지?”
“뭐래.”
“우리 데뷔한 지 아직 1년도 안 됐다. 저 집 애들처럼 산산조각 공중분해 되는 건 사양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중을 간파하려는 듯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엠케이의 눈을 바라본 재이가 대답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을 텐데. 혼자 하고 싶었으면 애초에 솔로로 데뷔했을 거라고.”
별 시덥잖은 말을 다 한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랬었지.
짧게 생각에 잠겼던 엠케이가 다음 순간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근데 어째서일까, 지금 딱 감동 먹을 타이밍인데 왜 살짝 재수가 없지?”
“그건 네가 꼬여서가 아닐까.”
“…참 신기한 일이지, 좀 전까지는 살짝 재수 없던 게 이젠 아주 재수 없어졌어.”
“많이 꼬이셨나보네.”
“누구 탓이냐고.”
재이와 몇 마디 더 투닥대던 엠케이가 새삼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쨌거나 조심하는 게 좋겠어. 어째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게. 하아, 이놈의 인기.”
“…역시 그냥 데려가라고 할 걸 그랬나.”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엠케이에게 하하 웃어 보인 재이의 눈빛은 그러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그날 밤 숙소.
“그래서? 그냥 그러고 끝이야?”
“촬영장에서 당당하게 협박이라니. 아무리 투자자라고 해도 갑질 쩌는데.”
“으아, 찜찜하다, 찜찜해.”
언제나 그렇듯 자러 들어가기 전, 거실에 모여 오늘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멤버들은 오늘 곽연호가 촬영장까지 찾아와 재이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엠케이와 재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혁이 물었다.
“회사에는 얘기했어?”
“석관이 형이랑 심 팀장님하고 얘기하긴 했는데 딱히 저쪽에서 직접적으로 뭔가를 더 걸어오지도 않은 이상 우리가 먼저 어떻게 움직일 수도 없고. 뭐, 그래서 우선 일단은 좀 두고 보는 거로.”
인혁의 물음에 재이가 대답하자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 쉬던 멤버들 중 이환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럼 역시 엠케이를 심어 둔 게 신의 한 수네.”
“심 팀장님 선견지명 쩌네요.”
“레알. 엠케이가 지켜보고 있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도장 찍었을 줄 누가 알아.”
아니, 너희 아무리 그래도 내 신용이 그것밖에 안 됐냐.
이환의 중얼거림에 이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는 남궁찬에 어이가 없어진 재이가 뭐라 반박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은규가 엠케이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엠케이 우리 그룹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다. 촬영 내내 한재이 딴짓 못 하게 잘 감시해라.”
“그래, 원래 사람 마음이 갈대 같은 거라 지금은 아니어도 혼자 두면 혹할지도 모른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오디션 볼걸. 엠케이 혼자 지키는 것보단 둘이 번갈아 지키는 게 나았을 텐데.”
그 말에 신이 난 이환과 남궁찬이 한마디씩 더 떠드는 것에 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재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달은 인혁이 힐끔 그를 마주 보곤 엠케이를 향해 짧게 말했다.
“화장실 갈 때도 따라가.”
차인혁 너마저.
재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 *
[눈 떠 보니 무인도]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고 있던 여섯 명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에서 눈을 뜨게 된다. 함께 놓여 있던 것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이 들어있는 스타터 팩과 ‘게임의 룰’을 설명하는 수상한 메시지.
사업에 실패한 전직 이종 격투기 선수 최도훈.
4선 의원이지만 선거 운동 비리 혐의로 기소된 국회의원 조영주.
대학교 졸업반 취업 준비생 박송선.
휴가중인 군인 오인조.
그리고 이란성 쌍둥이 형제 서도진, 서계진.
5일간 살아남아 무사히 탈출 지점에 도착한 사람에게는 총 30만 달러, 한화 약 3억 원의 보상이 주어진다. 이 의문의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첫 촬영은 우선 출연자 두 명당 한 팀으로 총 세 팀으로 나뉘어 시작되었다.
재이와 엠케이가 맡은 서도진, 서계진 형제의 출발 지점은 그들이 무인도에서 처음으로 눈을 뜬 곳인 해변에서 섬 안쪽으로 이어지는 숲의 입구. 오늘 촬영할 분량과 대본, 카메라 동선을 확인한 뒤 곧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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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
하얀 모래알이 뜨거운 태양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모래사장 끄트머리에 쓰러져 있던 서도진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서서히 눈을 떴다.
분명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잠깐 쓰레기 버리러 집 밖으로 나왔던 참이었는데.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모래사장이 반사하는 햇빛에 안경 너머로도 눈이 따가운 듯한 느낌이었다.
“으음…….”
귀에 익은 목소리에 돌아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제 쌍둥이 동생인 서계진이 대자로 뻗은 자세로 드러누워 태평하게 코까지 곯며 자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발로 몇 번 툭툭 치니 계진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내 매로나——!!!”
도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여간에 이 상황에서도 먹을 것만 찾지.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봐. 여기 이상해.”
도진의 말에 계진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는 또다시 소리 질렀다.
“미친!! 바다잖아!!! 어째서! 우리 여기 왜 와 있는 거야? 깜짝파티야? 와 경치 죽인다! 여기 어디야?”
그냥 깨우지 말 걸 그랬나.
도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도진은 안중에도 없이 이미 바닷가로 뛰어간 계진은 무릎까지 차오르는 바닷속에 발을 담그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바닷물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서계진 너 갈아입을 옷 없다, 알아서 해.”
“아 진짜? 으악!”
도진의 외침에 마침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던 계진이 뒤늦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청이.”
도진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왜 쓰레기 버리러 나갔던 자신이 저 멍청이와 함께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건지 알아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도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색 배낭과 종이가 든 유리병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본 게임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은 당신에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이곳은 무인도.
당신을 포함한 여섯 명의 참가자들은 5일간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5일째 되는 날, 지도에 표시된 탈출 지점까지 살아서 도착하신 분께는 이곳을 탈출하실 기회와 30만 달러의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이곳에 있는 인간은 당신을 포함해 단 여섯 명.
탈출에 성공하면 30만 달러는 당신의 것입니다.
“…30만 달러 필요 없으니까 집에나 가게 해 줘.”
도진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물에 흠뻑 젖은 계진이 뛰어와 말했다.
“야, 저기 우리 말고 누군가 또 있나 봐.”
모래사장의 아지랑이 사이로 저 멀리 점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여기요- 하고 손을 크게 흔들려고 하는 계진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아 야자수 아래쪽 수풀 뒤로 몸을 숨기며 도진이 말했다.
“야 이 눈치도 없는 놈아, 조용히 좀 해 봐.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도진의 말에 계진이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닫고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는 제 쌍둥이 형을 쳐다보았다. 도진은 그런 계진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짓하고는 제가 쥐고 있던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계진에게 보여 주었다.
“…30만 달러 필요 없으니 집에 보내 주면 안 되나?”
랄까, 그게 우리나라 돈으로 얼만데? 30만 원?
계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도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어쨌건 일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기 전까지는 섣불리 다른 사람들하고 섞이지 말자고. 만일, 이 메시지에 적힌 게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도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왠지 섬뜩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여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우선 안쪽으로 들어가자.”
“안쪽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적어도 마실 물은 있겠지.”
“이거 마시면 되잖아?”
계진이 스타터 팩 옆구리에 꽂혀 있던 생수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다 마시면 그때부턴 어쩌려고?”
“…그건 그렇네.”
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수풀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근데 너 어째 좀 신나 보인다?”
“그래?”
“어. 인제 와서 얘기지만 난 너 뱀파이어한테 물린 줄 알았잖아.”
“뭔 헛소리야.”
“햇빛 받으면 타 죽는 줄 알았더니 이 시간에 밖에 나와도 멀쩡하네.”
“미친.”
도진과 계진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숲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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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진이 분량은 쳐 낼 게 없겠는데?”
“그러게. 케미 좋네.”
작가 두 명이 재이와 엠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스타터 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곧장 식수를 찾아 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섬 전체에 출연자들이 선택 가능한 루트를 여러 종류 만들어 놓은 터라 갈림길에서 스스로 선택한 길을 따라 진행해 나가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큰 차질 없이 착실하게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이 앞서 걷는 두 사람을 바짝 쫓으며 그 모습을 촬영하고 대열의 뒤쪽에서는 제작진들이 GPS를 통해 참여자 전원의 위치가 표시되고 있는 지도를 확인하며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다른 팀들과 공유했다. 작가 중 하나가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피디에게 물었다.
“피디님 어때요?”
“이대로 쭉 가다 보면 최도훈하고 만나겠는데.”
최도훈은 배우 정민길이 맡은 배역인, 사업에 실패한 전직 이종 격투기 선수의 이름이었다.
제작진들의 시뮬레이션과 출연진들이 모여 진행된 사전 오리엔테이션 모두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인물이기도 했다. 피디의 말에 작가 중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최도훈 씨 조영주 씨랑 같이 출발하지 않았던가? 그새 헤어진 거예요?”
최도훈은 실력파 배우로 영화 쪽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 정민길이, 부패한 4선 의원 조영주는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 금정애가 맡았다.
애초에 역할을 맡은 배우 두 사람 모두가 기가 센 성격인 데다가 그들이 맡은 캐릭터들 또한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다 보니,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찢어져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모양이었다.
지도에서 눈을 뗀 피디가 무전기를 들어 최도훈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배형욱 피디에게 무전을 쳤다.
“도계진 형제 앞으로 10분쯤 후에 최도훈과 합류합니다.”
- 라져. 각오하고 오라고 해요.
배 피디의 목소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그 말투에 피디가 고개를 갸웃했다.